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45화 (45/200)
  • # 45

    Chapter 12. 위험한 희망 (2)

    ‘시간 지나면 화가 풀리겠지, 뭐.’

    정천우는 제인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그냥 놔두자고 편하게 마음먹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걷는데 팽진우가 손을 들었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정천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전방에서 무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하니 대략 열 마리 정도의 오크였다.

    과연 팽진우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중급 몬스터들을 발견했다는 신호다.

    팽진우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전방을 가리켰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했던 정천우는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세이버를 뽑는 것을 보고서야 뜻을 알 수 있었다.

    사사삭…….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전진했다. 정천우는 그 뒤를 따랐다. 제인은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뒤를 쫓았다.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을 전진하자 오크들이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팽진우는 신호 대신에 몸을 날렸다. 기사들이 덮칠 때까지 오크들의 말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서걱!

    “꾸익!”

    “적이다! 인간이다!”

    팽진우가 풀숲에서 튀어나와 동료의 목을 날리는 것을 본 오크가 놀라 소리쳤다. 위기를 느낀 오크들이 분분히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대응하기에는 한참이나 늦었다.

    ‘뭐야? 다들 실력이 좋잖아?’

    정천우가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열두 마리의 오크는 단숨에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뭘 해 볼 사이도 없었다.

    뒤따라 풀숲에서 나온 제인은 주문을 멈췄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문을 외웠지만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여기까지 오크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군.”

    잠시 주변에 귀를 기울이던 팽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막 정찰에 나섰는데 벌써 오크들이 눈에 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조만간 몬스터들이 상위 포식자에게 밀려 2차 침공을 벌일 거라는 마법사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증거다.

    “더욱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오크의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이동한다.”

    말을 마친 팽진우가 등을 돌리자마자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부하 기사들 역시 초입부터 오크가 나타나는 것에 긴장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

    정찰대원들의 움직임은 처음 정찰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욱 신중해져 있었다.

    선두에서 정찰대를 이끄는 팽진우는 귀를 기울이면서 몬스터의 기척을 찾아냈다.

    세 시간을 이동하는 동안에 두 번의 격돌이 있었다. 격돌이라고 해 봐야 기습에 이은 일방적인 도륙이었을 뿐이다. 전원 기사로 이루어진 정찰대는 생각보다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응? 이게 무슨 일이지?”

    팽진우는 주변에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줄에 발을 묶인 채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오크, 다리가 하나 날아간 채 뜯어 먹혔는지 뼈만 남은 고블린, 심지어 발이 올가미에 묶여 나무에 매달린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오크까지 있었다.

    “제가 사냥하던 곳입니다.”

    정천우는 자신이 만들어 둔 덫에 걸려든 몬스터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한동안 방치하고 있었는데 몬스터가 덫에 모조리 걸려 있을 줄은 몰랐다.

    식량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성한 놈들이 없었다. 아마도 덫에 걸린 김에 잘됐다고 쾌재를 부르며 뜯어 먹은 모양이었다.

    “사냥? 주군께서 기사로 임명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번 몬스터 침공 때문에 얼렁뚱땅 기사가 되었을 뿐입니다. 사냥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대와 같은 분이 사냥꾼 일을 계속한다는 건 영지의 입장에선 손해인데…….”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조금 더 수련에 힘쓰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정식 임무에 투입되지 않는다고 들었던 명예기사직이다. 그럼에도 이런 명령을 받았다. 정식기사가 되면 수고비도 없이 일해야 하는데 그건 정천우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한 군데에 매이는 것도 싫은 판에 정당한 대가도 없다면 그것만큼 못 해먹을 짓도 없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존중하겠습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저는 몬스터들이 덫까지 놓을 수 있는 줄 알고 긴장했지 뭡니까.”

    팽진우는 안도하며 슬쩍 웃었다. 정천우의 눈에 깃든 곤란한 기색을 읽은 것이다.

    검을 든 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사가 되기를 거부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사람이란 각자의 생각과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팽진우는 관심을 접고 다시 기척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까딱 몬스터의 기척을 놓쳤다가는 정찰대 전원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라는 일이다.

    “저 방향으로 가셔야 합니다.”

    정천우가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미적거리면서 헤매는 게 답답했다.

    정찰대를 구성하는 기사들의 마나양은 정천우가 가장 부족하다. 하지만 운용 능력은 정천우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온갖 기술이 난무하던 중원이었다. 기척을 찾아내는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쯤은 강호인들에게 있어 반드시 습득해야 할 기술 중의 하나다.

    기술의 이름처럼 천 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90~100미터 거리 밖에 있는 몬스터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다. 귀에 내공을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몬스터가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이나 귀를 기울이고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팽진우 때문에 그가 끼어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사냥꾼은 귀가 밝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꺼림칙하다면 굳이 제 말을 따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대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팽진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어떤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정천우를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길을 가던 정찰대는 더욱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적이 끊긴 곳이었다.

    몬스터 산맥과 맞닿은 곳이라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 길이 생겨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정찰을 위해선 길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돌아갈 곳을 표시하기 위해서다.

    길을 만들면 확실하게 표시가 되니 일석이조의 행동이었다.

    ‘대단하다. 내공이 썩어 나는구나, 썩어 나!’

    정천우가 팽진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허리까지 오는 풀이나 앞을 가로막는 넝쿨과 나뭇가지를 쳐 내는 데 마나 쉐도우를 발휘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일에 마나 쉐도우를 발휘하는 것은 절삭력을 높여 소음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문제는 벌써 두 시간이나 이동하고 있음에도 팽진우가 지쳐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벌써 마나 쉐도우를 수십 차례나 발휘하고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수련, 수련이 필요해!’

    정천우는 자신보다 월등한 마나양을 지닌 팽진우를 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야 자신이 내공에서 한참 뒤처져 있지만 이제부턴 달라질 거라 믿었다.

    이곳은 중원보다 대자연의 기운이 더 짙은 세상이다. 이곳에서 혼원벽력신공을 수련하면 10~20년 뒤에는 이들을 뛰어넘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육합권의 동공으로 마나를 쌓는 속도가 빨라진다 해도 혼원벽력신공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말이다.

    날이 어스름할 즈음에는 정찰대가 거의 몬스터 산맥에 접근해 있었다. 정찰대장인 팽진우가 정천우에게 길잡이를 맡긴 후에는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았다.

    계속 전진하던 팽진우가 정천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엄지와 검지를 붙인 뒤 눈을 크게 떴다. 안전한 곳인지를 묻는 행동이었다.

    “작은 소리로 말한다면 괜찮을 정도는 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을 피울 순 없으니 건조식품으로 해결합니다.”

    팽진우는 나직한 목소리로 휴식을 내렸다.

    기사들이 그제야 긴장 풀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행군하는 것은 그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은 역시나 제인이었다.

    마법사들이 약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사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마나를 받아들이는 만큼 마법사들의 몸은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튼튼하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이어진 고된 행군에 그녀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기사들과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녀 때문에 일부러 속도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안쓰러워서 못 봐 주겠군.’

    정천우는 지친 얼굴의 제인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팽진우가 정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심각한 것으로 보아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천우 경,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계속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대 덕분에 특별한 위험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게 다 진우 경께서 잘 이끌어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정천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겸손한 척 대답해 주었다.

    그는 빨리 이번 임무를 끝내고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실력을 키워서 키아벨리아스라는 놈을 찾아가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와는 마음이 달라졌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중원이 그리웠다. 중원의 음식이 그리웠고, 걸쭉한 욕설을 입에 달고 살던 낭인들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진미령이 보고 싶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믿을 수 없는 현상.

    만약 그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자신이 중원에 돌아가서도 그녀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을 향상시키는 게 최우선이다.

    ‘늦어도 상관없어. 살아만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천우 경?”

    “아! 죄송합니다. 잠시 고향 생각이 나서…….”

    정천우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팽진우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한번 머릿속에 떠올라 버린 중원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아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마음이 안정되질 않는군요.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녀오십시오.”

    침울해하는 정천우가 안쓰러웠는지 팽진우는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걸 잊고 위로해 줬다.

    정천우는 우울한 얼굴로 정찰대가 머문 자리를 벗어났다. 주변에는 정찰대원들의 기척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리도록 파란 달만이 정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우…… 답답하네. 서대륙에 가야 그 키아벨리아스란 놈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정천우는 걸음을 멈춰 서서 중원과는 다른 파란 반달을 보다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더 걸어 봐야 마음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던 그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자리에 앉았다. 문득 외롭다는 느낌에 하릴없이 한숨만 내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응? 이건…….”

    향수(鄕愁)에 젖어 생기를 잃었던 눈에 점차 힘이 돌아왔다.

    정천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중원에서 의원이었던 악소추와 친하게 지내던 정천우다. 다른 건 몰라도 몸에 좋은 건 꼭 챙기라는 말과 함께 주워들은 것들이 있다.

    정천우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몸에 좋은 건 돈이 된다는 말과 같다.

    “설마…….”

    정천우는 조심스럽게 주변의 땅바닥부터 파고 들어갔다.

    다섯 장의 이파리.

    악소추에게 들은 대로라면 이것은 분명…….

    “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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