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3화 (33/200)
  • # 33

    Chapter 9. 불안한 일상 (4)

    “그래요?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정천우는 귀가 번쩍 뜨였다.

    혼원벽력신공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최소 두 배 가까이 내공을 빠르게 쌓을 수 있게 된다.

    명문가의 무공이란 건 그런 거다.

    순수한 기운을 안정적으로 쌓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내공을 빠르게 키우는 것까지 고려해서 만들어졌다. 전륜공과 같은 삼류 내공심법과는 비교하는 게 실례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누? 하북팽가의 서재에 가면 원본이 있는걸.”

    “……지랄.”

    “응? 지금 뭐라고 했수?”

    “아! 말이 헛나갔어요. 주인 할아버지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정천우는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북팽가의 서재까지 들어갈 방법이 없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걸 어렵지 않다고 말한 어처구니없는 노인이다.

    그렇다고 해도 욕을 한 건 조금 지나쳤다. 실수라고는 해도 말이다.

    노인은 기분이 나빴지만 정천우가 미안해하자 화를 풀었다. 고객은 소중하니까!

    “이 책만 사 가겠습니다.”

    “2골드.”

    “여기 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정천우는 가죽 주머니에서 10골드짜리 금화를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제럴드를 찾아 서점을 돌아다녔다.

    한쪽 구석에서 야릇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제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자식이 원래 책을 좋아했던가?’

    혼원벽력신공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생각에 정천우의 기분은 엉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럴드가 보이지 않으니 슬며시 짜증이 솟아나던 참이었다.

    하지만 제럴드가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니 솟아났던 짜증이 가라앉았다. 저렇게 책을 좋아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정천우는 그가 들고 있는 책의 나머지 부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지?’

    제럴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정천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이 자식!’

    정천우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제럴드가 보는 책은 엄청났다.

    엄청나다는 말 외에는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온갖 기괴한 자세로 뒤엉킨 그림 밑에 글이 적혀 있었다.

    대충 내용을 보자면……

    <그대의 XXX이 나의 XX를 후끈……>

    <거기는…… 거기는…… 부끄……>

    너무 적나라한 대사라 차마 더 읽을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남녀의 육체적인 사랑을 엮은 책이다. 정교한 삽화가 더욱 자극적이었다.

    “재미…… 있냐?”

    “자식! 죽인다, 죽여. 이번 달은 더 맛깔나는데? 아주 대사가 찰지다. 큭큭큭!”

    “그래, 너 잘났다.”

    “나 이거 사 줄 수 없냐? 아침은 가볍게 먹는 걸로 하고.”

    제럴드는 책을 덮고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흠, 흠…… 얼만데?”

    정천우 역시 남자였다.

    “5골드! 컬러판은 8골드!”

    “……관두자.”

    그러나 때려죽여도 그림 좀 들어간 소설책을 5골드에 살 생각은 없었다.

    “돈 생긴 김에 팍팍! 안 될까? 아침은 저렴한 거 먹자니까?”

    “인간아, 아침으로 얼마나 비싼 걸 처먹을 생각이었던 거냐…….”

    정천우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제럴드를 째려보았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지 않았어?”

    “닥치시지!”

    “쳇…….”

    제럴드는 정천우의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더 건드렸다가는 아침 식사까지 못 얻어먹을지도 몰랐다.

    ***

    “쪼잔한 놈!”

    “죽을래? 든든하게 아침 먹었으면 됐잖아!”

    정천우는 구시렁거리며 따라오는 제럴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제럴드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칭얼대는 중이다. 가뜩이나 혼원벽력신공을 구할 수 없어 심란한 판에 옆에서 저러고 있으니 정천우는 폭발 직전이었다.

    “인마! 차라리 여자를 사귀면 되잖아. 바보냐? 그런 그림 쪼가리 따위를 5골드나 주고 사게? 한 번만 더 칭얼대면 가만 안 둔다!”

    “자식이 사나이의 로망을 몰라! 어? 저거 누구냐?”

    “로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말 돌리지 마!”

    “진짜야. 누군데 우리 집 앞에서 저러지? 어마어마한 미인이잖아?”

    제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뻗었다.

    자꾸 칭얼대는 제럴드에게 한 소리 하려던 정천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어마어마한 미인’이라는 말에 반응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거기에는 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1명의 여인과 병사 2명이 있었다. 그 뒤로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보였다.

    로브를 입은 여인이 정천우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천우 경!”

    정천우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상대방이 먼저 아는 척을 해 오자 괜스레 가슴이 떨렸다.

    가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반기는 미녀의 모습에 제럴드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이건 사기야! 너 같은 놈한테 저런 미인이 아는 척을 하다니,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죽고 싶냐?”

    정천우가 이를 빠드득 갈아붙이면서 제럴드를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반가운 손님은 아니다.

    어제 만났던 하북팽가의 마법사 제인이었다. 자신을 발견하고선 반갑게 웃고 있다. 그러나 정천우의 입장에선 조금 성가신 손님이다.

    ‘아…… 이런 바보 같으니.’

    정천우가 속으로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이 여자와 말하는 재주가 없다는 걸 안다. 실제로 어제만 해도 별다른 대화조차 없이 헤어지지 않았던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제럴드의 생각과 달리 사무적일 게 확실하다. 쓸데없는 기대(?) 따윈 애초부터 의미 없는 일이다.

    “안녕하셨어요?”

    정천우는 일부러 밝게 웃으면서 제인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미모는 대단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미안한 수준이다. 호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진미령에 대한 의리가 있어 그나마 태연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자신의 주제를 아는 정천우로서는 그저 관상용(?)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제인은 정천우가 살갑게 대하자 더욱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일찍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실례가 된 건 아닌가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영주님께서 내리신 명령도 있어서 얘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아요.”

    “좋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만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겠어요?”

    정천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집…… 아니, 제럴드의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함께 온 병사님이 계셔서 그건 곤란할 것 같아요.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면 괜찮은 곳이 있어요. 거기라면 두 분 병사님과 함께 가도 될 거 같은데, 어떠세요?”

    “예, 같이 가시죠. 제럴드, 갔다 올게.”

    “가든지 말든지.”

    제럴드는 심통 난 얼굴로 툴툴거렸다. 엄청난 미인을 가까이에서 실컷 볼 기회가 사라지는 바람에 삐진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우는 상관하지 않았다.

    제인이라는 마법사는 하북팽가의 사람이다.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깊게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원래 고객과 너무 친하면 돈 받을 때 곤란한 일이 자주 생기는 법이다.

    친해지면 가격부터 후려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물며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수작을 부리면 쉽게 거부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정천우가 잡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제인이 그의 곁을 지나치며 방긋 웃었다.

    “마차에 오르세요. 걸어가기엔 조금 멀잖아요?”

    제인은 그가 마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정천우는 그녀의 미소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색만 다를 뿐, 그녀의 얼굴은 중원의 여인과 닮았다. 그것도 상당한 미인이다.

    ‘아니야, 저건 영업용 미소야! 그래, 이건 거래야, 거래!’

    정천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제인이 마차에 올라 자신의 앞에 앉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2명의 병사는 제인과 정천우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부석과 보조석에 올라갔다.

    “이랴!”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병사의 가벼운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정말…… 더럽게 예쁘네.’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제인을 바라보며 정천우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워, 워…….”

    정천우는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병사의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생글거리는 게 이렇게나 부담스러울 줄은 몰랐다. 말이라도 걸어 줬다면 조금 달라졌을 테지만 제인은 그저 정천우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도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다 온 것 같네요. 내리세요.”

    “네.”

    정천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음…….”

    제인이 마차 문 앞에 서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마차에 오를 때도 그렇고 정천우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 보통의 기사들…… 아니, 보통의 남자들은 자신이 마차에서 내릴 때 손을 못 잡아 줘서 안달인데 말이다.

    그러나 정천우는 달랐다. 자신이 내리려는데도 멀뚱하게 서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제인은 하는 수 없이 로브 자락을 손으로 들어 올리고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요. 두 분 병사님은 마차를 맡기시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따로 자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제인 마법사님.”

    둘 중에서 고참으로 보이는 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쫄다구로 보이는 병사는 마차를 끌고 건물 옆으로 들어갔다.

    ‘그 마법사랑 정말 동일인인 건가?’

    정천우는 나긋나긋한 제인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지난밤 복면인 마법사를 향해 마법을 쏘아 대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전투가 끝난 다음에도 이랬던 것 같아.’

    남을 배려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천우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락부락한 사내놈들보다야 야리야리한 여자에게 더 믿음이 간다.

    정천우가 생각하는 신뢰라는 건……

    ‘이 여자가 꼼수를 쓴다 해도 한 방이면 돼.’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일이 틀어져도 생명의 위협은 없는 셈이니 무슨 용건이든 그저 들어주기만 하면 그뿐이다.

    정천우의 얼굴이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제인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윽…….”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아까 제럴드가 사 달라고 졸라 대던 책 속의 그림이 떠오르고 말았다.

    뻐근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우 경, 어디 안 좋으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다치셨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냥 여기에 앉는 것으로 해요. 병사님은 저쪽 건너편 자리에 앉으시면 될 것 같네요.”

    제인은 정천우의 신음(?)을 듣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본의 아니게 환자 취급을 받게 된 정천우는 점원이 가져온 물을 마시고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는 동안에 제인은 뭘 시켜야 할지 모르는 정천우를 대신해서 그의 것까지 같이 주문했다.

    “보자고 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물잔을 내려놓고 제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그녀의 아름다운 뒤태(?)가 생각나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정말 무뚝뚝한 사람이잖아?’

    제인은 여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천우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하는 남자들만 보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정천우 같은 사람을 대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받아 왔던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서운함?

    왜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 그것이었다.

    “먼저 영주님의 말씀부터 전할게요. 영주님께서는 몸이 낫는 대로 영주관에 와 달라고 하셨어요.”

    제인은 품속에서 빨간색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겠습니다.”

    “내일 오전 9시까지 늦지 않게 와 주세요.”

    “네?”

    정천우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상처가 낫는 대로라고 하더니, 내일 오전까지 오란다!

    관통상(貫通傷)이다.

    팽선웅 백작이나 팽만리나 자신이 검에 꿰뚫리는 것을 보았다. 눈앞의 제인 역시 자기 입으로 정천우가 다쳤다는 걸 얘기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하니 그로서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말이 됩니까? 이 상처가 이틀 만에 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여기 포션을 드리잖아요.”

    “포션? 그게 뭔데요?”

    “아! 미안해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깜빡했네요. 일단 이걸 드세요. 드시고 난 뒤에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해요.”

    제인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붉은색 액체가 든 병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시라고요?”

    정천우는 꺼림칙한 얼굴로 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은근하게 좋은 향기가 났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병을 기울여 혀만 살짝 가져다 대고 입맛을 다셨다.

    ‘독(毒)은 아니야.’

    정천우는 붉은 액체에 닿은 혀가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의심을 지운 그가 병을 들어 목울대를 꿀럭거리면서 단숨에 붉은 액체를 마셨다.

    “마셨습니다. 이제 영주님이 왜 그렇게 무리한 명령을 내리셨는지 알려…… 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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