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Chapter 11. 육합권 (6)
“뭐?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형님, 일단 들어가십시다.”
“……그러는 편이 낫겠군.”
팽만리가 화를 내며 팽우룡을 부축했다.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팽우룡은 화낼 힘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믿기 힘들다면 관두십시오. 한번 해 본다고 해서 그 몸이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텐데, 의지가 약하시군요.”
정천우가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어차피 지금의 분위기로는 기사들에게 육합권을 가르칠 수 없다. 기사단장이 한순간에 폐인이 되었으니, 가르친다고 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가 될 게 뻔하다.
‘내 몸이 아픈 것도 아니잖아? 제 놈이 싫다는데 뭘 어쩌겠어?’
정천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팽우룡이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화입마라면 저렇게 정신이 맑을 수가 없다.
주화입마라는 건 내공이 뇌에 침투해 사람을 미친놈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단전이 없어 심법을 수련하지 못한다. 내공을 백회혈까지 보내는 일이 없으니 마나가 뇌에 침투할 경락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을 게 확실하다.
그렇다는 것은 현재 팽우룡의 상태가 주화입마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의미다.
정천우가 보기에, 팽우룡의 증상은 그저 사기(邪氣)가 쌓여 몸에 이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중원에서 낭인으로 지낼 당시 의원에게 주워들은 말이라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주화입마에 빠졌더라도 정신만 멀쩡하다면 몸에 쌓인 죽은 기운과 탁한 기운을 배출하는 것으로 치료할 수 있다.
‘제 복(福)을 차겠다는데 누가 말려?’
정천우가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이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제 팽선웅 백작을 찾아가 오늘은 가르칠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끝이었다.
“잠깐!”
팽우룡이 다시 정천우를 불렀다.
육합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난 건 사실이다. 육합권을 수련한다고 해서 주화입마가 나을 거라곤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천우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일단 해 보고 나서 정천우에게 원망을 하든 욕을 하든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응? 절 부르신 겁니까?”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뭐하러요? 아깐 싫다고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천우 경의 말대로 이렇게 포기하기엔 아쉽습니다. 부탁합니다.”
팽우룡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왠지 이대로 포기한다면 나중에 엄청난 후회를 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형님!”
“천우 경의 말대로 밑져야 본전이지 않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건 팽가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지. 날 놔주게.”
부축을 뿌리친 팽우룡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정천우의 앞에 섰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잠시 손목을 살펴보겠습니다.”
팽우룡의 손목을 잡은 정천우가 눈을 감고 맥을 살폈다. 맥이 불안정하고 기운이 제멋대로 날뛰는 게 느껴졌다.
몸속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난폭한 사기를 배출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곰곰이 육합권의 내용을 되짚은 정천우는 육합권의 초식 중에서 기운을 체외로 배출하는 몇 가지 투로(鬪路)를 되짚었다. 잠시 동안의 고민을 마치고 정천우가 입을 열었다.
“모든 투로를 따라 하기에는 몸이 좋지 않으니 간단한 몇 가지 동작만 하겠습니다. 잘 보세요.”
말을 마친 그는 제자리에서 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교차시켰다. 체내의 기운을 일깨우는 동작이다.
“여기에서는 호흡을 삼분지 이 정도 들이마십니다. 그러고는 숨을 끊은 뒤에…….”
정천우는 동작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다리를 갈지(之)자로 만들면서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머리 위로 올라간 손이 새가 날개를 펴듯 활짝 양옆으로 펼쳐지면서 자세가 더욱 낮아졌다.
단순히 그냥 앉은 자세가 아니었다. 교차한 두 다리에서 탄력이 느껴졌다.
순간, 정천우가 몸을 일으키면서 활짝 폈던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몸을 일자로 쭉 펴면서 두 손을 포개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다.
“타핫!”
정천우가 기합을 지르며 남은 숨을 모조리 내뱉었다.
“여기까지입니다. 호흡은 제가 얘기했던 대로 반드시 지켜 주시고, 지금 알려 드린 동작만 되풀이하시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팽우룡은 정천우가 했던 동작을 힘겨운 몸짓으로 따라 했다. 그러나 단 한 번 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가르치는 정천우와 배우는 팽우룡의 생각이 전혀 달라던 까닭이다.
“그렇게 대충 하실 것 같으면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두 팔을 휘두르는 동작은 몸속의 마나를 흔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참는 것은 마나를 발산하기 위함입니다.”
정천우는 다시 시범을 보여 주고는 직접 팽우룡의 몸을 만지며 자세를 잡아 주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던 팽우룡이 육합권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몸이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자신의 우상을 함부로 대하는 정천우를 향해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정작 정천우는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팽우룡을 가르치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몸을 쭉 펴고, 기합을 지르면서 적의 머리를 쳐올린다 생각하고 뻗으십시오.”
“노력해 보겠습니다.”
팽우룡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러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팔을 흐느적거리면서도 크게 좌우로 원을 그렸다. 다리를 교차시키면서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거기에서 다리에 힘을 모은다고 생각하고 한껏 웅크리는 겁니다. 지금! 적의 머리를 날려 버립니다.”
“이야압!”
“잘했습니다! 그겁니다!”
정천우가 박수까지 치면서 팽우룡을 칭찬해 주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팽우룡이 충실히 동작을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응? 이, 이게 무슨 감각이지?”
“몸속의 마나가 뿜어지는 겁니다. 조금만 더 하면 우룡 경의 몸속에 가득한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갈 겁니다. 몸속에서 날뛸 마나 자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육합권을 배우시면 됩니다.”
“아…….”
탄성과 함께 팽우룡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면서 기합을 내지르는 순간, 무언가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약간이지만 고통이 줄어들었다.
그걸 깨닫자 팽우룡은 주섬주섬 갑옷을 벗었다. 보다 못한 팽만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갑옷 벗는 걸 도와주었다.
갑옷을 벗은 팽우룡은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진 것을 느끼고 가르쳐 준 육합권을 다시 펼쳤다.
“하압!”
기합과 함께 팽우룡의 얼굴에 흐릿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망가진 우상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기사들의 얼굴이 바뀌어 갔다.
쿵!
“차압!”
팽우룡의 목소리엔 어느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핏기를 잃고 허옇게 질려 있던 얼굴에 혈색이 감돌았다. 발을 구르는 소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나고 있었다.
“아하하하…… 이건, 이건…… 천우 경! 나머지를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서,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팽우룡은 놀라운 빛을 지우지 못하고 정천우에게 매달렸다.
가르쳐 준 대로 따라 했을 뿐인데, 아까와는 달리 몸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제대로 배워서 처음부터 펼칠 수 있다면 몸이 더 빨리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자, 그럼 처음부터 할 테니 잘 보고 따라 해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호흡과 완급 조절입니다. 동작은 너무 빨라도,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됩니다. 호흡은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하고, 숨을 참아야 할 때는 주의하셔야 합니다. 우선 이게 기수식입니다.”
정천우가 차렷 자세에서 육합권의 기수식에 따라 두 주먹을 옆구리에 붙였다가 가슴 근처까지 끌어올렸다.
이어지는 육합권의 초식.
팽우룡은 정천우의 움직임을 놓칠까 봐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정천우는 전후좌우로 움직이면서 장(掌 : 손바닥)을 떨쳤다가 주먹으로 가상의 적을 올려치고 내려찍었다. 어깨로 상대를 밀치는 동작에서 힘차게 기합이 터졌다.
“아! 저거였구나!”
팽우룡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천우가 1분여의 시간이 흘러갈 때쯤에 보여 준 움직임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제껏 반복적으로 행했던 동작이 그제야 등장한 것이다.
“타합!”
마지막 어깨로 밀치는 동작에 이어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면서 육합권의 투로가 끝났다.
대략 1분 30초가량의 짧은 투로였다.
“호흡은 다 살폈습니까?”
“그게, 잘…….”
“좋습니다.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생겼을 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정천우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육합권의 시연에 들어갔다. 팽우룡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펼칠 기세였다.
‘느낌이 달라. 원래 이 무공이 이런 거였던가?’
무아지경으로 육합권을 펼치면서 정천우가 감탄을 터트렸다. 이미 보여 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육체가 움직이는 원리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더니, 지금 정천우가 딱 그랬다. 남한테 배우라고 권할 게 아니라 자신도 내일부터는 무공을 수련하기 전 육합권의 투로를 수련하는 게 좋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하실…….”
정천우가 마지막 동작을 해 보이고서 고개를 돌렸다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팽우룡이 벌써 육합권을 펼치고 있었다.
간단한 동작이기에 평생을 무공으로 단련한 팽우룡은 동작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아직 어설픈 부분이 남아 있지만 대략적인 움직임은 육합권의 투로와 어긋나지 않았다.
“이얍! 차아! 하압…….”
팽우룡이 기합을 내지르며 육합권을 반복했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팽우룡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마지막 어깨로 밀치기 동작을 끝낸 팽우룡이 호흡을 내뱉으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우웨엑!”
괴로운 얼굴로 상체를 구부린 팽우룡이 시커먼 피를 한 대접이나 쏟아 냈다.
“혀, 형님!”
팽우룡의 움직임에 흐뭇한 표정을 짓던 팽만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괜찮다. 속이 다 시원하구나.”
“주화입마에 빠지면서 쌓였던 죽은피가 배출된 모양입니다. 축하합니다. 완쾌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마나만 보충하시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정천우가 손을 내밀었다. 팽우룡은 기꺼운 얼굴로 정천우의 손을 잡고 아래위로 마구 흔들었다.
이제 기사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습게만 생각해 온 육합권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주님의 은혜가 되겠지요. 영주님께서 시킨 일이니 그분께 감사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전 육합권을 전수했으니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이거, 이렇게 보내면 제가 미안해집니다. 절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실 작정입니까?”
팽우룡은 곤란한 얼굴로 정천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모레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영주님께 육합권을 잘 배웠다고 전해 주시고, 나머지 기사분들한테 저 대신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너무 미안해서…….”
“와하하하! 형님! 뭐가 걱정입니까! 어차피 천우 경은 팽가의 기사입니다. 천우 경, 다음에 꼭 술 한잔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팽만리는 미안한 얼굴의 팽우룡을 대신해 나서며 기쁨에 겨워 크게 웃었다.
폐인이 될 뻔했던 자신의 의형을 구해 준 게 너무나 고마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를 득득 갈아 댔으면서 말이다.
참으로 단순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정천우가 빙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는 것으로 하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천우가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팽우룡은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정천우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했다. 배웅하려는 팽우룡을 겨우 떼어 놓고서야 정천우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그와 눈이 마주친 잭슨은 아까와 달리 정천우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식…… 눈치는 빠르네.’
정천우가 잭슨을 향해 한차례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영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정천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영주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