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2화 (32/200)
  • # 32

    Chapter 9. 불안한 일상 (3)

    ***

    영지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몬스터가 침공한 어제의 흉흉함은 목책 근처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 하북팽가의 본성에서 벌어진 일 또한 외부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아침 거리를 걸으면서 정천우는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중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생긴 것도 그렇고, 파는 물건들이 달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이나 중원이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건 똑같다는 점이다.

    “뭘 그렇게 촌놈처럼 두리번거려?”

    “촌놈 맞아. 난 여기 처음 보잖아.”

    “아! 딴 나라에서 왔다고 했지?”

    제럴드는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우가 자기 입으로 중원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주에게는 다 밝혔으니 중원에서 왔다는 걸 굳이 숨길 이유도 없지만 묻지도 않는데 대답해 줄 필요성은 없었다.

    “일단 식료품점에서 건조 음식을 왕창 산 뒤에 이동하자.”

    “무겁잖아. 그러지 말고 서점부터 가자. 책 많이 살 거 아니니까.”

    “돈 벌었으면 좀 써, 인마!”

    “무슨 개소리야?”

    정천우는 뜬금없는 제럴드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생각해서 거하게 사려고 나왔는데 말투가 영 거슬린다.

    “돈 좀 빼서 마법 가방 하나 장만하면 되잖아.”

    “마법 가방?”

    “몰라?”

    “알겠냐?”

    “넌 정말 어디서 살다가 온 거냐? 마법 가방이라는 건 큰 물건을 작게 만들어 주고, 무게도 엄청나게 줄여 주는 가방이야. 효율이 높을수록 비싼 거야 당연한데 싼 것만 사도 없는 것보단 백배 편해.”

    “말이 돼?”

    정천우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이란 걸 직접 눈으로 보기는 했다. 손에서 번개가 튀어나오고 죽은 놈을 되살리기도 하는 괴상한 수법이다.

    그러나 무게를 줄여 주는 가방이라니…….

    “자식이 속고만 살았나. 있다면 있는 줄 알아! 식료품점에 가면 같이 파니까 일단 가자.”

    “말도 안 돼!”

    “가 보면 알아!”

    제럴드는 고개를 내젓는 정천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제법 그럴듯한 규모를 갖춘 식료품점이었다.

    “엘빈스 아저씨!”

    “제럴드 왔구나. 어쩐 일이냐?”

    “마법 배낭 좀 보여 주세요. 건조 음식도 같이 살 겁니다.”

    “네가 쓰게?”

    식료품점의 주인 엘빈스는 ‘너 같은 짠돌이가?’라는 눈빛으로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제가 그런 걸 쓸 이유가 없잖아요. 이 친구가 쓸 거예요. 일단 건조 음식을 담아 갈 예정이고요. 나중에는 사냥 나가서 쓸 거니까 좋은 걸로 주세요.”

    “돈은?”

    “아저씨, 누가 공짜로 달라고 합니까? 천우야, 보여 드려.”

    제럴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불쾌해했다.

    정천우가 가죽 주머니를 열어서 보여 주자 엘빈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녀석아, 나도 힘들어서 그래. 이 짓 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엘빈스는 멋쩍은 듯이 말하며 고리가 달린 장대를 들어 올렸다. 사람 키 두 배는 될 법하게 높이 걸린 마법 배낭의 벨트에 장대 끝의 고리를 걸어서 내렸다.

    “이게 보통 비싼 물건이어야지. 때가 타면 사람들이 사 가지도 않는다니까?”

    “차라리 창고에 보관하시면 되잖습니까.”

    “벽에다 걸어 놓으면 훔쳐 가지도 못할 텐데 뭐하러? 창고에는 다른 물건 쌓아야지. 1년에 한두 개 팔리는 걸 창고에 처박아 놓으면 나중에 찾을 때 힘들어.”

    엘빈스는 마법 배낭을 고리에 빼내 제럴드에게 내밀었다.

    “어휴, 알았어요. 어련하시겠습니까. 뭐야? 좀 좋은 걸로 보여 주시지, 뭐 이리 허접해요? 효율이 엉망이네.”

    제럴드는 마법 배낭을 살펴보고는 툴툴거렸다.

    “왜 그러는데?”

    곁에서 지켜보던 정천우는 제럴드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대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뭘 보고 효율이 나쁘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적혀 있잖아! ‘50%/80%/150kg’이라고 보이지?”

    “그러네.”

    정천우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과는 다른 무게 단위에 처음에는 혼동되었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이해하는 수준은 되었다.

    1kg이 대략 두 근 반쯤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50%/80%/150kg’은 뭘 뜻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순서대로 무게 비율, 부피 비율, 한계 중량을 표시한 거야. 그러니까 무게를 절반으로 줄여 주고 부피는 5분의 1로 줄여 주는데, 최대 150킬로그램까지 담을 수 있다는 의미야.”

    “아! 그렇구나. 이 정도면 쓸 만한 거 아니야?”

    “쓸 만하긴 개뿔! 엘빈스 아저씨, 건조 음식을 가득 담아 갈 거니까 알아서 좋은 걸로 주십쇼. 딱 들어가는 만큼만 살 겁니다.”

    “그, 그래? 기다려 봐!”

    엘빈스는 빼앗듯이 제럴드의 손에서 마법 배낭을 가져가더니 이내 다른 마법 배낭을 내려서 보여 주었다.

    “야! 이거 쓸 만하다. 얼마면 파실 겁니까?”

    “……100?”

    “천우야, 딴 데 가자. 이젠 동네 사람한테도 눈탱이 때리는구나. 믿을 사람 없다더니…….”

    “제럴드! 가지 마! 누가 100골드 받는대? 모르는 사람 같았으면 100골드를 받았을 거란 얘기다! 자식이 성질만 급해서는!”

    “그러니까 얼마에 파실 겁니까?”

    “90골드! 딱 5골드 남는다.”

    “많이 남네요. 80골드에 사겠습니다.”

    “너 내 말을 잘못 들은 거냐? 원가가 85골드라니까?”

    “싫으면 관두시든가요. 멜슨 아저씨네 가게로 가야겠네.”

    “나쁜 녀석! 알았다. 85골드!”

    “헤헤헤! 이제 배낭에 건조 음식 꽉꽉 눌러 담아 줘요. 건조 음식값은 안 깎겠습니다.”

    “그건 어차피 정찰가거든? 에이, 쪼잔한 자식! 145골드!”

    “와! 그렇다고 진짜 한 푼도 안 깎아 줍니까?”

    “싫으면 말아! 그것까지 깎아 주면 난 뭐 먹고 사냐? 배낭만 사겠다고 할 거면 그냥 가 버려! 차라리 안 팔고 만다.”

    “성격 참…… 천우야, 돈 드려라.”

    “그, 그래.”

    정천우는 두 사람의 이상한 신경전에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다가 시키는 대로 돈을 내밀었다.

    50골드짜리 금화 세 개를 내밀었다.

    큰돈이었지만 어차피 공짜로 생긴 돈인 데다가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자, 거스름돈 5골드. 이제 좀 가라! 아침부터 사람 신경 건드리지 말고.”

    “그럼 갑니다!”

    제럴드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엘빈스가 눈을 아래위로 치켜뜨며 화난 시늉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은 엘빈스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시시덕거리면서 가게에서 멀어졌다.

    “지독한 녀석! 겨우 7골드 남겼네.”

    엘빈스는 50골드짜리 금화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어쨌든 개시 손님으로 크게 벌었다. 조금 더 후려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말이다.

    “이거 정말 가뿐한데?”

    정천우가 마법 배낭을 메고서 신기하다는 듯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150g의 건조 음식을 천 개나 집어넣었음에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60%의 무게를 줄였다지만 60kg은 넘을 테니 일반인들에겐 부담스러운 무게다. 하지만 무공으로 단련된 데다 짐을 옮기는 게 주 업무였던 정천우에게는 가뿐했다.

    “무게가 줄었다고 해도 무겁긴 할 텐데, 괜찮아?”

    제럴드는 정천우가 맨몸처럼 뛰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

    “이 정도면 가뿐하잖아. 이것보다 더 무거운 걸 지고서도 며칠씩 걸어 다녔는데 뭘. 이제 서점으로 가자.”

    “그 재미없는 책을 뭐하러 사겠다고 그러냐? 머리만 복잡하던데 말이다.”

    제럴드는 혼원벽력도와 혼원벽력신공을 사겠다는 정천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생각했을 때 혼원벽력도만큼 비효율적인 검술도 없다. 불필요하게 몸을 뒤로 날리면서 검을 휘두르고, 목표물 주변에 검을 찌른다.

    가장 황당한 것은 검술의 뒷부분이다. 거긴 아예 장난질을 쳐 놓았다. 심지어는 공격하다가 말고 검을 손에서 놓으란다.

    제럴드가 생각했을 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검술이었다.

    “필요하니까 보겠다는 거야. 어? 저 사람들은…….”

    말을 타고서 하북팽가의 정문을 나서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정천우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얽히고 싶지 않았다.

    크게 한탕 한 셈이니 몸이 나을 때까지는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다. 일단 몸부터 추스른 다음에 저들과의 관계를 정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정천우가 택할 수 있는 건 하나다.

    ‘팽만리라고 했지? 건방진 새끼……’

    정천우는 어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던 팽만리를 떠올렸다.

    몸이 피곤해서 참았…… 아니, 돈 받았으니까 참았다. 이미 셈은 끝났다. 다음에도 그런 식이면 쓴맛을 보여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캬하! 역시 멋있단 말이야. 근사하지 않냐? 저 순백의 갑옷에 새겨진 샤벨타이거! 젠장, 내가 마나만 다룰 줄 알았어도 한번 폼 나게 살아 보는 건데 말이야!”

    “놀고 있네. 잔소리 집어치우고 서점이나 안내해!”

    “야!”

    “시끄러워! 어서 가자니까!”

    “야, 인마!”

    “거 자식, 더럽게 짹짹대네! 그냥 좀 가자고!”

    “서점 지나쳤어!”

    “……참 일찍도 얘기해 준다.”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중간에 지나쳐 온 갈림길에서 꺾어 들어갔다.

    “서점이 많네?”

    “당연하지. 하북팽가의 인쇄술은 유명하거든. 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는 곳이 바로 우리 영지라서 그래.”

    “검술서도 많겠네?”

    “그건 아니야. 검술에 관련된 서적들은 잘 안 팔려.”

    “왜?”

    “너무 흔하니까. 그리고 본다고 해도 그냥 머리만 아파. 너도 직접 사서 보면 알 거다. 사람들이 왜 검술서를 사서 보려고 하질 않는지.”

    제럴드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즐비하게 늘어선 서점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그러다가 하나의 서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제일 오래된 서점이다. 구석에 있어서 그렇지, 책 종류는 우리 영지에서 가장 많아.”

    “그렇단 말이지?”

    정천우는 눈을 빛내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이, 어떤 책을 찾수?”

    서점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머리가 허연 노인이 다가왔다.

    “검술서를 찾고 있어요.”

    “어디 영지의 검술 말이우? 웬만한 건 다 있으니 말씀만 하시구려.”

    “하북팽가의 검술을 찾는데요.”

    “이쪽으로 오슈.”

    노인은 김빠진다는 표정으로 정천우를 이끌었다.

    다른 영지의 검술이라면 비싸게 팔 수 있지만 하북팽가의 검술은 정해진 가격 외에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슈. 무조건 2골드.”

    노인은 정천우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찾아봐라! 나는 다른 책을 보고 있을게.”

    “웬일이냐? 아까는 오기 싫어 죽으려고 하더니?”

    “흐흐흐…… 오늘은 팬티하우스가 나오는 날이지.”

    “팬티하우스?”

    “그런 게 있어. 너무 따지지 마라. 구경만 할 거다, 구경만!”

    제럴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다!’

    정천우는 대형 책꽂이를 가득 채운 책의 위용에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책은 많았지만 종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절반이 넘는 책이 오호단문도였다. 나머지 책은 혼원벽력도와 건곤연환탈백도였다.

    그는 주저 없이 혼원벽력도를 뽑았다.

    다른 도법은 그에겐 의미가 없다. 뇌전(雷電)의 기운을 담아 펼치는 무공으로는 혼원벽력도만 한 것이 없다. 건곤연환탈백도가 훨씬 위력이 있다고 들었지만 자신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

    혼원벽력도를 찾았으니 이제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찾으면 된다.

    “응? 없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아무리 훑어봐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못 보고 지나친 건가 싶어 몇 차례나 다시 살폈지만 마찬가지였다.

    “주인 할아버지! 주인 할아버지!”

    “귀 안 먹었으니 그만 부르슈. 왜? 찾는 게 없수?”

    노인은 어기적거리면서 걸어와 정천우를 향해 물었다.

    “혼원벽력신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불렀어요.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혼원벽력신공? 그건 여기 없수.”

    “없어요?”

    “배울 수 없다고 알려진 지가 언젠데 그걸 찾수? 심법인가 뭔가는 어느 영지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수. 그 단, 단…… 뭐더라?”

    “단전이요?”

    “그래, 단전! 그것 때문에 배울 수 없는 거라고 해서 책으로 만들질 않수.”

    노인은 신기한 놈 본다는 듯이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심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졌다. 이제는 아예 책조차 만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아, 또 이런 문제가 있네.”

    정천우는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전륜공으로 쌓은 내공을 활용하려면 혼원벽력신공이 필요하다. 그런데 구할 방법이 없으니 강해지겠다는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왜? 꼭 필요한 거유?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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