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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36화 (3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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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0. 흥미로운 사실 (2)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팽선웅 백작이 간절한 눈빛으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이젠 아예 밑천을 내놓으라네?’

    정천우는 속으로 기가 막혔다.

    중원에서 이따위 소릴 하면…… 목숨 걸고 싸우자는 뜻이다. 자신의 무공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가르쳐 달라니!

    “무리입니다. 제 검술 시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그대의 검술을 알려 달라는 게 아닐세. 우리 팽가의 기사들을 강하게 키울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달라는 얘기지.”

    “영주님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그게 무언가! 말해 보게.”

    “이곳 세상의 기사들은 단전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중원의 검술은 단전을 기반으로 기운을 키워 나갑니다. 단전이 없다면 마나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가? 정녕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아…….”

    팽선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잠깐! 이건 좋은 기회잖아?’

    정천우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려는 팽선웅 백작에게 짜증을 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좋은 기회였다. 연구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 필요한 심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팽가의 검술서들을 살펴보고 방법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검술서?”

    “네. 중원의 무공 중에는 동공(動功)이라는 수련법이 있습니다.”

    “동공? 그게 뭔가?”

    상심에 빠졌던 팽선웅은 눈에 힘을 주었다. 뭔가 방법이 나올 것도 같은 정천우의 말 때문이었다.

    “동공이라는 건 이곳 기사들이 수련하는 방법을 체계화시켜 놓은 일종의 마나 수련법입니다. 단전이 없다고 할지라도 검술을 수련하면서 마나를 쌓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그런 게 있는가? 당장 지하 서재로 가세.”

    “예? 저한테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정천우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이건 쉬워도 너무 쉬웠다.

    팽선웅이 지금 데려가려는 곳은 하북팽가의 무공이 보관된 서재다. 그처럼 소중한 곳에 만난 지 겨우 이틀 된 자신을 데려간다는 게 이상했다.

    “뭐가 문제인가? 서재의 검술서는 이미 영지의 서점에 풀린 상태라는 걸 몰랐나?”

    “서점에 없는 책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천우는 혼원벽력신공의 이름을 밝히려다가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이름을 대면 왠지 속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서점에 없는 책들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야. 검술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말일세. 검술서를 많이 만들어야 위기 상황에서도 팽가의 검술이 맥을 이을 수 있는 법이지.”

    “…….”

    정천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중원의 무인들과는 생각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팽선웅 백작의 지론에 정천우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중원에서는 자파(自派)의 무공이 유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천우 경, 뭐 하는가? 일어나게. 제인 마법사, 그대도 같이 가겠는가?”

    “저는 검술을 알지 못하니 같이 간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못다 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그리하게. 천우 경은 날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정천우는 제인이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팽선웅 백작의 뒤를 따르는 게 더 우선이다. 고급의 내공심법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를 데리고 건물의 지하로 갔다.

    지하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서재는 지하 1층의 가장 끝 방이었다. 철로 만들어진 문에 팽선웅이 열쇠를 집어넣고 돌렸다.

    철컥!

    “아…… 이게 전부 검술서인 겁니까?”

    정천우는 엄청난 규모의 서재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검술서는 가장 안쪽의 책장에 있고, 나머지는 하북팽가의 기록들을 남긴 것이지. 자네도 우리 팽가의 사람이 되었으니 한 번쯤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죽이는 기술만 좋다는 평가를 받는 팽가다. 무식하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영지 내에 책 생산을 더욱 장려하고 일부러 서재를 크게 꾸몄다.

    정천우가 서재의 규모에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니 돈을 들여 꾸며 놓은 보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열정까지 지니신 줄은 몰랐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영주님.”

    정천우가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듯이 정성스럽게 군례를 올렸다.

    아부 떠는 데 돈 드는 건 아니다. 지나치다 싶지 않은 범위 내에서 최대한 팽선웅 백작을 치켜세웠다. 팽선웅 백작이 서재를 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너무 훤히 드러낸지라 속을 읽기 쉬웠다.

    “하하하! 검을 들었다고는 해도 책을 멀리해서야 쓰나.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책과 서대륙의 책까지 모아 두었다네.”

    팽선웅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지시해서 모아 둔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지금 한가하게 책 자랑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 하북팽가를 건드린 무당파에 쓴맛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니 기습 탓에 상처 입은 기사들의 회복에 힘쓰고 전력을 재정비하는 게 우선이다.

    또한 미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사들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 때문에 정천우를 불러 놓은 게 아니던가.

    급격히 표정을 바꾼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대가 얘기했던 동공? 아무튼, 그것을 찾아내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일단 책들을 모두 살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음…… 저 많은 책을 살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시녀에게 일러 그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조치할 테니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라네.”

    “알겠습니다. 동공을 발견하면 곧바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도록 하게. 3일 후에는 자네도 임무에 참가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천우가 군례를 올리자 팽선웅 백작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갔다.

    “후와, 많긴 많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이 나가기 무섭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젠장! 돈 날렸잖아?”

    정천우는 책장에 떡하니 꽂힌 혼원벽력도의 비급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책을 사 놓고 얼마 읽어 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빨리 팽가의 비급을 접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급은 중원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필사해서 남긴 듯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아쉽게도 그저 양만 많을 뿐이었다. 같은 종류의 책을 여러 개 만들어 놓은 것뿐이었으니까.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

    정천우는 제목을 읽어 가다가 십여 권이나 꽂혀 있는 혼원벽력신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꺼운 마음에 재빨리 책을 뽑아 들었다.

    책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다.

    보통은 두꺼운 게 정상이다. 중원 무인들의 특성상 두루뭉술하게 뜬구름 잡는 얘기로 써 놓는 까닭이다. 다른 사람이 봐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평소 제자들에게 하는 말들이 책에 녹아 있다. 함께 생활하는 제자들만이 알 수 있도록 비밀 유지 차원에서 행하는 일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렇게나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하북팽가의 십이 대 제자 팽진옥이 혼원벽력신공을 새로이 남긴다.

    중원의 비급은 은유적인 표현이 많아 이곳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난해하여 새롭게 재구성한다.

    후인은 혼원벽력신공을 익혀 하북팽가의 위상을 높여 주길 바란다.>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

    무한한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기의 바다.

    기해혈(氣海穴).

    단전이라 부르며, 배꼽에서 한 치 반 아래에 존재하는 중요한 혈도다.

    혼원벽력신공은 단전에 음양이기(陰陽二氣)를 쌓아 벽력(霹靂)의 기운을 발휘하는 이치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몸이란 약하기 짝이 없어 벽력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본디 벽력이라 함은 양기(陽氣)와 음기(陰氣)가 충돌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본 신공은 벽력이 발생하는 원리에 착안하여 양기와 음기를 균등하게 수련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치우침 없는 내공을 쌓으면 몸을 강건하게 해 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다.

    일성(一成)의 단계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단전을 형성한 사람은 즉시 혼원벽력신공의 수련을 중단하고 건곤미허신공을 수련하길 권한다.

    단전을 형성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럴 수가! 이렇게 쉽게 설명해 놓다니!”

    정천우는 혼원벽력신공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혼원벽력신공을 익히려면 골머리 썩을 거라고 잔뜩 긴장했었다. 그런데 이건 쉬워도 너무 쉬웠다.

    내공을 어떤 방식으로 정제하여 단전에 쌓는지,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모조리 알기 쉽게 풀이돼 있었다.

    군더더기를 완전히 없애고 직설적으로 적어 놓은 혼원벽력신공은 그보다 한참이나 하위에 있는 전륜공보다도 훨씬 간결했다. 정천우가 10년 가까이 수련한 전륜공과 공통점까지 있어 더욱 쉽게 느껴졌다.

    “아아! 이런 방식으로 운용하면 더욱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겠구나!”

    혼원벽력신공을 읽어 가던 정천우가 감탄하며 책에서 눈을 뗐다.

    그 순간, 전천우의 단전이 요동을 쳤다.

    단전의 내부에서 양기와 음기가 회오리치면서 꽈배기처럼 꼬이더니 점점 하나로 합쳐졌다.

    ‘크윽! 이, 이런!’

    정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혼원벽력신공을 운기하면서 혼비백산했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깨달음이 절로 내공을 일으킨 것이다.

    양기와 음기가 뒤섞이면서 제멋대로 날뛰었다. 돌파구를 찾아 이리저리 날뛰던 내공이 곧장 회음혈(성기와 항문 중간에 위치한 혈도)을 향해 치달았다.

    회음혈을 지나치면서 내공이 탄력을 받아 순식간에 백회혈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백회혈까지 치고 올라간 내공은 힘을 잃었다. 만약 내공이 충만했다면 지금의 깨달음으로 백회혈을 뚫고 천지간의 기운이 유통하는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백회혈을 가까스로 넘어간 내공이 정수리와 미간을 타고 가슴의 정중앙선을 지나쳐 단전으로 되돌아갔다.

    “쿨럭! 컥! 커헉! 후우…….”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정천우가 피를 토해 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이주천의 진기도인을 마치고서야 혼원벽력신공을 멈출 수 있었다. 단전의 기운이 변화하면서 충격을 받아 생긴 죽은피를 토해 낸 것에 불과했다.

    “후와! 큰일 날 뻔했잖아?”

    정천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내공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전륜공으로 쌓은 내공이 하나의 기운으로 바뀌어 단전을 채웠다. 벽력대제가 남긴 혼원벽력신공에서 말하는 양기와 음기가 조화를 이룬 내공이다.

    전륜공은 양기와 음기를 따로 쌓아야 했지만 혼원벽력신공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흡을 통해 기운을 받아들여 단전에 품은 기운으로 동화시킨다.

    고급의 내공심법을 괜히 선호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전륜공보다 효율이 두 배로 좋아진다.

    정천우는 자신의 단전에 혼원벽력신공이 무사히 안착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기쁜 마음으로 비급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나갔다.

    “이, 이건!”

    정천우는 혼원벽력신공의 마지막 장을 넘기다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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