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5화 (35/200)
  • # 35

    Chapter 10. 흥미로운 사실 (1)

    하북팽가의 내성(內城)은 이틀 전의 흉험한 상황을 체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고 영지민의 얼굴이 밝다. 영주인 팽선웅 백작이 하북팽가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다.

    하북팽가의 내성 중앙에 자리 잡은 영주관 앞에 정천우가 입맛을 다시며 서 있었다.

    혼원벽력신공을 생각하면 친하게 지내야 할 곳이다. 하지만 귀찮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자신의 실력을 잘 알기에 위험한 임무를 맡는 게 싫기도 하다.

    그렇게 영주관 앞에서 인상을 구기며 서 있는데 그 꼴을 보다 못한 경비병이 정천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은요, 불러서 왔죠.”

    “누가 당신을 불렀다는 겁니까?”

    “영주님이 불렀죠. 그런데 들어가기가 싫어서…….”

    정천우는 경비병의 말에 대답해 주면서도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경비병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몇 걸음 다가왔다. 그러고는 정천우의 손에 끼워진 기사의 인장을 확인하고는 밝게 웃었다.

    “혹시 이번에 명예기사가 되셨다는 정천우 경이십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수고하십시오.”

    정천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경비병에게는 깍듯하게 인사해 주었다.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단 경비까지 자신의 존재를 안다. 그만큼 정천우가 관심을 받고 있거나 혹은 말단 경비원들까지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의미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정천우에게는 좋지 않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귀찮은 일이 많아질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관리가 잘되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경비원까지 꼼꼼하게 관리하는 인간들이라면 자신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을 테니까.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아예 화끈하게 도와주는 게 더 나으려나?”

    정천우는 영주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인상을 벅벅 긁었다.

    이런 식이라면 어설프게 상황에 끌려가는 것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뭐라도 하나 더 챙겨 줄 테니까 말이다.

    “이것들 뭐야? 사람 데리고 장난 쳐?”

    기껏 마음을 고쳐먹었건만 정작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전 9시까지 영주관으로 오라고 했다. 경비병까지 자신을 알아보기에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에 들어오니 아무도 없다.

    자신이 좀 일찍 왔겠거니 하고 기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0분이 넘어가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퉤! 염병…… 아쉬운 놈이 다시 찾아오겠지.”

    바닥에 침을 뱉은 그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얼굴로 욕설을 내뱉고는 정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 데다가 마중 나온 사람까지 없다. 아쉬운 건 하북팽가지 자신이 아니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천우 경! 천우 경, 기다려요!”

    익숙한 목소리에 정천우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렸다. 푸른색 로브를 입은 제인이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남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정천우의 눈이 살짝 풀렸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모습이 은근히 자극적이었다.

    “하아, 하아……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제인은 숨을 헐떡이며 정천우를 향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그게…….”

    정천우는 가슴이 떨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푸른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상태였다. 단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인데 묘하게 정천우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이 여잔 얼굴이 무기야.’

    정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이러다가는 호흡이 흐트러져 주화입마에 걸릴지도 모른다.

    정천우는 한차례 고개를 흔들고는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다른 기사분들은요?”

    “아, 정찰조는 아직 구성이 끝나지 않았어요. 출발은 3일 후로 정해졌어요.”

    “네? 그럼 아직 멀었는데, 왜 부르신 거죠?”

    “영주님께서 따로 뵙고 싶어 하세요.”

    “저를요?”

    정천우는 찜찜해하며 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팽선웅 백작이 자신을 보자고 하니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잠정적인 고객이 자신을 원한다는 게 나쁘진 않지만 너무 친해도 좋지만은 않다. 수고비를 후려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네, 위에서 영주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가시죠.”

    기다리고 있다는데야 고객 관리 차원에라도 가 주는 게 낭인들의 예의다.

    제인이 앞장서고 그 뒤를 정천우가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녀의 뒤태를 감상하며 흐뭇해했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계단이 길지 않아 금방 영주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에는 2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영주님, 천우 경을 데려왔습니다.”

    제인은 가볍게 노크하고는 소리 높여 문 안쪽에 대고 말했다. 2명의 기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서 자리를 지켰다. 훈련이 잘되어 있는 게 느껴지는 자세였다.

    ‘정식기사가 되면 나도 이 짓을 해야 한다는 거잖아? 끔찍하군.’

    정천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지나가도 위험인물이 아닌 이상 모른 척하고 망부석처럼 서 있어야 한다는 건 지겨운 일이다.

    “들어오게.”

    안쪽에서 팽선웅 백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인은 영주 집무실의 문을 열고 정천우에게 따라서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팽선웅 백작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일하는 중이었다.

    “반갑네, 천우 경!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게. 처리할 일들이 몇 가지 남아서 말이야.”

    팽선웅 백작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눈 밑이 시커먼 것을 보니 밤을 새워 일한 모양이었다.

    제인은 정천우의 팔을 잡고 옆으로 끌고 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소파 옆의 작은 문이 열리고 시녀가 나와 차와 간단한 쿠키를 내려놓았다.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팽선웅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한 번 더 싸우는 게 낫겠어. 서류 작업은 정말 못해 먹을 짓이야.”

    팽선웅 백작은 질린다는 듯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후련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군례를 올리면서 말했다.

    이왕에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게 좋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이렇게 깍듯하게 대하면 위험한 일에 내보내는 게 켕길 것이다.

    아니, 위험한 일을 맡기려면 그만큼 보수가 뒤따라야 한다는 걸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네. 여기 제인 마법사에게 들어서 알 테지만 이번 전투로 팽가의 기사들이 부족한 상황일세. 부득이하게 그대를 부를 수밖에 없었지.”

    “영주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해서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았으면 하네. 그대를 비롯해서 팽가의 기사들은 모두 소중한 인재들이라는 걸 명심하길 바라네.”

    “저야 받은 만큼 할 뿐입니다. 영주님께서 보여 주신 호의에 보답하겠습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서 팽선웅 백작과 눈을 맞췄다.

    어물쩍 자신을 하북팽가에 집어넣으려는 걸 부정했다. 게다가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번 일은 과한 수고비 때문에 공짜로 해 주지만 다음부턴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정천우의 눈빛이 듬직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기사들이 자신 앞에서 돈을 바라고 행동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따로 부른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라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정말 중원에서 왔다니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네. 나는 우리 팽가의 무공이 반쪽이라고 생각하지. 벽력대제께서 검을 들면 뇌전이 일어나고 광풍이 몰아쳤다고 하네. 병사들이나 배우는 검술인 오호단문도를 펼치면 번개로 이루어진 샤벨타이거가 다섯 마리나 검에서 튀어나왔다고 전해진다네. 놀랍지 않은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벽력대제라는 분은 분명 중원에서도 대단한 무인이셨을 겁니다.”

    팽선웅 백작이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꺼내자 정천우가 감탄성을 발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팽선웅 백작은 눈을 빛냈다.

    영지의 기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반응들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그건 전설일 뿐입니다’라는 대답 말이다. 정천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사는 없다.

    마나 쉐도우나 그보다 더 발전적인 형태의 마나 스트링(중원에서 말하는 검기가 실처럼 갈라지는 형태)을 만들어 내는 기사들의 수는 꽤 많다.

    하지만 마나 쉐도우나 마나 스트링을 짐승이나 몬스터의 형태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벽력대제의 무공을 직접 배워 보아도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시대의 기사들은 벽력대제의 검술을 그저 전설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천우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별 감흥 없이 말하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기회였다. 정천우에게 무공의 기본에 관한 걸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금 세상의 무공은 벽력대제가 다스리던 때보다 오히려 퇴보했다. 기본기를 가르쳐 줄 기사들이 없다.

    제국을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란(大亂)이 일어나면서 너무나도 많은 기사가 죽어 나갔다. 그 때문에 무공을 배우면서 주의해야 할 기본적인 지식이 제대로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

    정천우를 통해 기본기를 제대로 배운다면 제국 시절 기사들이 보였다는 무력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호랑이……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까 말씀하신 샤벨타이거를 말합니다. 검로(劍路)에 따라서 내공을 운용하면 마나 쉐도우가 얽히면서 샤벨타이거의 형상이 만들어질 겁니다.”

    “검로? 그게 무슨 뜻인가?”

    “음…… 여기 식으로 말하자면 검술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력대제 정도의 고수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샤벨타이거 형상의 마나 쉐도우를 상대에게 쏘아 보낼 수 있었을 겁니다. 마나 쉐도우의 최종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샤이닝 소드(Shining sword : 중원의 검강)를 발휘할 정도라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정천우는 중원 무림의 고수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풀어 놓았다.

    검술을 연마하지 않은 제인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의 얼굴엔 놀라움이 번졌다.

    “마나 쉐도우로 샤벨타이거를 만든다? 진짜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중원의 무인들에겐 일정 수준에 오르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재능이 부족한 제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천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능력도 안 되는 판국에 괜히 시범을 보이라고 하면 곤란한 일이니까 말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니 솔직하게 말해 주게. 자네 앞에 놓인 찻잔의 찻물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가? 그 내공이라는 걸 사용해서 말이야.”

    팽선웅 백작은 잔뜩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불의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나 화염 속성의 마법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기사들은 체내에 쌓인 마나를 검에 주입해 활성화시키는 게 가능하지만 뜨겁거나 차갑게 마나의 속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대자연의 기운을 아무런 여과 없이 몸속에 받아들여 쌓는 방식으로 수련해 왔기 때문이다.

    “수준이 낮아 펄펄 끓게는 할 수 없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정천우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어 내공을 집중했다. 양기만을 뽑아 손으로 보냈다.

    “오, 오!”

    팽선웅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정천우가 찻잔을 감싸듯 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한 탓이다.

    “되었네! 그거면 되었어!”

    팽선웅은 정천우가 전설의 세계, 중원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걸 이제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마나의 속성을 임의로 변화시키는 기사는 이제껏 벽력대제가 유일했다.

    팽선웅이 보았던 정천우의 마나 쉐도우는 뇌전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의 속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장천우가 벽력대제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다.

    비록 수준은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팽선웅 백작은 감동한 듯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다가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정천우의 손을 와락 붙잡았다.

    “여, 영주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대의 검술을 알려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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