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1화 (31/200)

# 31

Chapter 9. 불안한 일상 (2)

“이걸 잊고 있었네?”

정천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 개의 단환이 손에 잡혔다. 하북팽가에서 소환단이 모두 짝퉁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였기에 기대감 따윈 없었다.

한 알은 벽곡단…… 300년이나 지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구토가 일어났다.

나머지 한 알은 의외로 밀랍에 싸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나 기대감은 생겨나질 않았다. 밀랍에 싸여 있던 것도 대부분은 독약이나 별 효과가 없는 약이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정천우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밀랍을 벗겨 냈다.

“뭐야? 제법 그럴듯하잖아?”

환약에서 풍기는 알싸한 향기에 정천우가 가볍게 감탄성을 흘렸다.

옅긴 하지만 분명히 영약의 향기다.

중원에서 먹은 약에서도 이런 향기가 났다. 독약이라면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거나 대놓고 역겨운 냄새가 날 텐데 알싸하긴 해도 전혀 역하지 않았다.

환약에 살짝 혀를 대 보았다. 혀에 아무런 이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최소한 독약은 아니다.

정천우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좋은 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는 게 좋다. 아껴 둔답시고 놔두었다가는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정천우에게 영약을 빼앗겼던 중원의 젊은 무인처럼 말이다.

“얼마나 늘어나려나…….”

정천우는 눈을 빛내며 단전을 일깨웠다.

내상이 남아 단전이 욱신거렸지만 이까짓 내상쯤은 영약이 치료해 줄 것이기에 웃으면서 참았다.

벽력대제가 남겼다는 영약이다.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어정쩡한 영약을 남겼을 리가 없다. 다른 약이야 후손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었기에 문제가 생겼지만 영약만큼은 그가 직접 선정했을 게 분명하다.

밀랍을 벗긴 환약이 그의 입속에 들어갔다. 꼭꼭 씹어 삼키면서 전륜공을 운기했다.

잠시 후, 정천우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런 상태로 30분 넘게 운기삼매경에 빠졌다.

“후우…….”

정천우가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눈을 번쩍 떴다. 맑은 정광(晶光)이 잠시 두 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약 흡수에 성공하여 내공이 늘었다는 증거였다.

“우욱! 퉤에!”

운기를 마치자마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제기랄! 속이 다 미식거리네!”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이나 바닥에 침을 뱉으며 투덜거렸다.

상했다!

밀랍으로 봉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영약에는 탁기(濁氣)가 더 많았다. 그것을 분리해 내면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받아들인 기운보다 대기 중에 흩어 버린 탁기의 양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말이다.

“3년 정도 늘었나?”

정천우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고는 쓰게 웃었다.

만약 멀쩡했을 때 기운을 흡수했다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내공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운의 대부분이 탁해져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이내 표정을 바꾸며 정천우가 환하게 웃었다.

못해도 1년은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한순간에 얻었다.

그거면 됐다.

얻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건 비생산적인 생각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늘어난 내공에 기뻐하는 게 맞다.

이곳에서나 중원에서나 약하면 무시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강해지는 것만 생각할 때였다.

“재수가 좋았어. 몇 개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정천우는 바닥에 뱉어 버린 상한 환약의 찌꺼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미련을 버리고 배낭을 멨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뜻하지 않게 영약을 흡수하느라 시간을 보낸 탓이다.

“제럴드!”

정천우는 목책 밖으로 나가려는 제럴드를 발견하고 이름을 크게 불렀다.

제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목책 밖으로 나가려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왔다.

“어? 언제 왔냐? 뭐야, 다쳤어?”

“조금 다쳤어. 잘 끝난 거지?”

“그래, 너 가고 나서 몬스터들이 한 번 더 덤벼들었는데, 불이 타는 동안 물자를 보충하고 멋지게 해치웠다. 나머지는 기사님들이 나가서 모조리 머리를 잘랐고. 이제 몬스터 시체를 주워다가 팔아서 떼돈 벌게 생겼다.”

“자식, 무섭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새끼가 말을 해도 꼭!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이번에 좀 만지면 집 좀 넓혀 가야지. 수컷 둘이 한방에 잔다는 게 말이 되냐?”

제럴드는 검지와 엄지를 붙이며 동그랗게 만들고는 키득거렸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내 몫까지 챙겨라. 나는 몸뚱이가 이래서 먼저 들어가 쉬련다.”

정천우는 피가 번져 나오는 붕대를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다. 먼저 들어가 있어. 해체 작업까지 끝내려면 오늘 밤새워야 할 거야. 내일 아침에나 보자고.”

“알았다.”

음충맞게 미소 짓는 제럴드를 뒤로하고 정천우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머리가 다 띵하네. 헛! 이 자식은 또 언제 들어온 거야?”

정천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깜짝 놀랐다. 바닥에 누워 코를 고는 제럴드를 발견한 탓이다.

제럴드가 자고 있는 건 별일 아니다. 그가 들어왔음에도 자신이 기척을 몰랐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너무 해이해졌어. 정신 차려야지.’

정천우는 자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인 생활을 할 당시만 해도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것은 몸이 아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공이라곤 삼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제럴드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잤다.

이런 식이라면 목숨을 내놓고 잠들었다고 봐야 한다.

역천검을 꺼내 든 정천우가 마음을 다잡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무공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늘어난 내공에 익숙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윗옷을 벗어 한쪽에 내려놓고 자세를 잡았다.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신 정천우가 잠시 그대로 멈췄다가 길게 숨을 내뿜었다. 잠을 자면서 쪼그라든 폐를 확장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전륜도법.

단순하기만 한 초식들이 펼쳐졌다.

오호단문도를 수련하면 좋겠지만 일부러 전륜도법을 수련했다. 오래 수련해 온 도법이라 익숙하기도 했고, 무리한 움직임으로 상처가 터질지도 모른다.

‘확실히 달라!’

정천우는 역천검을 초식의 흐름에 맡기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겨우 3년의 내공이 늘어난 것뿐인데 초식의 운용이 달라졌다. 검을 움직이면서 끊기는 느낌이 나던 부분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힘이 남아도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잖아.”

제럴드가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얼굴로 나왔다.

“후우!”

정천우는 역천검을 허공에 깊게 찔렀다가 회수하면서 탁해진 숨을 길게 내뱉었다.

“예민한 척하고 있네. 다 끝났어. 아침이나 먹자.”

“입안이 까끌거려 죽겠는데 무슨 아침이야?”

“그렇다고 굶냐? 아침은 꼭 먹어야 하는 거다.”

정천우가 역천검을 검집에 넣고는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아침 식사를 사수하는 건 그의 철칙이다.

낭인의 삶은 고달프다. 유일하게 평안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아침이다. 점심은 걸어가면서 먹는 일이 다반사에, 저녁은 의뢰주 때문에 거르기가 쉽다.

시일이 촉박하면 늦게까지 걸어가기에 노숙할 곳에 도착하자마자 잠들기 바쁘다. 그래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아침이다.

그런 소중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은 정천우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천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럴드가 뭘 봤는지 화들짝 놀라서는 눈을 크게 떴다.

“어? 너 그거 뭐냐?”

“뭐가?”

“이거 어디서 났어!”

제럴드는 정천우의 손가락에 끼워진 명예기사의 인장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영주님이 주던데?”

“진짜? 영주님이? 이건 명예기사의 인장인데? 너 기사가 된 거야?”

“그러라고 하더라.”

“기사가 되는 거 싫다고 했잖아.”

“싫다고 했더니, 명예기사는 굳이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길래 그러겠다고 했어.”

“……부러운 자식!”

제럴드는 명예기사의 인장을 부러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명예기사라고 하더라도 월급이 나온다. 비록 정식기사만큼 많은 돈은 아니지만 10분의 1 정도는 된다. 다른 영지로 가지 말라는 의미가 크기에 기사 전력의 확보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이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그럼 안 부럽겠냐? 매달 5골드씩 꼬박꼬박 나올 텐데!”

“푼돈 가지고 부럽기는 개뿔이…….”

정천우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반지 대신 돈이나 왕창 더 주는 게 훨씬 고마운 일이다.

“아쭈? 몬스터 몇 마리 잡더니 배가 불렀다?”

“시끄러워, 인마! 그건 그렇고, 경비대원 나부랭이가 기사한테 막말해도 돼?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놀고 있네. 왜 명예기사겠냐? 가지긴 더럽고 남 주긴 아까운 놈들한테 주는 게 명예기사 작위야. 그런 소릴 하려거든 정식기사가 되고 나서다.”

“아, 몰라, 몰라! 아침 먹자!”

아직 세상물정에 어두운 정천우였기에 복잡하게 신분 따윌 따지는 게 귀찮다. 신분이 뭐가 되었건 그저 편하고 자유롭게 사는 게 장땡이다.

이왕이면 풍족하게!

“귀찮은데 그냥 거르자. 잠깐! 내가 왜 네 녀석 아침을 챙겨 줘야 하는 건데?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따지기는! 그럼 나가서 먹자. 그럼 됐지?”

“어물쩍 넘어갈 셈이냐! 그러고 보니까 넌 아침 식사 준비한 적이 없네? 내가 네놈 마누라냐?”

“쪼잔하게 따지기는! 기다려 봐, 인마!”

정천우는 툴툴거리는 제럴드의 말을 자르면서 한쪽에 벗어 둔 윗옷을 집어 들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어제 팽선웅 백작이 건네준 가죽 주머니가 잡혔다.

“어? 그건 뭐냐? 귀족이 쓰는 물건 같은데?”

“그게 이런 주머니에도 티가 나?”

“당연하지! 영지 문장인 샤벨타이거가 찍혀 있잖아.”

제럴드는 가죽 주머니의 중앙에 찍힌 변종 호랑이(?) 형태의 문양을 가리켰다.

“샤벨타이거? 이렇게 생긴 짐승이 샤벨타이거라는 짐승이야?”

“그래, 하북팽가를 상징하는 몬스터야. 송곳니가 무척 길지. 누가 준 거야?”

“영주님이 줬어.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정천우는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고 손바닥에 내용물을 꺼냈다.

“이야아, 이게 대체 얼마야? 확실히 우리 영주님은 통이 크시다니까?”

제럴드는 정천우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화를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50이라는 숫자가 찍힌 금화가 세 개에, 10이라는 숫자가 찍힌 금화가 열 개나 된다.

“이게 많은 거냐?”

“당연하지! 10년 만에 장만한 내 집이 300골드다. 그런데 너한테 영주님이 너한테 한 방에 250골드나 주셨잖아. 대단한 거지!”

“그렇구나…… 뭐, 돈은 많으면 좋은 거니까. 아침 먹으러 가야지? 서점도 들를 겸해서 나가자.”

“맛있는 걸로 사 줄 거냐?”

“자식이, 이 형님은 쪼잔하지 않다. 아침 차리기 귀찮으니까 아예 건조 음식을 왕창 사다 놓자. 그러면 아침마다 징징대지도 않을 거 아냐.”

“좋아! 나가자!”

건조 음식을 사겠다고 하자 제럴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침마다 일일이 음식을 준비하기 귀찮았다. 혼자 살 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요즘은 정천우 때문에 귀찮아도 아침마다 음식을 해야만 했다.

건조 음식이라면 귀찮은 일이 훨씬 줄어든다. 여행자들을 위한 것으로, 간단히 물만 붓고 끓이면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게 건조 음식이다.

“인마! 나가려면 씻어야지!”

“아차차! 그래, 빨리 씻고 나가자!”

“자식이 성질만 급해서는.”

정천우가 툴툴거리면서 가죽 주머니를 허리띠의 가방에 넣었다.

오늘 사야 할 물건이 무척이나 많다. 어제 싸움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탓이다.

실력이 부족한 거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마음가짐까지 안이한 건 큰 문제다. 낭인 시절의 꼼꼼함을 이 세상에 와서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하다못해 가죽 갑옷이라도 있었다면 무식하게 관통상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드로잉 나이프가 넉넉했다면 싸움을 쉽게 풀어 갔을 터였다.

‘게을러졌어…….’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을 욕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바로 여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살면서 게을러지다니……

그는 자신이 잠시 미쳤던 모양이라고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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