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9화 (39/200)
  • # 39

    Chapter 11. 육합권 (2)

    ‘이 미친 새끼가 누굴 죽이려고…….’

    정천우는 속으로 욕을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내공 수련 중에 외부에서 충격을 받으면 위험해진다.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타인이 보는 곳에서 내공을 수련하는 것은 금기로 통하는데, 단전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내 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다.

    “마나 수련법이라는 건 보여 드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어째서인가?”

    “내공이라는 것은 검술을 사용하거나 하는 일련의 동작을 취할 때 발휘되는 겁니다. 제가 중원의 마나 수련법을 익혔으나 수준은 이곳의 기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마나 수련법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수련하기에는 위험합니다.”

    “직접 볼 수 없다니 아쉬운 노릇이군. 그건 그렇고, 육합권을 수련하면 정말 마나를 쌓을 수 있는가?”

    “눈에 드러날 정도의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근육만을 사용해 마나를 느낄 때까지 무턱대고 검만 휘두를 필요는 없어질 겁니다.”

    정천우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원에서도 오직 육합권만 파고들어 절정의 경지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 유운갑이라는 사람으로, 당시 동공을 우습게 생각하던 강호인의 머리에 경종을 울렸던 대단한 고수였다.

    중원의 일반인들이 내공을 쌓지 못하는 것은 유운갑처럼 무공으로 인식하고 수련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릴 적에 수련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네. 믿기 힘든 얘기가 아닐 수 없군그래.”

    “영주님의 육합권을 직접 제 눈으로 보아야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못할 것도 없지.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책을 본다면 가능할 것 같네. 잠시 시간을 주겠나?”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손에서 육합권의 비급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책장을 넘기면서 육합권을 살폈다.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가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팽선웅 백작이 육합권의 비급을 내려놓았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대강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보여 주도록 하지.”

    팽선웅 백작이 차렷 자세로 섰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틀면서 옆구리에 붙인 두 팔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것은 육합권의 시작을 알리는 동작이었다.

    오른팔을 뻗으면서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러고는 상체를 틀면서 가슴 옆에 붙여 두었던 왼손과 겹쳤다. 그와 동시에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반원을 그리고 올렸다.

    팽선웅 백작의 몸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두 팔을 쭉 뻗었다가 회수하면서 물러서고, 또다시 전진하며 번갈아 손바닥을 쭉쭉 뻗었다. 진각을 밟을 때는 바닥이 은은하게 울렸고,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를 때는 바람이 일어났다.

    중간에 끊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 수련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동작마다 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차앗!”

    팽선웅 백작의 입에서 기합이 터졌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 상태로 가상의 적을 향해 목을 두 손으로 찔렀다.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하면서 두 팔을 쫙 뻗어서 위로 펼치고는 빠르게 내리며 허리 높이쯤에서 멈췄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팽선웅은 차렷 자세로 돌아왔다.

    짝, 짝, 짝!

    정천우가 박수를 쳤다.

    중원의 무공이 색목인의 몸으로 펼쳐지는 게 무척이나 색달랐다. 자세만큼은 중원의 어설픈 무인보다 나았다.

    “이렇게 땀이 날 정도로 펼쳤지만 마나가 모여드는 느낌은 전혀 없다네. 혹시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건…….”

    팽선웅은 자신의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육합권과 마나 수련과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닙니다. 영주님의 육합권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호흡과 완급 조절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숨을 멈춰야 할 때 내쉬고, 힘을 모아야 하는 동작에서 힘을 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동작에서는 호흡을 참았다가 주먹을 뻗으면서 힘을 쏟아 내야 합니다.”

    정천우가 힘을 모았다가 두 팔을 교차시키면서 왼팔을 잡아당기고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힘을 쏟아 내? 힘을 쏟아…… 잠깐! 그런 거였나?”

    팽선웅 백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려다가 머리에 철퇴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육합권의 비급 정도는 좔좔 외웠던 몸이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수련해 본 적이 없어서 기억을 더듬었던 것뿐이다.

    정천우가 ‘쏟아 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 순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팽선웅 백작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제껏 해 온 수련은 모두 멍청한 짓이 되고 만다.

    “거둔다는 말은 무언가!”

    “예? 보통 권법이나 장법에선 기운을 빼거나 흘려보내라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그럼 공력을 발출하라는 건?”

    “내공, 즉 마나를 뿜어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힘을 거스르지 말고 받아들였다가 토해 내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음…… 그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느끼시는 게 빠릅니다. 절 주먹으로 공격해 보십시오.”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그럼…….”

    팽선웅은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천우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의 주먹을 향해 손바닥을 마주 뻗었다. 손바닥과 마주친 순간, 정천우가 점차 힘을 주면서 팽선웅 백작의 주먹을 받아 냈다.

    천천히 힘을 증가시켜 팽선웅 백작의 주먹을 멈춰 세웠기에 그 흔한 타격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우왁!”

    팽선웅 백작은 솜뭉치를 때린 것 같은 요상한 감촉에 의아해하다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주먹으로 갑자기 엄청난 힘이 가해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주먹에 전해진 힘에 의해 떠밀려진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힘을 받아들였다가 토해 낸다는 원리를 담은 것입니다.”

    “이런 뜻이었어! 이런 뜻이었어! 그렇다면…….”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에게 다가서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묻는 것들은 무공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었다. 호흡을 표현한 것에서부터 힘의 전달에 관련된 용어들이었다. 정천우는 대단할 것도 없는 내용의 질문이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육합권의 비급은 벽력대제 팽진옥이 건드리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이 중원의 언어를 알기는 하지만 그 속에 품은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다.

    육합권이 삼류 축에도 끼기 어렵다고 해도 무공은 무공이다. 거기에 들어 있는 은유적인 표현을 다른 세상의 사람이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무공의 체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으니…….

    정천우에게서 궁금한 것들을 묻던 팽선웅 백작이 크게 기뻐하며 육합권의 비급을 들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갔다.

    “그랬어! 그랬던 거야! 그렇지!”

    팽선웅 백작의 입에서 기쁨에 겨운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이제껏 막연하게 뜬구름 잡기 식으로 읽었던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다만 정천우와는 달리, 함께 있던 제인은 팽선웅 백작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천우 경, 영주님께서 왜 저러시는 거죠?”

    “궁금증이 풀리셔서 그럴 겁니다.”

    “좋은 건가요?”

    “육체의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거죠.”

    “그렇군요.”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팽선웅 백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팽선웅 백작은 그저 미친놈처럼 보일 뿐이었다.

    곁에 있던 정천우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제인을 불렀다.

    “아! 제인 마법사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예,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요.”

    “혹시 ‘키아벨리아스’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키아……벨리아스요?”

    “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벽력대제께서 남기신 비급에 적혀 있더군요. 그를 만나면 중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말이죠. 오래전 사람이겠지만 혹시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지 몰라서요.”

    정천우는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제야 제인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익숙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키아벨리아스는 살아 있어요.”

    “네, 살아 있군요. 당연하겠…… 네? 키아벨리아스가 살아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요.”

    “어떻게 그럴 수가…….”

    정천우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눈을 껌뻑이며 놀라워했다.

    세상에 300년을 넘게 사는 사람이 있다니,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제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가슴이 설렜다.

    “팽가의 검술서 뒷장에 적힌 내용 때문에 오래전에 조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알게 됐죠. 키아벨리아스는 골드 드래곤 일족이에요. 포악하고 잔인해서 모두가 그를 두려워해요.”

    “세상에, 세상에…….”

    정천우에게는 제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래곤이 뭔지는 몰라도 아직 키아벨리아스라는 존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었던 가슴이 다시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팽진옥이 남긴 글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설렘이 일어났다.

    진미령을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천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키아벨리아스가 포악하다는 경고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갈 실마리를 잡았다는 거다.

    정천우는 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열망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디, 어디에 가면 키아벨리아스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게…… 이 손은 놓고…….”

    정천우의 뜨거운 손이 자신의 손을 잡자 제인은 얼굴을 붉혔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싫지 않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떠도는 바람에 정천우가 한 질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키아벨리아스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꼭 알아야만 합니다.”

    정천우는 손을 놓아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무시했다.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서대륙에 살고 있다는 얘기만 전해지고 있어요.”

    제인은 손을 빼려다가 포기하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서대륙이라…….”

    정천우는 신음하듯 말끝을 흐렸다.

    ‘이건 또 웬 개 같은 상황이야?’

    서대륙이라는 말에 좋던 기분이 확 잡쳤다.

    제럴드에게 들은 짧은 지식으로는 서대륙은 무서운 곳이라고 했다.

    동대륙과는 달리 마법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기상천외한 마법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기사들의 실력도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들었다.

    “천우 경.”

    “네?”

    “서대륙에 갈 생각이라면 포기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죠?”

    “서대륙은 이곳과 달라요. 그곳의 몬스터들은 여기보다 강하고 난폭해요. 그런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 호전적이고 잔인하죠. 게다가 키아벨리아스는…….”

    제인은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모습에 정천우는 조바심을 냈다.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없다.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진미령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인이다. 아직도 그녀의 가련한 자태가 뇌리에 남아 벼락을 맞기 전으로 돌아간 꿈을 꾸곤 한다.

    보고 싶다!

    다시 만나서 꼭……

    “……안아 주고 싶어요.”

    “갑자기 그런…….”

    정천우가 몽롱한 눈으로 속삭이자 제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제멋대로인 데다가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숙녀에게 귀찮다는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괴상한 사람.

    지금도 그렇다.

    키아벨리아스라는 서대륙의 포악한 괴물을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하려는데 갑자기 안아 주고 싶단다. 그것도 영주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하, 하지만 여기선 좀 고, 곤란해요.”

    ‘응? 이 여자가 왜 이래?’

    정천우는 진미령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제인의 목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얼굴을 붉힌 채 곤란하다고 말하는 제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안아 주고 싶다’라는 말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제인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미안합니다.”

    정천우가 제인의 손을 놓아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그녀가 곤란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이라든가 ‘여기선’이라는 말이 왜 들어가야 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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