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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38화 (38/200)
  • # 38

    Chapter 11. 육합권 (1)

    정천우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가볍게 목을 비틀며 상체를 숙이는 것으로 잭슨의 주먹을 피해 냈다.

    “피해?”

    “이러지 맙시다. 반항하지 않고 잡혔는데 왜 이러는 겁니까!”

    정천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바닥을 펼쳤다. 반항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리 다져 놓아야 고문을 빨리 끝내지.”

    “고문? 난 첩자 같은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넌 충분히 첩자스러워. 그것도 무지하게 띨빡한 첩자! 어떻게 말하는 게 모두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지?”

    잭슨은 본격적으로 패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꺾으면서 몸을 풀어 댔다.

    자신의 주먹이 빗나갔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정천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사실이 그런 걸 대체 어쩌라는 거지? 원래 팽가의 기사들은 모두가 이렇게 막무가내인 거냐?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을 건가!”

    정천우는 곱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충분히 협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잭슨은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먹부터 날렸다. 그것도 쇠로 만든 장갑을 낀 무지막지한 것으로 말이다. 느슨하게 생각했다간 이가 몽땅 날아갈 판이다.

    “웃기는군.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믿지 않을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나? 그냥 닥치고 좀 맞자! 보통은 처맞다 보면 순순히 불게 되어 있지.”

    잭슨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정천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출입문을 막아선 두 기사를 비롯해 식당 안의 나머지 기사들이 정천우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두들겨 맞고 엉망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누가 당할까 보냐! 이익!”

    정천우가 이를 갈아붙였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노로 인하여 얼굴에 피가 몰린 탓이다. 포승줄로 묶인 두 손목에 내공을 불어넣어 힘껏 비틀었다.

    두두둑!

    정천우의 팔목을 묶은 포승줄이 단번에 끊어졌다.

    그 광경에 잭슨의 눈이 커졌다.

    기사라 할지라도 마나를 제어하는 포승줄로 팔목을 묶으면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근육을 가진 정천우가 포승줄을 끊어 내니 놀랍기만 했다.

    당황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잭슨이 앞으로 다가서며 주먹을 뻗었다.

    “죽어!”

    아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뻗은 주먹이 아니다. 마나를 담은 공격이었다. 아예 죽일 작정으로 날리는 주먹이다.

    “악독한 자식!”

    정천우가 분노해 소리치며 손바닥을 펼쳤다.

    살벌한 기세를 담고 날아오는 잭슨의 주먹에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손등이 닿는가 싶은 순간에 손목을 회전시켰다. 절묘한 손동작에 잭슨의 손목이 붙들렸다.

    정천우가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오른손을 수도(手刀)로 만들어 목울대를 찍었다.

    “커헉!”

    잭슨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캑캑댔다.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수도가 아닌 첨권(尖拳 : 곰 손 모양으로 주먹을 쥐는 것)으로 치거나 팔꿈치로 턱을 날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잭슨이 바닥에 쓰러져 기침이나 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뭐야!”

    “잭슨!”

    출입문을 막아섰던 2명의 기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천우는 바닥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잭슨의 몸을 밟고 뛰어올랐다. 힘차게 도약한 힘을 이용해 원앙각(鴛鴦脚)의 수법으로 출입문을 지키던 기사의 턱에 사이좋게 한 방씩 먹였다.

    기사들이 투구를 쓰고 있었다면 어림없는 공격이었겠지만 식사 중이라 투구를 벗었기에 위력은 충분했다.

    “잡아!”

    “도망친다!”

    흥미로운 얼굴로 구경하던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그제야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천우는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출입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말로 해결될 범위를 넘어섰다. 일단 영주 집무실로 올라가는 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지금의 꼬인 상황을 푸는 방법은 팽선웅 백작을 직접 만나 신분을 증명받는 것뿐이다.

    출입문과 대략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정천우가 다리에 내공을 밀어 넣으면서 몸을 날렸다. 경공을 발휘해 단숨에 계단을 밟아 올라갈 생각이었다.

    “지랄!”

    계단을 통해 다른 기사가 소란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식당에서 ‘첩자’라는 말과 함께 고함이 들려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정천우가 몸을 붕 날리면서 벽면을 밟고 뛰었다. 막 계단을 내려온 기사의 어깨를 밟으며 힘껏 밀었다.

    ‘빌어먹을, 꼬였군!’

    정천우가 기사의 어깨를 밟는 그 짧은 순간에 계단으로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기사들이 계단을 채우며 내려오고 있었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탈출을 포기한 정천우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무리하게 탈출하려다가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대로 달려 나가며 복도의 끝으로 움직였다.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책장을 밀어 철문에 기대어 놓았다.

    쿵, 쿵, 쿵!

    정천우가 책장을 밀어서 기대 놓기가 무섭게 밖의 기사들이 요란하게 철문을 두들겼다.

    중원에서는 들어 본 적도 없는 휘황찬란한 욕설이 철문을 타고 들려왔다. 서재의 문이 두꺼운 철로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후우…… 밥 한번 먹기 더럽게 힘드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대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철문을 두드리던 기사들은 포기한 건지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나 욕설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중원 무인들의 경지로 치면 일류 고수는 돼야 철문을 검으로 쪼갤 수 있다. 이곳의 기사들이나 정천우나, 강하다고 해 봐야 이류 끝자락 정도니 철문이 부서질 일은 없다.

    “응? 뭐야? 갑자기 왜 조용해?”

    정천우는 온갖 욕설이 난무하던 바깥이 조용해지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컥!

    그가 의아해하는데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우 경! 천우 경!”

    “예, 영주님! 금방 치우겠습니다.”

    정천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팽선웅 백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막은 책장을 낑낑거리면서 치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게……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정천우가 식당에서 벌어진 일을 씩씩거리면서 설명해 줬다.

    얘기를 듣던 팽선웅 백작은 황당한 상황에 화를 내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내자니 정천우의 입장에선 당연한 대응이었다. 순순히 체포에 응했음에도 기사가 공격했다니 가만히 당해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팽선웅 백작의 실수였다. 영주관에 사람을 들이면서 부하들에게 알리지 않은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기사들이 과하게 행동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처벌하기에도 꺼림칙하다. 만약 정천우가 진짜 첩자였다면 기사들이 공을 세운 것이지 잘못한 건 아니다.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나의 실수이니 기사들과 천우 경은 오해를 풀길 바란다. 알겠는가!”

    “명을 받듭니다.”

    “죄송합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천우 역시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고 사과를 받아 주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소란을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기분이 더럽지만 팽선웅 백작이 부하들을 용서한 이상 사나이답게 넘어가 주는 게 맞다.

    다만 아직도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힐끔 돌아보는 잭슨이라는 놈에게 앙금이 남았다.

    “모두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가라!”

    팽선웅 백작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명령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욕설을 퍼부으며 정천우를 궁지로 몰았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쫙 빠져나갔다.

    “천우 경, 나의 실수를 이해해 주길 바라네.”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그 동공이라는 걸 찾았는가?”

    “다행히 성과가 있었습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잘 되었군, 정말 잘 됐어! 자, 자! 같이 올라가세. 식사하려다 봉변을 당했으니 나와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련서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천우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빼 두었던 육합권의 비급을 챙겼다.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의 손에 쥔 비급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것인가?”

    “그렇습니다. 몸을 움직이면서 마나를 쌓는 비결이 수록된 수련서입니다.”

    “정녕 그런 방법이 존재하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군그래. 가세! 자세한 얘기는 올라가서 하지.”

    “예, 영주님.”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서재를 빠져나갔다. 동공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빨리 영주 집무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정천우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팽선웅 백작의 뒤를 따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팽선웅 백작을 기대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

    “가셨던 일은…… 아! 천우 경! 어서 오세요.”

    집무실 안에는 제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정천우를 반겼다.

    아마도 팽선웅 백작과 함께 식사하는 도중이었던 모양이다. 다리에 바퀴가 달린 테이블이 집무실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럽게 구운 닭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기사들과 천우 경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일세.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자리에 앉게. 레이나!”

    팽선웅 백작이 의자 하나를 정천우에게 건네주며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소파 옆의 작은 문에서 사람이 나왔다. 오전에 차와 쿠키를 가져다주었던 중년 여인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영주님.”

    “사람이 늘었으니 같이 준비해 주면 좋겠어.”

    “금방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나라는 이름의 시녀는 정갈한 몸가짐으로 인사하고는 다시 작은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레이나가 바퀴 달린 작은 테이블을 밀고 나왔다. 그 위에는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수프 한 접시, 빵 한 개가 있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정천우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은 레이나가 살며시 웃어 주며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자, 들게! 음식이 조금 식었지만 레이나가 만든 음식은 식어도 훌륭하지.”

    팽선웅 백작이 시녀를 칭찬하면서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나이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랐던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과 제인이 먹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눈치껏 따라 할 셈이었다.

    ‘뭐가 이렇게 불편해?’

    그는 투덜거리면서 나이프와 포크를 각각 손에 쥐었다.

    제럴드와 식사할 때는 숟가락 하나면 끝이었다. 술집에서 안주를 먹을 때도 숟가락이 포크로 바뀌었을 뿐, 나이프를 사용하진 않았다.

    속으로 구시렁대던 그는 테이블 중앙의 닭요리 한 조각을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자신의 접시로 가져왔다.

    닭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온 줄 알았는데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었다. 포크로 대충 아무렇게나 찍어서 한입 먹었다.

    ‘의외로 맛있네?’

    정천우의 눈이 커졌다.

    겉보기에는 그냥 구운 것에 불과했는데 괴상한 맛이 났다. 중원의 어느 객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맛이다. 나머지 음식들도 생소하기는 했지만 훌륭하다고 할 만한 맛이었다.

    정천우의 두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천우 경, 동공이라는 것이 바로 육합권을 말하는 것이었던가?”

    식사를 마치고 레이나가 차를 내오자 팽선웅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육합권에 마나를 쌓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이상하군. 나 역시 어릴 적에 심심풀이 삼아 육합권을 익혔네만 아무렇지도 않았다네. 예전에는 기사들이 검술을 연마하기 전에 반드시 육합권을 수련했다고 하는데 난 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 오죽하면 지금은 육합권을 수련하는 기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네.”

    “분명 육합권에는 마나를 쌓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중원에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대 역시 육합권을 수련했는가?”

    “아닙니다.”

    “그렇게 좋은 거라면 당연히 수련하는 게 맞지 싶은데?”

    “저는 다른 검술과 마나 수련법이 있어서 굳이 필요치가 않았습니다.”

    “마나 수련법? 그건 또 뭔가?”

    “팽가의 수련서로 따지자면 혼원벽력신공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원에서는 내가수련법 혹은 내공 수련이라고 합니다.”

    “으음…… 우리는 혼원벽력신공을 수련할 수 없었지. 혹시 마나 수련법이란 걸 보여 줄 수 있겠나?”

    팽선웅 백작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나 수련법이라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망을 참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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