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0화 (30/200)
  • # 30

    Chapter 9. 불안한 일상 (1)

    “하하하! 어째 꼭 데이트 신청하는 걸 보는 느낌이군그래.”

    팽선웅 백작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그제야 제인은 자신이 정천우에게 너무 바싹 다가갔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여자라고 냄새는 좋네.’

    정천우는 제인의 향긋한 냄새가 멀어지는 걸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일단 기사 서임부터 하세. 천우 경, 내 앞으로 오게.”

    팽선웅 백작은 테이블 위의 역천검을 집어 들고 말했다.

    정천우는 무얼 하려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기사 서임’이라는 말에서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있었다. 황제가 벼슬을 내려 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주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십시오.”

    팽만리는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천우에게 말했다. 이제 한 식구라고 생각해서인지 이제까지와 달리 말투가 부드러웠다.

    정천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팽선웅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몸이 움직이려는 걸 참아 냈다.

    ‘지, 지랄! 아직 빨아먹을 게 있으니까 참는다.’

    정천우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지는 역천검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목이 근질거리고 내공이 절로 일어났다. 피부에 소름이 돋아나고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역천검이 옆으로 휘둘러지면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갈 판이다.

    “그대, 정천우는 나 팽선웅을 주군으로 맞이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정천우는 언제든 역천검을 튕겨 내고 팽선웅 백작을 공격할 준비를 마치고 대답했다.

    긴장하고 있었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악의 경우 팽만리와 제인의 공격을 염두에 둬야 한다.

    팽선웅을 비롯한 나머지 두 사람은 정천우가 감격해서 긴장한 거라고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소중히 하고 약자를 보호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팽가의 긍지를 이어 나갈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정천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그의 몸은 극도의 긴장감 탓에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역천검이 머리 위에 얹힐 때는 하마터면 팽선웅 백작을 공격할 뻔했다.

    다행히 머리에 얹힌 게 끝이었다. 역첨검이 떨어지고 나서는 다시 달라붙지 않았다.

    ‘이런 미친 의식이 다 있다니…….’

    정천우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겨우 긴장감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더러운 의식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벌떡 일어나 팽선웅 백작을 패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천우와는 달리, 팽선웅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기뻐했다.

    비록 능력은 부족해 보이지만 팽가의 기사가 늘어났다. 그것은 팽가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천우 경, 일어나게.”

    “예, 영주님.”

    “이것을 왼손에 끼우게. 명예기사의 인장으로, 가운데 붉은 보석이 박힌 것은 정성과 정열을 다해 주군을 보필하라는 의미라네.”

    팽선웅은 정천우의 손에 명예기사의 인장을 끼워 주며 보석의 뜻을 알려 주었다.

    약간 헐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천우는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가락 굵기를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딱히 감흥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로써 명예기사 서임이 끝났네. 앞으로 우리 팽가를 위해 힘써 주길 바라네. 이만 가 봐도 좋네.”

    “알겠습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정천우는 팽만리가 그랬듯이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정중앙에 대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영주에게 보여 주는 군례였다.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이곳의 예법이라고 하니 선심 쓰듯이 해 줬다.

    “오늘 정말 고마웠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팽선웅 백작이 어깨를 두들기자 정천우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자리가 불편했던 정천우는 인사를 마치고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정천우가 멀어지자 팽만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주군, 어째서 저런 자를 영입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못마땅한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막돼먹은 용병을 보는 느낌입니다. 기사도를 지키기나 할지 걱정입니다.”

    그가 보기에 정천우는 기사로서 실격이었다. 교활하게 눈치를 보는 것도 그렇고, 기사의 서임을 받고서도 팽선웅 백작을 대하는 태도가 마땅치 않다.

    명예와 긍지를 중요시하는 하북팽가의 기사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중원에서 왔다지 않은가. 우리 팽가의 정체된 검술에 도움을 주겠지. 아!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네.”

    “명령만 내리십시오.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팽만리는 검집에 꽂힌 세이버의 손잡이를 왼손으로 움켜쥐며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렸다.

    정천우의 뒤를 쫓아 그를 죽이고 역천검을 찾아오라는 것일 수 있었다. 이제껏 팽선웅이 그런 적은 없지만 귀족 중에는 그런 일을 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역천검은 벽력대제의 유품.

    팽선웅이 지저분한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정당한 명령인 이상은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팽만리였다. 그만큼 벽력대제의 유품은 중요하다.

    “만리 경,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는가? 그리고 난 제인 마법사에게 말한 걸세.”

    “아! 죄송합니다.”

    팽만리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모시는 팽선웅 백작이 비열한 수법을 싫어하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긴장해 주군을 욕되게 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하이엘프인 샤칼 님께 연락을 넣어야 할 것 같네.”

    “뭐라고 전해 드리면 될까요?”

    “역천검의 주인이 나타났다고만 해 주게.”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다네. 연락이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연락은 당장 할 수 있지만 전달받을 사람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까요.”

    “상관없네. 나야 전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성의는 보인 셈이니까.”

    팽선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주군, 하이엘프 샤칼 님이 왜 역천검의 주인을 찾는 것입니까?”

    “궁금한가?”

    “궁금합니다.”

    “역천검의 주인을 찾으라는 신탁이 내려졌다고 하더군. 그래서 천우 경을 더욱 내 곁에 두려는 것일세. 잘하면 엘프와 드워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뭐,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닐세. 난 천우 경이 마음에 들었네. 우리 팽가의 검술을 보완해 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하오나, 그의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팽만리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보여 준 마나 쉐도우는 자세히 살펴봐야 겨우 보일 만큼 수준 낮은 것이었다. 비록 부상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몸이 낫는다고 해서 마나의 절대량까지 늘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한마디로 하복팽가에 큰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단락된 문제니 그 이야긴 이만하고, 이번 일의 배후를 파악해야 하네. 싸우면서 이건 무당파가 개입된 것이라고 느꼈는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당파? 어찌 그들이 이토록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하지만 천우 경과 싸우던 복면인이 ‘무당파’라는 말에 격하게 반응하더군. 포로들이 정신을 차리면 심문해 보도록 하세. 피해 보고가 들어온 것이 있는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영지민을 안심시키고 부상자를 돌보는 걸 최우선으로 하세. 우선…….”

    팽선웅 백작은 팽만리와 마법사 제인을 앉혀 놓고 즉석에서 일거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몬스터의 침입과 복면인의 공격으로 하북팽가의 피해가 컸다.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 가면서 정천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

    “크윽! 지랄이네.”

    정천우는 걸어가면서 인상을 구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슬쩍 말을 타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일 테니 말 한 필 사라진 것쯤은 파악할 수 없을 게 뻔하다.

    옆구리가 피범벅이다. 복면인 대장과 싸우면서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얻은 상처다.

    돈을 받았어도 손해라는 기분이 들었다. 소환단에 눈이 돌아가서 시작한 일인데 정작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일단은 경비대로 가는 게 최우선이다. 그곳에 자신의 배낭이 있으니 금창약을 찾아 바를 수 있다.

    평소라면 배낭을 메고 다녔을 텐데 사냥을 다녀온 직후에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짐이 많아서 놓고 나왔다.

    “제길, 다음부터는 따로 챙겨야겠어.”

    정천우는 뒤늦게 후회했다.

    허리띠에 가방이 달려 있음에도 그것을 망각하고 배낭 안에 모조리 집어넣는 멍청한 짓을 한 거다. 위기 상황에서는 배낭에 든 물건들이 얼마나 유용한 것들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다음부터 전투에 필요한 물건은 따로 챙겨야겠다는 다짐이 생겨났다.

    ‘마을은 무사하겠지?’

    경비대 마을로 걸어가면서 불안감이 들었다.

    몬스터가 재차 침공해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몬스터의 2차 침공이 있다면 자신은 지금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사하든 말든 배낭이 먼저야. 몸부터 추슬러야 해.’

    정천우는 배낭을 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짐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에 스며들었다. 화공을 벌였기에 아직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매캐한 연기에 고기가 탄 역겨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잘 마무리된 모양이군.”

    정천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웅성이며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전투 상황이거나 몬스터에게 당했다면 절대로 들려올 수 없는 종류의 말소리였다.

    목책에 다가갈수록 상황은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목책을 열고서 몬스터의 시체를 수거하는 병사들과 경비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했던 표정들이 사라지고, 떼돈을 벌어 기쁘다는 표정만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샘슨 아저씨!”

    “너 어디 갔었어! 어? 칼침 맞았냐? 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까 그란드 기사님 따라갔다가 좀 문제가 생겼어요. 제 배낭 어디 있어요?”

    “네 배낭? 어디 있긴, 창고에 있지. 밤부터는 목책 바깥에서 가져온 몬스터 시체들로 가득 채운다고 하니까 빨리 빼야 할 거다.”

    “알았어요. 제럴드 녀석은 괜찮죠?”

    “제럴드? 저기 봐라! 신나 죽는다.”

    “……그러네요.”

    정천우는 반쯤 타다 만 오크 시체를 질질 끌고 가면서 헤벌쭉 웃는 제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사한 걸 보니 다행이다. 저 뺀질이 놈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죽거나 다쳤다면 더 짜증 났을 테니까.

    “열쇠 가지고 들어가라. 이왕이면 붕대라도 감고 나와. 놔두면 상처가 썩는다.”

    “네, 치료 좀 하고 올게요.”

    “그래, 이따 보자. 몬스터가 나올지 몰라 경계를 철저히 서야 하거든.”

    샘슨은 정천우에게 가 보라고 손짓하고는 목책 외곽을 찬찬히 훑었다.

    정천우는 경비실로 들어가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창고로 갔다. 창고에는 자신의 배낭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서둘러 오크 가죽을 치우고 배낭 안에 손을 넣었다.

    금창약이 담긴 통과 붕대를 꺼낸 그는 조심스럽게 겉옷을 벗었다.

    “으윽, 지랄맞게 아프네.”

    시간이 꽤 지난 탓에 상처와 옷이 엉겨 붙은 채로 굳어서 고통을 주었다.

    바지까지 아래로 까 내리고 서둘러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금창약과 상처가 만나자 거품이 부글거리면서 일어났다. 약과 피가 뒤섞이면서 피딱지처럼 변했다.

    등 뒤에까지 꼼꼼히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조심스럽게 감았다.

    “후우!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

    흐르던 피가 멎고 붕대로 상처를 감아 놓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고 해도 완벽하게 피가 멎은 게 아니라서 빈혈 기운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이제라도 상처를 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상처를 돌보고 바지를 추켜올리려고 했다.

    “응?”

    정천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짝퉁 소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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