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9화 (29/200)
  • # 29

    Chapter 8. 기사가 되다 (4)

    “그걸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정천우 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모두 잃었을 물건이오. 천천히 살펴보셔도 좋소이다.”

    “중원에서는 소환단을 복용하면 약 10년 정도의 내공…… 그러니까 이곳으로 따지면 10년 동안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마나를 단숨에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정천우는 상자 안에 든 소환단(?)을 꺼내 꼼꼼히 살폈다.

    중원에 살 당시, 낭인촌 유일의 의원인 악소추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영약과 독약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만일을 위해서 알아 둔 것이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에 중원에서 무인 하나를 두들겨 패고 영약을 챙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소환단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천우가 잔뜩 기대했다.

    그와 달리 팽선웅과 팽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스나이트를 만드는 재료로써의 가치밖에 없는 소환단에 그런 효과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천우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건 소환단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젠장, 후우…….”

    소환단을 살펴보던 정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속았다!

    이것들은 소환단이 아니다.

    절반 이상이 독단(毒丹)이고, 몇몇 개의 환약은 아무런 의미 없는 약이었다. 그의 지식이 깊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영약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벽곡단(식사 대용 환약)까지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벽곡단을 구성하는 성분이 상해 독약이라 불러도 좋았다.

    “어째서 한숨을 쉬는 것이오?”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응? 그건 또 왜 그렇소? 이것은 모두 벽력대제께서 남겨 주신 소중한 유물이오.”

    팽선웅은 그럴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버릴 거였으면 진작에 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복면인들과 이토록 처절하게 싸웠겠는가!

    “궁금해서 묻습니다. 혹시 이것들은 원래 따로따로 보관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건…….”

    “그랬군요. 아마도 생김새가 비슷해서 한데 모아 보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부 독약입니다. 아마도 벽력대제께서 약학에까지 밝지는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이것들이 독약이라고 확신하오?”

    “확신합니다. 최소한 저는 이것을 다 준다고 하더라도 모조리 버릴 겁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손에 닿지 않게!”

    “흐음…….”

    팽선웅은 정천우의 굳은 표정을 살피며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천우의 얼굴에선 다른 뜻을 찾을 수 없었다.

    정천우는 원래 약들을 살펴보면서 소환단 하나쯤 챙겨 보려고 했다. 그런데 모조리 독약이거나 그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사심이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알겠소. 자꾸 분란만 일으키는 물건이니 이 기회에 날을 잡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태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팽선웅은 단호한 듯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천우의 눈치를 살폈다.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후우…… 진작에 버려야 했을 물건이구나!’

    팽선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쉬워했다.

    먹으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이 남은 탓에 선대 때부터 보관해 왔다. 분명 벽력대제가 남긴 책에는 소환단이 마나를 증진시켜 준다고 했다. 마나 증진 효과를 보지 못하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겨 왔다.

    중원에서 왔다는 정천우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더라도 계속 보관할 이유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환단을 노리는 이유의 대부분은 데스나이트를 만들기 위해서다. 먹지도 못하는 게 적만 불러들인다. 이번 기회에 버려야 했다.

    더러운 음모를 가진 다른 영지가 공격해 오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들이 넘보지 않게 하려면 소환단을 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팽선웅은 아쉬움을 접고 정천우를 바라봤다.

    “정천우 님.”

    “네, 영주님.”

    “역천검이 우리 하북팽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계시오?”

    “대충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벽력대제께서 하북팽가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역천검이 그분께서 생전에 사용하신 검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원하신다면 하북팽가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팽가가 아무리 뿌리를 중요시한다고 쳐도 생명을 구해 주신 은인에게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진 않소. 대신에 나는 이 자리에서 정천우 님께 우리 하북팽가의 기사가 되어 줄 것을 청하오.”

    팽선웅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천우를 바라보며 정중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자 팽만리가 다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으로서 내리는 절대적인 명이었기에 그가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천우의 모습에선 명예로운 기사의 품위를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영주님의 뜻에 따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감힛!”

    고개를 숙였던 팽만리가 분노한 얼굴로 잇소리를 냈다.

    단지 중원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정천우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리는 건 무척이나 불만스러웠다.

    현재 팽가의 성과 격식에 맞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걸 저렇게나 쉽게…….

    불만도 있고 화도 나지만 주군인 팽선웅 백작이 결정한 일이니 따르려 했다. 한데 정천우가 감히 주군의 뜻을 거부하니 더더욱 화가 났다.

    “만리 경! 진정하시오!”

    “하오나!”

    “작위를 내리는 게 나의 권리인 것처럼, 그것을 거절하는 건 작위를 받을 사람이 가진 당연한 권리라네.”

    팽선웅 백작은 고개를 흔들며 세이버를 뽑아 드는 팽만리를 말렸다. 팽만리는 이를 빠드득 갈아붙이고는 정천우를 한차례 노려보았다가 이내 무릎을 꿇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영주님의 뜻은 고마우나 저는 아직 이 세상을 잘 모릅니다. 좀 더 세상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제 실력이 미흡하다는 걸 잘 압니다. 하북팽가의 기사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정천우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미쳤냐? 아쉬울 때 도와줘야 대우받지.’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정천우다. 가끔 도와줘야 수고비가 짭짤하다.

    중원의 표사처럼 조직에 소속되면 큰소리 한번 쳐 보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주는 월봉만 바라봐야 한다. 그것도 조직에서 잘릴까 봐 노심초사 아쉬운 소리 해 가면서 말이다.

    ‘주제를 아는 놈이었군.’

    그제야 고개 숙인 팽만리의 얼굴이 풀어졌다.

    감히 영주님의 뜻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알고 주제 파악하는 거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영주인 팽선웅 백작을 높게 평가하는 셈이다.

    “흐음…… 그럼 이건 어떻소? 일단은 우리 하북팽가의 명예기사 작위를 주고 기다리겠소. 그대는 경험과 실력이 충분해졌다고 느낄 때 돌아오는 것이오. 이것마저 거절하지는 말아 주시오. 은인께서 지닌 역천검이 우리와 인연이 닿아 있음이니…….”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끈질기게 자신을 엮으려는 팽선웅의 거듭된 부탁을 못 이긴 척 들어주었다.

    이 자리가 끝나면 언제 또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귀하신 몸들이다. 귀찮게 말꼬리 잡느니, 그냥 고개나 한 번 끄덕이고 말 일이다.

    “하하하! 고맙소이다! 만리 경, 그대는 명예기사를 의미하는 인장을 가져오도록 하게.”

    “충!”

    팽만리는 기분 좋게 웃는 팽선웅 백작에게 군례를 올리고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정천우 님이 떠나신다면 우리도 곤란해지는 셈이라…….”

    팽선웅 백작은 흐뭇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선조의 유품인 역천검을 지닌 정천우와 관계를 맺어 두고 싶었다. 찬란했던 옛 제국의 영광이 역천검과 함께했다. 그것을 포기하면, 그리고 포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하북팽가는 더 추락할 것이다.

    어차피 역천검을 받아 봐야 팽가의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렇다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잡아 두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대충 이해하고는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역천검을 넘길 생각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팽가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 고충을 아신다니, 이거 면목 없소.”

    “어찌 되었든 이젠 한 식구나 마찬가지가 된 셈이니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정천우는 이왕 기분 맞춰 주기로 한 김에 선심 쓰듯 말했다. 상대의 속을 알 수 없으니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나중을 위해서다.

    아직 팽선웅이 안전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특히나 조금 전에 나갔던 팽만리는 더더욱 믿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언제고 한번 손을 봐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수고비를 받지 않았으니까.

    “좋소! 이제 그대는 오늘부터 하북팽가의 명예기사가 될 것이니, 앞으로도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일세. 오늘 나의 생명을 구해 주어서 고맙네. 이것은 내가 주는 첫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 주게.”

    팽선웅 백작이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재빨리 팽선웅 백작의 앞으로 다가가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작은 가죽 주머니는 보기보다 제법 묵직했다. 정천우는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당장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고 싶지만 없어 보일 것 같아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상황이 좋았으면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으나 오늘은 그것으로 참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가죽 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팽선웅 백작을 향해 마주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랄! 그런 건 새꺄, 주둥이 털지 말고 행동으로 하란 말이다.’

    정천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있는 놈들은 생색내는 걸 더럽게 좋아한다.

    팽가 놈들에 대한 평가는 액수를 확인한 뒤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액수가 형편없을 경우, 오늘 이후로 웬만하면 팽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래, 상징적인 의미일지라도, 벽력대제의 역천검이 하북팽가에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겠는가!’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친근하게 대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웃는 사이, 기사의 인장을 가지러 갔던 팽만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 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같이 이끌고 왔다.

    “오! 제인 마법사, 몸이 성치 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왔는가!”

    “견딜 만해요. 역천검이 나타났다 하여 왔습니다. 궁금증을 참을 수가 있어야죠.”

    하얗게 질린 얼굴의 여마법사가 팽선웅 백작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복면 마법사의 마법에 쓰러졌던 그 여마법사였다. 크게 당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용케 찾아왔다.

    ‘예쁘네…….’

    정천우는 제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영지에서 봐 왔던 다른 여자들과는 조금 생김새가 달랐다. 중원의 사람과 같은 외모에 머리색만 금발이었다. 그런데 그게 참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부를까 하다가 아픈 사람한테 몹쓸 짓인 것 같아 부르지 않았네. 천우 경, 자네의 검을 보여 주게.”

    “네, 영주님.”

    정천우는 명령을 받는 즉시 역천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인은 역천검을 받아 들고서 심각한 표정으로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ДЙЁЭФ…… 진실의 눈!”

    츠즈증…….

    제인이 두 손을 역천검에게 향한 채 시동어를 외쳤다.

    황금빛의 마나가 역천검에게 스며드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마나가 흩어졌다.

    “진품입니다. 역천검은 마법 저항이 뛰어나 일반적인 마법은 무효화한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아요.”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역천검이 진품이라는 것을 확정 지었다.

    “그러면 차라리 주군께서 사용하심이…….”

    묵묵히 듣고만 있던 팽만리가 정천우를 힐끔 쳐다보다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제 한 식구가 된 사람의 물건을 탐하는 것은 팽가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닐세. 게다가 나의 마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기사들과의 싸움에선 쓸모가 없겠지. 자네라면 그런 약점을 떠안고 싸울 수 있겠나?”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팽만리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굳이 역천검이 아니더라도 마법사의 마법을 파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마나 쉐도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닌 채로 기사와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줘도 싫다는데, 저 새끼는 왜 자꾸 지랄이야?’

    정천우는 팽만리가 역천검을 언급하는 게 짜증 났다. 성질 같아선 확 면상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

    “자, 자! 우리 팽가의 명예기사가 되기로 한 정천우 경일세. 나중에 우리 팽가의 정식기사가 될 사람이니, 인사들 하게.”

    팽선웅 백작은 은근슬쩍 정천우가 하지도 않은 ‘정식기사’라는 말을 확정적으로 얘기하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팽만리입니다. 썬더 기사단의 부단장입니다.”

    “저는 하북팽가에 몸을 의탁한 마법사 제인이에요.”

    “정천우라고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중원에서 넘어온 사람입니다.”

    “중원? 그게 사실인가요?”

    제인은 정천우의 눈을 쳐다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역천검이 나타났다는 것은 벽력대제의 후인이 나타났다는 걸 의미하기에 그의 정체를 의심하긴 했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중원에서 왔다고 하니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럼 나중에 따로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승낙했다. 예쁜 여자가 따로 만나자는 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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