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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44화 (44/200)
  • # 44

    Chapter 12. 위험한 희망 (1)

    “아우! 아침부터 꼭 이래야 하냐?”

    제럴드가 인상을 벅벅 긁었다. 어제 오후에 돌아온 정천우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육합권인가 육갑권인가를 배우라고 난리를 피워 대기에 마지못해 승낙했다. 대충 배우는 척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어제는 대충 넘어갔는데, 아침부터 또 같이 해야 한다고 난리를 피워 대니 제럴드로서는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인마,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야. 언제까지 경비대 일이나 하고 있을래? 또 몬스터 쳐들어온다잖아. 이번엔 내가 같이 있을 수도 없다. 잡소리 그만하고 열심히 해.”

    정천우는 구시렁대는 제럴드의 엉덩이를 발로 차 주고는 육합권의 기수식을 잡았다.

    검을 들고 하는 수련은 검로(劒路)가 어긋나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육합권이라면 집 앞마당에서도 여럿이 수련할 만하다.

    “남의 소중한 엉덩이를 차고 지랄이야! 이번엔 쉬울 거라며?”

    “참 말 많네. 그냥 닥치고 하라면 해. 직접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쉬울지 어려울지 모르는 거다.”

    정천우는 기수식을 잡으면서 표정을 바꾸었다. 그제야 제럴드도 어쩔 수 없이 정천우를 따라 육합권을 수련했다.

    ‘자식이,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정천우는 육합권을 수련하는 중에도 제럴드의 움직임을 살폈다. 다행히 제법 잘 따라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별다른 효과를 느낄 수 없겠지만 꾸준하게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큰 효과를 보고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

    “후와! 후와! 이거 은근히 빡세다?”

    “몸에 좋은 거야. 내가 그랬잖아. 열심히 하다 보면 마나를 느끼는 날이 올 수도 있어.”

    “꿈같은 얘기다. 어? 누가 아침부터 말을 타고 지랄이야? 동네 시끄럽게.”

    “응?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제럴드의 투덜거림에 뒤를 돌아본 정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히힝!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온 병사가 말을 멈추기가 무섭게 뛰어내려 정천우의 앞에 섰다.

    “천우 경 되십니까?”

    “네, 제가 정천우입니다.”

    “내일 출발하기로 했던 정찰대가 오늘 출발하기로 했답니다. 급히 천우 경을 모셔 오라는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저는 걸어갈 테니, 말을 타고 가셔서 정문 경비한테 맡기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이거 너무하네. 왜 이랬다가 저랬다가 사람 피곤하게 이러는 거야. 에휴…… 그놈의 돈이 웬수다.”

    정천우가 투덜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마법 배낭을 챙겼다. 미리 챙겨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맨몸으로 가는 불상사가 벌어질 뻔했다.

    “인마! 엉아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해라!”

    “시끄러워, 자식아! 내가 애냐? 너나 조심해!”

    제럴드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이제껏 늘 혼자였으니까 말이다.

    말로는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였지만 제럴드의 손은 어느새 정천우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달고서.

    ***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다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천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엄청난 욕설과 함께 툴툴거리고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기다리고 지랄이야? 어째 초반부터…… 응?’

    “제인 마법사님도 같이 가는 겁니까?”

    “왜요? 제가 가면 안 되나요?”

    제인은 잔뜩 꼬인 목소리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어제의 앙금이 남아서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정천우로서는 또 지랄이라고 속으로 투덜댈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죠.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아니, 죄송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됐어요.”

    제인은 ‘다치기라도 하면…….’이라고 말하는 정천우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붉어지려는 자신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가 오면 쌀쌀맞게 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하하하! 오늘은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임무에서만큼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네.”

    팽선웅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제인은 아예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제인 마법사가 필요한 이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지.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마법이 훨씬 효과적이라네. 몬스터들은 마법을 쓰지 못하니 말일세. 다른 마법사들은 다들 나이가 많아서 무리한 행군이 불가능하니 제인 마법사가 제격이지.”

    팽선웅 백작이 제인과 함께 작전에 투입되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자! 이번 정찰 임무를 책임질 팽진우 경일세. 서로 인사 나누게.”

    “팽진우입니다. 어제 천우 경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단장님께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임무에서도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실력입니다. 그저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천우는 그의 칭찬에 쑥스러워하며 그가 내민 손을 쥐고 흔들었다가 놔주었다.

    텃세를 부리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제인과는 이상하게 삐걱거리는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저……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아! 잭슨 경! 괜찮습니다.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정천우는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잭슨을 향해 밝게 웃어 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잭슨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자 마음이 놓였다. 어제 정천우가 떠나기 직전에 보여 준 서늘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어제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니 마음의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여러분은 모두 팽가의 귀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명심하길 바라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몬스터의 서식지만 파악해서 돌아오라고 당부하고 싶소. 내일이면 부상당한 기사들까지 회복되니 그때 대규모로 토벌할 것이오.”

    “예, 주군!”

    팽선웅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의를 표했다. 정천우 역시 그들을 따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럼 진우 경, 그대만 믿겠소.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오.”

    “주군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팽진우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팽선웅 백작이 신뢰의 눈빛을 보내자 그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기사단장과 부단장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자신의 실력은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할 기회가 바로 이번 임무였다.

    처음 이번 일을 맡았을 때 가졌던 ‘너절한 임무’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날아갔다.

    “좋소! 출발하시오!”

    “명을 받듭니다!”

    칭찬 한 번에 기분이 고조된 팽진우는 군례를 올리고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정천우 역시 사람들을 따라 말에 올라탔다.

    ‘제인 마법사까지 12명.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로군.’

    정천우는 일부러 맨 뒤에서 말을 몰았다.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서다.

    다들 나쁘지 않은 실력자로 보였다. 최소한 자신보다 마나양은 훨씬 앞서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을 따를 순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나같이 팽가의 기사들.

    12명의 기사라면 이번 정찰 임무를 허투루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다닥, 다가닥, 다닥, 다각!

    12명의 인원이 말을 타고 달려와 경비대 앞에 서자 주간조를 맡은 최고참인 샘슨이 경비실에서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충!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샘슨은 잔뜩 군기 든 자세로 군례를 올렸다.

    얼마 전에 벌어진 몬스터 침공에서 샘슨은 기사들의 무서운 위력을 실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겉멋만 든 놈들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몬스터 침공을 계기로 샘슨은 기사에게 두려운 맘이 생겨났다. 몬스터들의 목을 풀 베듯 하는 기사들의 솜씨를 보았던 까닭이다.

    “나는 썬더 기사단의 팽진우다. 몬스터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정찰에 나설 것이니 너는 지금 당장 목책의 문을 열고, 우리가 타고 온 말을 영주관으로 보내라. 알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샘슨은 대답과 동시에 목책의 문으로 후다닥 달려가 빗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말에서 내린 정찰대원들은 자신의 장비를 꼼꼼하게 챙겨 팽진우의 곁으로 다가가 열을 맞췄다.

    “우리는 오늘 자비롭고도 현명하신 주군의 명을 받아 정찰에 투입되었다. 이번 정찰의 목적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몬스터의 서식지를 찾아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지만 적은 수의 대형 몬스터는 직접 해치워야 하는 상황도 벌어질 것이다. 모두, 각오는 되어 있나!”

    “네, 그렇습니다!”

    “좋다! 모두 탈취제를 몸에 뿌리고 출발하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되도록 수신호에 의지할 것이며, 꼭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말을 아낀다.”

    팽진우는 상기된 얼굴로 정찰대원으로 뽑힌 기사들에게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는 동안에 기사들은 제인에게서 마법적인 처리가 된 가루를 몸에 꼼꼼하게 뿌려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팽진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기사들은 주군인 팽선웅 백작이 직접 나와 주었다는 것에 감동한 상태였다. 그것을 강조하며 자랑스러워하는 팽진우의 연설에 기사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늘 팽선웅 백작과 함께 일과 시간을 보내는 제인과 원래부터 별생각이 없는 정천우만 덤덤할 뿐이었다.

    “충! 무사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샘슨이 목책의 문을 활짝 열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찰대를 배웅해 주었다.

    맨 마지막으로 정천우가 나가며 샘슨을 향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긴장했던 샘슨은 정천우를 발견하고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푸근하게 웃어 주었다.

    ***

    목책 밖은 지난번 전투의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돈이 되기에 이틀에 걸쳐 처리하느라 지금은 그저 핏물과 살점만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몬스터가 죽어 나가는 바람에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 후면 몬스터들의 2차 침공이 있을 거라는 의견과 달리, 주변에 몬스터가 보이진 않았다.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전음을 사용해 제인을 불렀다.

    “절대로 말…….”

    제인은 익숙한 목소리에 버럭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기사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찰대장인 팽진우조차 못마땅한 얼굴로 제인을 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전음이라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정천우는 궁금증 때문에 제인을 불렀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래도 안면이 있는 그녀를 택한 것이다.

    [대답하시기 곤란할 테니 고개를 움직여서…….]

    [됐어요. 왜 부르셨죠?]

    “읍…….”

    정천우는 깜짝 놀라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때문에 팽우진을 비롯한 기사들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설마 제인이 전음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마나 조절 능력이 엉망인 이곳에서 전음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건 메시지라는 음성 전달 마법이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죠? 메시지 마법도 마나가 소모되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제인은 그렇지 않아도 정천우를 가끔 흘끔거리던 중이었다. 아까 너무나 쌀쌀맞게 대한 게 미안해서였다.

    임무 때문에 말을 걸 수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던 중이었다. 그렇다고 메시지 마법으로 말을 걸자니 그건 또 여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정작 그가 말을 걸어오니 자신도 모르게 새침해지고 말았다.

    [제가 수신호를 몰라서요. 대충이라도 알려 주시면 눈치껏 행동할게요.]

    [손을 들면 정지, 손가락 한 개를 들면 몬스터 발견, 두 개면 중급 몬스터, 세 개는 중급 이상, 네 개면 대형, 나머지는 일반적인 수신호니까 상황에 따라 행동하시면 돼요. 궁금증은 다 풀렸죠?]

    [네, 고마워요. 역시 제인 마법사님은 마음씨도 예쁘세요.]

    정천우는 아까의 민망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아부성 짙은 발언을 하고선 전음을 끊었다.

    ‘마음씨도 예뻐? 나? 나한테 한 얘기 맞는 거지?’

    제인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감추려고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의 말에서 ‘마음씨도’라는 가슴에 남았다. 마음씨도 예쁘다는 말의 뜻은 얼굴도 예쁘다는 말일 게 분명했다.

    노골적인(혼자만의 상상일 뿐이지만) 정천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제인이었다.

    ‘젠장! 더럽게 비싸게 구네.’

    반면, 정천우는 자신의 전음을 듣자마자 후드를 뒤집어쓰는 제인에게 기분이 상했다.

    아까 쓸데없이 갈굼당하고 나서도 애써 칭찬해 줬다. 어제부터 이상하게 삐거덕거리는 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후드를 썼다.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그래도 뒤태 하난 정말 기가 막힌다니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제인의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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