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4화 (34/200)
  • # 34

    Chapter 9. 불안한 일상 (5)

    정천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금창약을 바른 옆구리의 상처가 불로 지지는 듯 아팠다. 고통에 단련되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차라리 칼을 맞는 게 더 나았다. 이건 마치 부지깽이로 상처를 헤집어 대는 느낌이었다.

    “크으윽!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상처가 낫는 중이에요. 상처 주변의 조직을 강제로 활성화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그런 건 좀 미리 얘기해도 조, 좋았…… 커억!”

    정천우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웬만해선 여자 앞이라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웬만하지가 않았다.

    “주문하신 음료와 쿠키가 나왔…… 이분은 왜 이러세요?”

    쟁반을 들고 오던 점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정천우를 보고는 이러다 시체 하나 치우는 거 아닌지 걱정하는 말투였다.

    “포션을 드셔서 그래요.”

    “아! 그렇군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점원은 포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되돌아갔다.

    “끄으으…….”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괴로워하던 정천우가 한참만에야 질린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직접 확인해 보세요. 상처가 다 나았을 거예요.”

    “그럴 리가…… 응? 다 나았어?”

    정천우는 옆구리에 손을 대었다가 아픔이 느껴지지 않자 놀라고 말았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포션이라는 거죠. 웬만한 상처는 빠르게 낫게 해 줘요. 다만 자주 사용하면 내성이 생겨서 효과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요. 하지만 신전에서 판매하는 포션은 내성이 안 생기죠. 비싸다는 게 흠이지만요.”

    “신기한 물건이군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영주님께서 절 찾으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정천우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제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아름다운 제인이 생글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긴 했다. 그러나 자신을 왜 찾는지는 알아야 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북팽가에서는 곧 몬스터들의 2차 공습이 벌어질 거라고 분석하고 있어요.”

    “몬스터? 다 해치운 거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아요. 이번에 몰려온 몬스터들은 인근에 서식하던 놈들이었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몬스터들은 마기가 유출된 곳으로 무작정 몰려드는 습성이 있어요.”

    “그럼 몬스터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올 거라는 얘기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마도 중간에 마기가 사라져서 멈추었겠죠.”

    제인은 앞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방긋 웃었다.

    ‘무슨 놈의 미소가…….’

    정천우는 목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그녀를 따라 주스를 마셨다.

    “몬스터가 멈추었다면서 뭐가 문제죠?”

    “대형 몬스터가 마기에 이끌려서 이동하다가 아무 곳에나 터전을 잡으면 문제가 돼요. 원래 서식하던 몬스터들이 터전을 버리고 밀려나죠.”

    “밀려난 놈들이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맞아요.”

    “제가 할 일은 뭡니까?”

    “대형 몬스터의 서식지를 찾기 위해서 정찰조를 꾸리기로 했어요. 만약 규모가 작다면 해치우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거죠.”

    “왜 그런 일에 제가 필요한 겁니까?”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형 몬스터라면 위험할 게 분명하다. 그런 일을 정식기사도 아닌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충성의 맹세를 했지만 그거야 요식 행위에 불과한 거다.

    “아시겠지만, 어제의 전투로 기사분들이 많이 다쳤어요.”

    “포션을 먹이면 되잖습니까.”

    “드셔 보셨으니 아실 텐데요. 옆구리의 관통상을 치료하는데도 엄청나게 괴로우셨죠? 빈사 상태의 사람에게 포션을 먹였다가는 고통이 지나쳐서 죽을 수도 있어요. 체력이 회복돼야 포션도 사용할 수 있죠.”

    “……그렇군요.”

    정천우는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옆구리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고통을 받았다.

    어제의 싸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사들은 처참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포션이란 걸 먹였다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할 게 분명하다.

    “후우…… 싫다고 하면 안 되겠죠?”

    “어떤 영지건 영주의 명령을 무시해서 좋을 게 없잖아요.”

    “그렇겠죠? 뭐, 기분은 별로네요.”

    승낙하는 정천우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어쩐지 좀 과하다 싶게 돈을 주더라 했더니 이러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네. 이젠 제가 궁금한 걸 물어볼게요. 괜찮죠?”

    “제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중원에서 넘어오셨다고 했죠? 중원은 어떤 곳인가요?”

    제인은 눈을 빛내며 정천우에게 상체를 숙였다. 이제까지와 달리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정천우의 말을 놓칠세라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행동에 정천우는 더욱 부담을 느꼈다. 이런 미녀가 다가오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게 되었다.

    ***

    “젠장, 쪼잔한 자식! 선불이었다는 거냐? 하긴…… 좀 많이 받긴 했지.”

    정천우는 투덜거리면서 대장간을 향해 걸어갔다.

    내일 그 빌어먹을 정찰을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다. 이번 싸움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중원에서 무인으로 생활하던 습관은 버려야 한다.

    튼튼한 방어구가 필요하다. 어제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그렇게 고전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갑옷을 입은 상대와 맨몸으로 싸운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머리 사내는 그래도 한 번 봤다고 정천우를 반겼다. 지난번에 드로잉 나이프를 샀던 바로 그 대장간이었다.

    “드로잉 나이프 열 자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갑옷 좀 볼 수 있을까요?”

    “드로잉 나이프는 지난번에 사 가신 걸로 드리면 되지요? 갑옷은 여기에 있는 게 전부죠. 선택하시면 즉석에서 몸에 맞춰 드립니다.”

    대장장이는 5실버짜리 드로잉 나이프 열 개를 세어 지난번처럼 종이에 둘둘 말아 주었다.

    정천우는 드로잉 나이프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계의 갑옷은 중원의 것과 생긴 게 전혀 달라서 뭐가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방어만을 생각한다면 금속으로 전체가 이루어진 갑옷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전신을 가리는 금속 갑옷은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데다가 입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활동량이 많은 정천우에게는 과격한 움직임에도 방해되지 않는 갑옷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갑옷을 고르려 했지만 다 거기서 거기 같아서 뭘 사야 할지 고민됐다.

    “고르기가 쉽지 않네요. 갑옷은 어떤 게 좋을까요?”

    처음 접하는 갑옷이라 혼자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입어 보고 고르겠는데 그게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좋은 갑옷보다는 용도에 맞는 갑옷을 선택하셔야 후회가 없습니다.”

    “사냥할 때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냥? 아, 아! 지난번에도 오크 가죽을 가져오셨죠? 그렇다면 무기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가격은 얼마나 예상하시죠?”

    “……40골드 정도면 적당할 듯합니다.”

    정천우는 자신이 가진 90골드에서 절반 정도의 가격을 불렀다.

    “움직임 때문이라면 차라리 가죽 갑옷을 쓰시는 게 낫겠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스케일 아머라는 것인데 방어력이 좋고 움직이기도 편하죠. 다만 이동하면서 소음이 약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곤란하죠. 몬스터들이 얼마나 귀가 밝은데요.”

    정천우는 튼튼해 보이는 스케일 아머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스케일 아머란 물고기의 비늘처럼 얇게 만든 철판을 가죽에 꿰매서 방어력을 높인 것을 말한다. 스케일 아머를 입고 움직일 경우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발생할 수 있다. 당장 내일이면 정찰 임무에 나가야 하는데 소음을 일으킨다면 몬스터에게 발각당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브리건딘 아머와 비슷한 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냥에 나간다고 해도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아 좋지요. 망가지면 수리하기도 좋고, 상당히 실용적입니다. 제가 직접 샘플로 만들어 봤습니다. 품질은 확실하지요.”

    대장장이는 상반신만 가리는 형태의 갑옷을 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천우는 대장장이가 가리킨 갑옷을 집어 들었다.

    브리건딘 아머는 가죽이나 천 위에 규격화된 작은 철판을 끝이 뭉툭한 못으로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거 괜찮은데요?”

    정천우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대장장이가 자랑하며 내민 갑옷은 대량생산에 어울리는 형태라고 보는 게 맞았다. 가죽 갑옷 위에 손바닥만 한 철판의 네 귀퉁이와 중앙을 리벳으로 고정한 방식이었다. 철판을 앞뒤로 열 장씩 덧댔고, 옆구리 부분은 철판을 사용하지 않았다.

    방어력과 활동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형태였다.

    “얼마죠?”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35골드만 주십쇼. 첫 작품이라 걱정했는데 좋은 주인을 만나 저도 기쁩니다. 한번 입어 보시고 불편한 곳을 말씀해 주시면 바로 고쳐 드리겠습니다.”

    정천우는 대장장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옷을 받아 몸에 걸쳤다.

    맞춘 것처럼 몸에 잘 맞았다. 가죽이 조금 뻣뻣한 느낌이 들었지만 입고서 조금 길들이면 해결될 문제였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무게였다. 대략 5kg 정도라 전혀 부담이 없었다.

    “잘 맞네요. 고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드로잉 나이프와 합쳐서 40골드죠?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또 들러 주세요.”

    “수고하세요.”

    정천우는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는 집을 향했다.

    새로운 갑옷은 그대로 몸에 걸치고 드로잉 나이프는 허리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잃어버린 드로잉 나이프 때문에 열다섯 개가 되었지만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포션을 마시고 상처까지 다 나은 상태라 정천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약간이지만 내공까지 늘어났다. 그의 몸 상태는 지금 최상이었다.

    경공을 발휘해 보통 사람들이 뛰는 정도의 속도로 이동했다.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하고서야 제럴드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왔어? 아까 그 끝내주게 생긴 아가씨는 누구야?”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제럴드가 뛰어 나왔다.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영주성에 있던 사람인데, 몰랐어?”

    “내가 여기 사람들을 다 알겠냐? 둘이 뭐 했어? 어디까지 갔냐?”

    “아주 지랄을 한다. 어디까지 가긴 어디까지 가? 소식 전하러 온 아가씨야. 내일 아침 9시까지 영주관으로 나오란다. 귀찮아 죽겠다.”

    정천우가 투덜거리면서 마당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겨우 그거 말하려고 둘이 나갔다고? 말 같은 소릴 해라!”

    “병사들은 장식이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뭘 하겠냐? 중원에서 왔다니까 그거 물어보겠다고 온 거야.”

    “중원? 누가? 네가?”

    “그래.”

    “헛소리하고 있네.”

    “믿기 싫으면 관둬.”

    “그래, 믿어 준다, 믿어 줘. 어? 갑옷 샀어? 근사한데?”

    진실을 말해 줘도 제럴드는 믿지 않았다.

    벽력대제가 살았다는 전설 속의 세상에서 왔다는 말을 단박에 믿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대신에 정천우가 입은 새 갑옷에 관심을 두었다.

    “자식, 빨리도 물어본다. 대형 몬스터와 싸우게 될지도 몰라서 하나 장만했다. 칼 맞아 보니까 정신이 번쩍 나더라.”

    정천우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포션을 마셔서 상처는 다 나았지만 검이 몸속에 파고들던 느낌은 정말 끔찍했다. 또 그런 상처를 입는 것도, 포션을 마시는 것도 사양하고 싶었다.

    “잘 생각했다. 갑옷이 좋으면 든든하지. 나도 이참에 바꿀까? 그거 얼마 주고 샀냐?”

    “35골드.”

    “비싸네…… 질러? 아냐…… 그래도 지를까?”

    제럴드는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새 갑옷을 장만하는 걸 고민했다.

    이번 몬스터 침공은 제럴드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평온했던 경비대원으로서의 삶이 위협당하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죽은 다음에 돈이 무슨 소용이냐?”

    “그렇겠지?”

    “당연하지.”

    정천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역천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천우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역천검…… 염병…….”

    이제야 조금 적응할 만하다 싶었는데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생겼다. 소환단이라는 유혹에 넘어간 결과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중원에 있을 적에도 그래서 늘 안전한 일만 찾았던 건데…….

    삶이라는 건 힘없는 자에겐 언제나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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