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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51화 (51/200)
  • # 51

    Chapter 14. 전설의 부활 (1)

    단전이 찢어질 듯 욱신거린다.

    게걸스럽게 내공을 집어삼키는 역천검이 흐릿하게 호랑이의 형상을 드러냈다. 정천우의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지지징…….

    전신의 공력을 모조리 역천검에 담자 검신에서 미약하게 진동이 일어났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아직은 무리다 싶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가장 믿음직한 무공이기도 하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드는 오우거들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면 넓은 범위를 단번에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전륜도법에는 그런 수법이 없으니 믿을 건 오직 오호단문도뿐이었다.

    “으아아아!”

    잭슨이 비명을 지르며 정천우를 향해 달려왔다.

    짜증스러운 놈이다. 생각 같아선 달려오는 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녀석을 베는 데 힘을 사용할 때가 아니다.

    정천우는 온몸의 힘을 모조리 집중한 채로 눈을 부릅떴다.

    “비켜어! 노호출격(怒虎出擊)!”

    정천우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기합과 함께 역천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잭슨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는 바닥으로 몸을 던지면서 역천검을 피해 냈다.

    뇌전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호랑이 형상의 기운이 역천검에 빨려 들어가 허공에 빛의 궤적을 만들어 냈다.

    “크훠엉!”

    “쿼허헝!”

    “쿠룩! 그르륵…….”

    도망치는 인간을 쫓아오던 오우거들이 정천우의 근처에 다가오기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륵?”

    오우거들은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번쩍인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피부가 쩍 갈라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허공에 뿜어졌다.

    “우워어어어!”

    “크와아악!”

    여섯 마리의 오우거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팔이며 다리며 할 것 없이 여기저기 피부가 쩍 벌어진 채로 피가 흘러나왔다. 검기에 의한 상처라 뛰어난 회복 능력에도 불구하고 잘린 근육이 쉽게 아물지 않았다.

    “헉, 헉…… 빌어먹을!”

    정천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욕설을 터트렸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아프다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이를 득득 갈고 있는 오우거가 언제 상처를 회복할지 모른다.

    “제길! 뭐 해, 인마! 안 도와?”

    정천우가 역천검을 들어 오우거의 목에 쑤셔 박으면서 잭슨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 네!”

    잭슨은 정천우의 믿기지 않는 실력에 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뒈지고 싶어? 오우건지 뭔지 좀 죽이라고! 새끼가, 살려 줬더니 제대로 병신 짓하고 자빠졌네! 빨리 안 움직여!”

    정천우가 몽둥이를 집어 드는 오우거의 팔목을 발로 뭉개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예, 옛!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잭슨이 정신을 차리고는 꿈틀거리는 오우거의 목을 세이버로 갈라놓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한 방에 목을 갈라놓지 못하고 도끼질하듯 여러 번이나 내려쳐야만 했다.

    “헉, 헉…… 제기랄! 살아남은 건 우리뿐인 거냐?”

    정천우가 지친 얼굴로 잭슨을 향해 말했다. 내공이 고갈된 상태에서 오우거를 죽이느라 무리가 간 것이다. 출발했을 때 보여 주었던 잭슨에 대한 예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습니다.”

    잭슨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겨우 대답했다.

    정천우는 역천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기절한 제인을 업었다. 그러고는 기절한 제인이 흔들리지 않도록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가자! 늦으면 더 위험하다.”

    정천우가 앞장서서 걸었다.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곧 놈들이 인간의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올 것이다.

    잔인한 얘기지만 정찰대원들의 시체는 놈들의 정신을 끌어 주는 미끼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점을 다 먹고 나면 놈들은 새로운 사냥감을 찾을 것이다.

    일단은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급선무다.

    제인을 업은 정천우를, 잭슨이 시무룩한 얼굴로 쫓아갔다.

    ***

    “으으음…….”

    “정신이 들어요?”

    “여기는…….”

    제인은 힘겹게 눈을 떴다.

    “당신…….”

    목이 메어 와 제인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마지막에 정천우가 보여 주었던 번개의 샤벨타이거를 보았을 땐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죽지 않고 정천우의 얼굴을 보게 되니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오우거의 앞을 막아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든 오우거였지만 눈앞에서 정천우가 죽는 것보단 두렵지 않았다.

    제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정천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어?”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요.”

    정천우의 목을 팔로 꼭 끌어안은 제인이 힘 빠진…… 그러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센 감정을 담아 속삭였다.

    “……이제 안심해도 돼요. 우린 살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제인의 행동에 살짝 놀랐지만 정천우는 이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강한 척하긴 했지만 제인도 여자는 여자다. 눈앞에서 동료의 몸이 찢기고 몬스터에게 뜯어 먹히는 걸 봐야만 했다. 그토록 끔찍한 광경을 접하고서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다.

    한참 만에야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면서 제인이 포옹을 풀었다. 얼굴이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여기는 어디…… 으음…….”

    제인이 주변을 살피다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정천우를 살아서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에 잠시 고통을 잊었을 뿐이었다. 마나를 한계까지 사용하고 그 무지막지한 오우거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냈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우선 안정부터 취하세요. 여기는 어제 야영했던 장소예요.”

    “그렇군요. 마나부터 회복해야겠어요.”

    “그래요. 일어나시면 식사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을게요. 몸부터 치료하고 나서 이동하는 걸로 하죠.”

    “알았어요. 마나를 회복하는 동안 절 지켜 주세요.”

    간단히 말을 마친 제인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마나를 회복하는 것과 마나를 수련하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주변의 마나를 심장에 만들어진 고리에 저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았으니까.

    “신기하네.”

    정천우는 주변에 흐르는 대자연의 기운이 제인에 몰려드는 것을 살피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공과는 확연히 다르다.

    심법을 사용해 내공을 쌓을 때는 호흡을 통해 기운을 빨아들이고 단전에 내공을 축적한다. 그러나 제인의 방식은 그것과는 달랐다.

    마치 주변에 기운을 잔뜩 끌어다 놓고 기운이 알아서 몸속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정천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잡다한 기운까지 모조리 불러다 놓고 몸이 알아서 속성에 맞는 기운을 흡수하길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인이 마나를 회복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천우가 몸을 일으켰다. 지루하기도 했고, 딱히 주변에 위협될 만한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저 자식이?’

    문득 정천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쯤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잭슨의 모습이 한심했다. 처음 영지의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보여 주었던 오만함이나 자부심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정천우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무리 잭슨이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고는 해도 저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 건 민폐다.

    잭슨의 곁으로 다가간 정천우가 주먹을 말아 쥐고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어억! 으으으…….”

    “네가 지금 멍 때리고 있을 때냐?”

    정천우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영지로 되돌아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도중에 몬스터가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형 몬스터는커녕 고블린조차 위협적이다.

    정찰대원이라고는 이제 셋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도 제인은 부상당해서 전력이 되지 못한다.

    싸울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신과 잭슨뿐인데, 저렇게 정신 나간 놈처럼 있으니 정천우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익!”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정천우는 주먹에 내공을 불어넣어 자신을 노려보는 잭슨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컥!”

    잭슨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바닥을 굴렀다.

    이처럼 엄청난 주먹은 처음이었다. 해머로 얻어맞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네놈의 재채기 때문에 정찰대원이 모조리 죽었어. 넌 새꺄, 세상에서 제일 좆같은 재채기를 한 거야. 알아?”

    “크흐흐흑…….”

    잭슨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굵은 눈물을 흘렸다.

    가슴을 후벼 파는 정천우의 말에 얼굴이 뭉개지는 아픔보다 슬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10명의 목숨을 잡아먹고 살아났으면 더 악착같이 살아야 할 것 아냐! 개자식이, 뭘 잘했다고 정신줄 놓고 지랄이야? 그렇게 뒈지고 싶어?”

    “그게, 그게…… 크흑…….”

    잭슨은 정천우의 신랄한 욕설에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팽진우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 죽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아꼈다. 최후의 순간엔 몰려드는 오우거 떼를 막으면서 도망치라고 했다.

    정천우의 욕설은 잭슨을 괴롭게 하는 마음의 상처를 더욱 헤집어 놓았다.

    “내가 네놈 처먹을 음식까지 해다 바쳐야 속이 시원하겠어? 다른 사람 목숨 잡아먹고 살아났으면 밥값을 해, 이 새꺄! 질질 짜면서 주접떨지 말고!”

    바닥에 침까지 뱉으면서 정천우가 한바탕 욕설을 늘어놓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는 것쯤이야 정천우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 때문에 멍하게 있다가는 남은 사람들까지 위험해진다.

    아직 지나가야 할 몬스터 서식지가 많다. 저런 정신머리로 행동했다가는 멍청한 짓을 반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최악의 경우엔 잭슨을 버리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정천우였다.

    “……습니다.”

    “뭐? 웅얼거리지 말고 제대로 지껄여. 네놈 따위의 투정을 받아 줄 만큼 내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한심하다는 말투로 정천우가 빈정거렸다.

    이건 악연(惡緣)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말썽이더니 끝까지 말썽이다. 이런 인간은 정천우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다.

    “진우 경은 제 스승입니다. 제가 너무 미숙해서 진우 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보 같은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큭…….”

    잭슨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자신 때문에 정찰대원들이 모두 죽었다. 그때 재채기만 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급작스럽게 싸우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는 기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팽우룡 단장님의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정찰 임무에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잭슨의 얼굴에 잠시 갈등하는 빛이 나타났다가 이내 결연하게 바뀌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정천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천우 경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힘주어 말하는 잭슨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반드시 자신이 한 말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 나왔다.

    정천우는 그런 잭슨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랄하고 있네. 내가 미쳤냐? 어디서 개수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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