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7화 (37/200)
  • # 37

    Chapter 10. 흥미로운 사실 (3)

    <나 벽력대제 팽진옥이 허무하고 외로운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이 글을 남긴다.

    내 무공은 혼원벽력신공을 기반으로 완성했다.

    어째서 내가 중원을 떠나 이렇게 먼 곳까지 흘러들어 오게 되었는지 오래도록 고민해 왔다.

    미리 밝혀 두자면 원인은 역천검이다.

    내가 중원을 떠나오던 날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역천검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던 때였다.

    당시의 나는 친우가 역천검 때문에 사라졌는데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반쯤 미쳐 있었다. 그날따라 비까지 내려 우울한 기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벼락이 집 천장을 뚫고 내게 떨어졌다.

    벼락에 맞는 순간 단전의 내공이 역천검에 빨려 나가는 걸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육합전성이 들려왔으나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깨어나고 보니 컴컴한 지하 동굴이었고, 거기에서 수십 구의 백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동굴에서 반쯤 썩어 가는 친우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그런 현상이 차원 이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역천검에 새겨진 룬어가 벽력의 힘을 흡수해 차원 이동 마법을 발동시킨다는 것을 오랜 수소문 끝에 알아냈다.

    반대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벼락을 맞아 보았지만 그저 몸만 망가졌다. 극에 이른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이곳에 하북팽가를 세울 결심을 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하북팽가를 세우고 제국을 완성했을 때, 나는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역천검 때문에 이곳에 왔으니, 역천검을 만든 자를 찾으면 돌아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들었던 육합전성의 얘기를 까맣게 있고 있었던 걸 나는 뒤늦게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20세를 바라보는 나이, 고향에 돌아간다 한들 이렇게나 늙어 버린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으니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죽기 전에 역천검을 만든 키아벨리아스라는 놈을 만나 따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에는 그마저도 그저 허무할 뿐이다.

    나처럼 이곳에 넘어올지 모르는 중원인을 위해 나는 하북팽가의 모든 비급에 이 글을 남긴다.>

    “내가…… 돌아갈 수 있어? 중원에?”

    정천우는 혼원벽력신공의 마지막 장을 손에 쥔 채로 멍해졌다.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혼원벽력도가 수록된 비급과 건곤연환탈백도가 수록된 비급을 급하게 꺼내 뒷장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혼원벽력심법에만 끝부분에 글이 적혀 있었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짠하게 아려 왔다.

    중원에 돌아갈 수 있다! 그녀를 볼 수 있다!

    자신의 팔을 꼭 끌어안고 한 마리 새처럼 두려움에 떨던 진미령이라는 이름의 여인.

    비록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새 자신의 마음을 훔쳐 가 버린 여인.

    “다시, 다시 볼 수 있어…… 다시 볼 수 있어!”

    정천우는 손에 쥔 비급을 쳐다보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벽력대제 팽진옥이 남긴 글을 처음부터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한 자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머리에 각인시켰다.

    “그런데 키아벨리아스가 누구지? 아! 맞아 역천검이 주절거리던 이름이지?”

    정천우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 동굴 속에서 들은 이름이라는 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벽력대제가 죽은 지 벌써 3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키아벨리아스가 누구건 당시의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달아올랐던 정천우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하아…… 일단 살아남을 생각부터 해야겠지…….”

    정천우는 이내 마음을 접고 책장을 살폈다.

    혼원벽력신공은 이미 몸으로 배우고 머리에 새겨 넣었다. 워낙 쉽게 풀이해 두었기에 전륜공으로 다져진 그가 익히기에 무리가 없었다.

    팽가의 도법들도 마찬가지다.

    혼원벽력도와 건곤연환탈백도 역시 쉽게 풀이되어 있었다. 다만 정천우의 내공이 혼원벽력신공으로 이루어져 건곤연환탈백도는 배울 필요가 없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다. 팽가의 무공은 벽력대제가 쉽게 풀이해 놓았지만 다른 무공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마저도 구대문파의 무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무공을 탈취해 달아난 놈들이 흩어져 영지를 꾸리고 있다니, 팽가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무공을 일부러 책장에 끼워 놓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동공은 이거 하나뿐인가? 효율이 무척이나 떨어지는데…….”

    정천우는 한쪽 구석에서 육합권(六合拳)을 찾을 수 있었다.

    삼류 권법 중의 하나로, 중원에서는 지나가는 어린애도 한 자락씩은 펼쳐 보일 줄 안다는 무공이다. 정천우는 비록 삼류라고는 해도 내공을 익혔기에 굳이 필요가 없어 배우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육합권은 엄연히 동공 중의 하나다. 오래 수련하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이 쌓이고 몸이 튼튼해진다.

    다만 이곳 사람들은 단전이 없어서 효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좀 더 살펴봐야겠어.”

    너무나 일찍 임무(?)를 끝내는 바람에 시간이 남았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머물러 있자는 생각으로 혼원벽력도법을 정독했다. 앞으로 자신이 익혀야 할 무공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앞서 오호단문도를 능숙하게 펼칠 수 있을 만큼은 익혀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퉁, 퉁, 퉁!

    “응? 들어오세요.”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정천우가 출입문 쪽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이내 철문이 열리면서 열두어 살 먹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였는데, 무척이나 귀엽게 생겼다.

    ‘훗! 나도 여기 사람이 되어 가나 보군.’

    정천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중원에서도 색목인이 유난히 많은 항주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항상 색목인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중원의 사람과 달리 눈동자가 파랗고 머리색이 제각각이라 꺼림칙한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이곳에 넘어온 지 며칠 안 되었음에도 색목인 소녀를 귀엽다고 느낀다.

    적응이란 걸 하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꼬마 아가씨, 무슨 일이지?”

    “식사 시간이라 기사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함께 가기 번거로우시면 이곳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시녀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고 어른스러운 말투를 썼다.

    “아니, 가서 먹을게.”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어 주고는 앞장서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어린 시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몸을 돌려 앞장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음식 냄새가 그를 맞이했다. 지하에 식당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아무 테이블이나 앉으시면 됩니다.”

    “고맙다.”

    식당 안에 들어선 정천우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천우는 빨리 식사를 마치고 서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걸어가 한쪽 구석의 식탁에 앉았다.

    그가 조용히 움직였지만 기사들의 시선은 예리하기만 했다.

    어딜 가나 끼어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수프를 떠서 입에 넣던 젊은 기사 하나가 스푼을 내려놓고는 정천우가 앉은 곳으로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저는 타이거 기사단의 잭슨 엔트로라는 사람입니다. 누군지 신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 영주님께서 부르셔서 잠시 일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러나 여긴 기사들 전용 식당입니다만?”

    “일단은 저도 팽가의 기사입니다.”

    “응? 명예기사?”

    잭슨은 정천우가 내미는 왼손의 인장을 발견하곤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정천우의 모습에서 기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기사라면 자신처럼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야 하북팽가의 기본 무장인 세이버를 다룰 수 있다.

    “예, 이틀 전에 영주님께서 직접 기사 서임을 해 주셨습니다.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갈 테니 양해 바랍니다.”

    “영주님께서 당신 같은 사람한테? 믿기 어려운 얘기 같습니다만?”

    잭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 전이라면 이제는 무당파의 기사들로 판명된 복면인들과 전투가 있던 날이다.

    기사만 해도 부상자가 30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20명이 영주관을 지키다가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팽선웅 백작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니 불신의 시선이 더욱 깊어졌다.

    명예기사 한 명쯤 서임해 준 건 사실 별일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공교롭다.

    영주성의 정문을 지키는 경비야 필요에 의해서 전달받았지만 기사들에게까지 전달할 만큼 큰일이 아니다.

    정천우는 잭슨이 눈에 의심이 깃드는 것을 발견하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까 시녀가 날 이리로 안내해 주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간단하게 식사만 하고 갈 것이니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의외라서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주님께서 시킨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재에서 검술서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체포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에 정천우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지금 몰라서 물으십니까? 앞뒤가 맞는 소릴 해야지요. 영주님께서 그 정신없는 이틀 전에 기사 서임을 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기사에게 서재 정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잭슨은 아예 말투까지 바꾸며 정천우를 수상한 사람으로 확신했다.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면 아까 그 시녀를 찾아서 물어보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그 시녀를 찾아오겠습니다.”

    정천우는 괜한 의심을 받자 피곤이 몰려왔다.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그저 귀찮기만 했다.

    정천우가 몸을 일으켜 어린 시녀를 찾으러 나가려는데 잭슨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날 이곳에 데려온 시녀를 찾으려는 것뿐이오.”

    “당신을 데려왔다고 주장하는 시녀의 이름이 뭐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얼굴만 알지.”

    “이 사람, 정말 수상하잖아? 무당파의 첩자 아냐? 신분을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이름도 모르는 시녀를 찾아 신분을 증명하겠다고? 순순히 묶이는 게 피차 좋을 것 같은데?”

    잭슨은 이제 정천우를 첩자로 낙인찍어 놓았다.

    허리춤에 걸린 포승줄을 꺼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어물쩍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거, 완전히 꼬였네.’

    정천우는 자리에 멈춰 서서 눈치를 보았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난감했다.

    눈앞의 뺀질거리는 놈을 패 버리고 영주 집무실로 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 갈등이 생겼다.

    그런 정천우의 망설이는 모습이 잭슨의 의심을 부추겼다.

    “출입문 막아!”

    잭슨은 정천우가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도주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식사하던 기사 몇몇이 출입문을 막고 섰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적의(敵意)에 물들어 있었다.

    동료 기사가 이틀 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상당수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던 차에 첩자로 의심되는 정천우가 걸려들었다.

    “이거 미치겠네. 전 첩자가 아닙니다.”

    “그거야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지. 순순히 잡힐 테냐, 아니면 반항할 테냐! 뭐, 이왕이면 반항하는 게 더 좋다.”

    잭슨은 포승줄을 흔들며 살기가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천우가 반항하기를 기다리는 게 역력해 보였다.

    “묶으십시오. 괜한 짓으로 더 의심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정천우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기사들의 능력을 향상시킬 비급을 원하던 팽선웅 백작이었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안다면 당연히 찾을 것이다.

    “으윽! 너무 세게 묶었습니다. 이건 지나치지 않습니까!”

    정천우는 살을 파고들 정도로 팔목을 억세게 묶은 것에 항의했다.

    “첩자 놈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저는 첩자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그거야 네 생각이고…… 일단은 좀 맞자!”

    잭슨은 능글맞게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정천우의 안색이 달라졌다. 맨주먹이라면 눈 질끈 감고 맞아 줄 수도 있다. 첩자로 오해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잭슨의 주먹이 눈에 들어온 순간 순순히 맞아 줘야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잭슨의 주먹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장갑을 손에 낀 무지막지한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슉!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천우의 얼굴로 잭슨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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