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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42화 (42/200)
  • # 42

    Chapter 11. 육합권 (5)

    “젠장! 고집불통 같으니!”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가뜩이나 연이은 검격 때문에 손아귀가 아파 죽겠는데, 상대가 대련을 끝내려 하지 않으니 싸워 줘야 한다.

    아니, 오히려 된통 두들길 생각이었다. 내공이 바닥나기 전에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다.

    정천우의 역천검에서도 누런 뇌전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오호단문도를 능숙하게 수련했더라면 전륜도법 따윌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능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무공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상위 단계의 무공을 어설프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차아!”

    팽우룡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세이버를 사선으로 그었다. 정천우가 그에 맞서 전륜도법으로 받아 냈다.

    마나 쉐도우를 발산하는 두 사람의 무기는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었다.

    파캉!

    “큭!”

    “으윽!”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튀어나왔다.

    팽우룡은 자신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뇌전의 기운에 충격을 받았고, 정천우는 작정하고 공격하는 팽우룡의 패도적인 기운에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면 더욱 위험한 순간에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괴롭지만 밀려나지 않고 맞부딪쳐야 오히려 더 안전하다. 상대의 힘에 밀리는 순간, 자신의 기운에 상대의 기운까지 한꺼번에 밀려들 게 뻔하다.

    “으윽! 끄아아!”

    정천우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고함을 지르며 역천검을 힘껏 밀어붙였다.

    꿍!

    진각을 밟으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진 힘이 허리를 타고 비틀리면서 크기를 더해 갔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마침내 어깨를 타고 역천검에 전해진 순간!

    쩡!

    “커억!”

    팽우룡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분명히 자신의 세이버와 역천검이 맞닿아 있었다. 그런데 쇠와 쇠가 부딪치는 충돌음이 일어나면서 충격이 전해져 왔다. 하마터면 세이버의 칼등에 얼굴을 맞을 뻔했다.

    팽우룡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면서 충격을 해소해 나갔다. 평소처럼 가만히 충격을 흘려 내기에는 밀려든 힘이 너무나 강했다.

    “치잇!”

    팽우룡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하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초식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았다.

    기술 면에서는 자신이 열세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를 밀어붙일 방법은 오로지 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정천우의 호리호리한 몸에 자신만 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우와아아아!”

    그는 세이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성난 들소처럼 정천우를 향해 뛰어들었다. 입가에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벼운 대련이라더니?”

    정천우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입안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팽우룡과 연이어 부딪치면서 포션으로 억눌렀던 내상이 도지고 말았다. 포션으로 치료했다고는 해도 완전한 게 아닌 줄 알았다면 피했을 텐데, 제인으로부터 그런 소린 듣지 못했다.

    아니…… 어차피 늦었다.

    “크아!”

    팽우룡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장작을 쪼개듯 직선으로 내리찍어 왔다.

    ‘젠장! 눈깔이 맛이 갔네, 맛이 갔어!’

    정천우가 식겁한 얼굴로 세이버를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팽우룡은 눈이 충혈되고,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힌 상태였다.

    저런 증상은 한 가지뿐!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우웅!

    “이크!”

    정천우는 수평으로 휘둘러 오는 팽우룡의 공격을 피해 뒤로 몸을 날리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워! 워어! 워억!”

    팽우룡의 난폭한 공격에 대련을 지켜보는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보냈다.

    “야, 이! 미친놈들아! 이 인간이 정상으로 보여?”

    정천우는 또다시 날아드는 세이버를 역천검으로 튕겨 내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훠우! 훠! 훠우우!”

    정천우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기사들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세이버를 휘두르는 팽우룡에게 열광했다.

    팽우룡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다. 정천우에 대한 끊임없는 적개심과 살기를 뿜어내며 마구잡이로 세이버를 휘두를 뿐이었다.

    “돌겠네! 죽일 수도 없고, 놔두면 내가 죽을 판이니.”

    연달아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세이버를 피하며 정천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간단히 처리할 방법은 있다.

    괴력을 발휘하느라 한가득 드러난 허점에 역천검을 살포시 집어넣었다가 뽑아 주면 끝이다.

    문제는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팽가 최고의 실력자인 팽우룡이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더 돌아 버리겠는 건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두 사람 다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진원진기(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기운)까지 몽땅 뽑아 쓰고 팽우룡이 죽든, 내공 부족으로 헤매다 정천우가 칼 맞아 죽든, 둘 중 하나의 결과밖에 없다.

    하지만 둘 다 정천우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젠장! 계속 미친 척한다 이거지?”

    정천우가 보법을 밟아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가 이를 빠드득 갈아붙였다.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으로 맞부딪쳤다가는 정천우가 불리하다.

    내공의 총량은 팽우룡이 월등히 많다. 게다가 진원진기까지 끌어다 쓰고 있으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크와악!”

    정천우가 멀어지기 무섭게 팽우룡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살기를 풍겨 대고,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를 맺고 있었다.

    바닥에 침을 한차례 뱉은 정천우가 마주 몸을 날렸다. 눈을 부릅뜬 채 팽우룡을 노려보며 달리다가 격돌의 순간에 푹 주저앉았다.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오른발을 쭉 뻗었다.

    정천우의 오른발이 크게 원을 그리면서 팽우룡의 다리를 노렸다. 내공을 담은 그의 오른발이 낫으로 풀을 베듯 팽우룡의 다리를 후려쳤다.

    쿠당탕!

    “우와아악!”

    세이버를 휘두르던 팽우룡은 바닥을 구르며 괴성을 질렀다. 자신이 어떻게 넘어졌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정천우는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팔꿈치를 세워 앞으로 쓰러졌다. 팔꿈치가 막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는 팽우룡의 목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그룩…….”

    팽우룡이 눈에 흰자위를 드러내며 세이버를 놓쳤다.

    세이버를 걷어찬 정천우가 팽우룡의 마혈(痲穴)을 짚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광분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우…….”

    팽우룡이 정신을 잃자 둘의 대련을 관전하던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성을 흘렸다.

    “누가 의원 좀 데려오세요. 팽우룡 경이 주화입마에 빠졌습니다!”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몇몇 기사가 한쪽으로 후다닥 뛰어 나갔다.

    “단장님!”

    거구의 사내가 기사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쓰러진 팽우룡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부단장인 팽만리였다.

    “괜찮은 겁니까? 아아! 주화입마라니…… 신이시여! 정녕 우리 팽가를 버리려 하십니까!”

    팽만리는 쓰러진 팽우룡을 끌어안고 탄식을 터트렸다.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혼원벽력도법에 적힌 주의 사항에 따르면 마나 조절에 실패할 경우 주화입마에 빠져들 수 있다고 했다.

    “그르륵…….”

    “단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단장님!”

    팽만리는 팽우룡이 깨어나는 기미가 보이자 걱정이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팽우룡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눈은 충혈되다 못해 핏물이 묻어날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괴기스러운 소리를 흘려 댔다.

    팽만리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으나 신관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려놓으십시오. 안정을 찾게 해 주어야 합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흔들며 팽만리를 향해 말했다.

    주화입마라는 건 내공이 폭주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대부분 뇌에 내공이 역류하면서 벌어진다. 때문에 이성 대신에 본능이 뇌를 잠식하면서 미쳐 날뛰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팽우룡의 상태가 중원 무인들이 보여 주었던 주화입마보다는 현격하게 증상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 정도이길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주화입마에 들어서면…… 크흑…….”

    팽만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함께 밑바닥부터 시작해 단장과 부단장의 직위에 올랐다. 언제나 형처럼 자신을 챙겨 주던 팽우룡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사실은 팽만리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마나 폭주를 이기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진 기사는 폐인이나 광인이 된다. 이제 팽우룡의 인생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팽만리가 서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관전하던 기사들은 다가오려다가 팽만리의 통곡에 다시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시, 신관님을 모셔 왔습니다.”

    기사 하나가 병약해 보이는 중년 사내의 손을 잡고 다가와 팽만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 스티에르 신관님, 형님을…… 단장님을 살펴봐 주십시오. 어서, 어서!”

    “지,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팽만리 형제.”

    스티에르는 자신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드는 팽만리를 겨우 떼어 내고는 쓰러진 팽우룡의 곁에 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정천우는 스티에르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의원을 데려온 것 같은데 치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

    정천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스티에르의 전신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오더니 그의 손바닥을 통해 팽우룡의 몸에 스며들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시뻘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숨을 몰아쉬던 팽우룡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하얀빛이 거의 사라져 갈 즈음에는 완전히 제정신을 차렸다.

    “형님! 정신이, 정신이 드십니까!”

    “누, 누가……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부르라고 했느냐…… 으윽! 몸이, 몸이 움직이질 않는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팽우룡은 자신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룡 경,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옆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던 정천우가 팽우룡의 몸에 내공을 담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댔다. 그러자 마혈을 막았던 내공이 흩어지면서 그의 몸에 마비가 풀렸다.

    “크윽!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일어나자마자 가슴을 움켜쥔 팽우룡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몸속이 엉망이었다.

    마나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무렇게나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폭발을 일으킨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단련된 육체라고 해도 망가질 게 뻔하다.

    “형님, 그, 그게…….”

    “그렇군, 그랬어. 하아…… 나의 한계였던가?”

    눈물을 글썽이는 팽만리를 보고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팽우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은 일반인보다 못한 몸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몸속의 마나가 날뛰고 있으니 앞으로도 힘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미쳐 버린 사람도 있었으니, 이만하면 하늘이 도운 거겠지.”

    팽우룡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기사들은 숙연한 얼굴로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하북팽가 최고의 기사가 일순간에 폐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힘겹게 몸을 일으킨 팽우룡에게 정천우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팽우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화입마에 접어들어서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다. 수많은 치료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언제나 결과는 한결같았다.

    회복 불가!

    정상인으로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건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가뜩이나 마음이 착잡해 죽겠는데 옆에서 헛소리를 해 대니 팽우룡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턱이 없었다.

    “지금 그대와 장난할 기분이 아니오. 만리 경, 이제부터 자네가 썬더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 주어야겠네.”

    “크흐흑…… 형님!”

    “저…… 진짜로 방법이 있습니다만…….”

    정천우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팽우룡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천우 경!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모르십니까! 형님이, 형님이…….”

    “누가 뭐랍니까? 어차피 망가지는 거 그냥 해 보자는 건데요. 됐습니다. 그냥 관둡시다! 내가 병신 되는 것도 아닌데 아쉬울 게 뭐 있다고.”

    정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중얼거렸다. 아쉬운 건 팽우룡이지 자신이 아니다. 그래도 생각해서 말해 줬는데,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니 도와주려던 마음도 쏙 들어갔다.

    “아니, 이 작자가!”

    팽만리는 정천우의 막말에 발끈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질 않은가.’

    “만리 경, 잠깐!”

    팽우룡의 마음이 움직였다.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천우가 미덥진 않았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번 말은 들어 보고 싶어졌다.

    “천우 경, 그 방법이 뭔지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육합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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