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5화 (25/200)
  • # 25

    Chapter 7. 활약 (4)

    “눈치……챘냐?”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피!”

    복면인 대장이 롱 소드로 정천우의 발밑을 가리켰다.

    정천우는 롱 소드의 끝을 따라 자신의 발밑을 보았다. 과연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발밑을 보는 사이에도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

    눈치 못 채는 게 바보다.

    슈아악!

    “이런 썅!”

    정천우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파공음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캉!

    “눈치가 빠른 놈이군!”

    복면인 대장은 아쉽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무식한 새끼!”

    정천우가 혀를 내두르며 복면인 대장을 노려보았다.

    복면인 대장의 롱 소드가 두들긴 대리석 바닥이 쩍 벌어져 있었다. 피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몸이 절단 났을 것이다.

    ‘이류 이상! 거기에 나만큼이나 실전 경험이 많아!’

    정천우는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적당히 자신의 힘을 보여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인식만 심어 주고 빠지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 영악하다.

    이기기 위해서…… 아니, 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다.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의미다.

    “너도 참 더럽게 살아온 새끼구나.”

    “남 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복면인 대장이 눈매를 좁히면서 말을 받았다.

    “이쯤에서 그냥 넘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난 한 알만 있으면 돼.”

    정천우는 은근한 말투로 제안했다.

    사실 두 개를 챙겼지만 여차하면 한 알은 돌려주고 목숨을 건질 생각으로 능청을 떨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끄으으으…… 으아아아악!”

    복면인 대장과 정천우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복면인들과 하북팽가의 무사들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면서 무기를 맞부딪치는 중이었다. 그런 소음을 뚫고서 들려올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었다.

    “잘되어 가고 있군.”

    복면인 대장은 괴로워하는 부하의 모습에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아까 소환단을 삼킨 복면인이었다.

    소환단을 삼킨 복면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피거품을 내뱉고 있었다. 복면 마법사는 그 뒤에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손에서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건 뭐냐?”

    “네깟 놈이 알 필요 없다! 죽어라!”

    복면인 대장은 롱 소드에 마나를 쏟아부으면서 본격적으로 싸우자고 달려들었다.

    정천우는 피하기엔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양손으로 꽉 움켜쥔 역천검으로 롱 소드를 받아 냈다.

    ‘큭! 확실히 나보다 고수야!’

    정천우는 복면인 대장의 롱 소드를 받아 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한번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자 복면인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주변이 온통 롱 소드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정천우는 롱 소드를 역천검으로 막아 내면서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채앵!

    정천우가 역천검에 내공을 가득 담아 크게 휘둘렀다.

    복면인 대장의 롱 소드와 역천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반탄력을 활용해 정천우가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파바박!

    복면인 대장이 쫓아오기도 전에 보법을 발휘해 몸을 이동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추적을 방해하기 위해 널브러져 있는 복면인의 시체를 뒤로 걷어찼다.

    “어림없는 수작!”

    복면인 대장은 수하의 시신을 롱 소드로 갈라내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복면인 대장의 행동에 정천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웃기지 마라!”

    복면인 대장이 정천우의 말을 사뿐히 무시하며 롱 소드를 수직으로 찍어 갔다.

    정천우가 롱 소드를 겨우겨우 튕겨 내며 소리쳤다.

    “돌려준다! 포기할게!”

    “필요 없다! 죽여서 빼앗겠다!”

    복면인 대장은 크게 소리치며 공격을 이어 갔다. 정천우를 살려 둘 생각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다.

    복장이 터져서 그렇기도 했지만 이렇게 치사한 놈이라는 걸 알았으니 포기하겠다는 말도 순순히 믿어 줄 수 없었다.

    “망할 자식! 꼭 그래야겠냐?”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며 다시 한 번 롱 소드와 역천검이 부딪치는 반탄력을 빌려 몸을 날렸다.

    잘못 건드려도 한참이나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복면인 대장은 애초에 타협이 되질 않는 인간이었다.

    ‘할 수 없지!’

    정천우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 줄 순 없는 일이다. 이제껏 수도 없는 사선(死線)을 넘어온 자신이다.

    내공을 끌어 올린 정천우는 모든 감각을 복면인 대장에게 집중시켰다.

    “우웃!”

    밀려난 정천우를 공격하려던 복면인 대장이 걸음을 멈추며 긴장했다.

    저런 모습을 한 상대를 수도 없이 보았다.

    꽉 다문 입술과 노려보는 눈.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흉내 낸다고 해서 저런 분위기가 나올 순 없다.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주둥이 털 시간 없다! 죽고 싶으면 덤벼! 그게 아니라면 소환단 줄 테니까 꺼져!”

    정천우는 전신의 내공을 끌어 올리느라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도 타협점을 내놓았다.

    “너 같은 놈을 남겨 뒀다간 내가 불안해서 안 돼. 죽어 줘야겠다.”

    “지독한 새끼! 그래, 같이 죽자! 최소한 팔 하나는 가져간다!”

    정천우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며 역천검을 들어 검의 손잡이를 오른쪽 볼에 붙였다.

    “좋은 기세!”

    복면인 대장은 정천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감지하고는 가볍게 칭찬의 말을 내뱉었다.

    천천히 롱 소드를 가슴 앞으로 가져온 복면인 대장은 정천우의 빈틈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끼야압!”

    “차압!”

    두 사람은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달려가 서로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카강! 캉! 쩌저정!

    두 사람의 무기가 맹렬하게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똥을 토해 냈다.

    서로에게 집중한 두 사람은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었다가는 언제 상대의 날카로운 검 날이 몸을 훑고 지나갈지 모른다.

    둘의 공방은 꽤 오래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복면인 대장보다 내공이 부족해 충격을 다 상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입가에도 어느새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아아!”

    정천우가 괴성을 지르며 더욱 과감하게 역천검을 휘둘렀다. 두 손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츠걱!

    “헉, 헉! 내가 이긴 것 같군.”

    복면인 대장이 희열에 가득한 눈빛으로 정천우의 눈을 마주 보면서 숨을 헐떡였다.

    “크흑! 으으윽!”

    반면, 정천우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복면인 대장의 롱 소드가 왼쪽 옆구리를 관통했다. 머리 위로 치켜든 역천검을 내려치기 직전에 롱 소드가 한발 먼저 꿰뚫어 버렸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고 이가 갈렸다. 입 밖으로 핏물이 기어 나오려고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쓰러졌겠지만 삶에 대한 애착은 끝까지 그의 정신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

    “멋진 승부였다. 잘 가라!”

    복면인 대장은 입술을 씰룩이며 롱 소드를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우둑!

    “어억! 이, 이게?”

    복면인 대장은 롱 소드를 비틀어 뽑으려다가 당혹성을 흘렸다. 롱 소드가 비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손목 관절이 나갔다.

    “으드득! 철포삼(鐵布杉)이라는 거다!”

    빠각!

    정천우가 씹어뱉듯이 말하며 역천검의 손잡이로 복면인 대장의 이마를 내려찍었다.

    대번에 이마가 함몰되며 복면인 대장이 롱 소드를 놓치고 비틀거렸다.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역천검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서걱!

    소름 끼치는 절단음과 함께 역천검이 복면인 대장의 턱 바로 밑에서부터 반대쪽 어깨까지 가르고 지나갔다.

    비틀거리던 복면인 대장의 머리가 뒤로 넘어가고 핏물이 솟구쳤다.

    “크아악! 더럽게 아파! 씨발! 니미럴! 젠장! 젠장!”

    정천우가 비명을 지르며 욕을 해 댔다.

    구명절초(求命絶超, 위기에서 목숨을 구하는 최후의 수법)!

    피부와 근육을 돌처럼 단단하게 단련하는 철포삼이라는 무공이 그가 가진 최후의 무기였다. 복부에 빈틈을 보여 상대로 하여금 찌르기 공격을 유도한 다음 철포삼으로 무기를 잡아 두는 수법.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은 정천우가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구명절초였다.

    “개자식! 그러게…… 으윽! 적당히 했으면 좋았잖아.”

    정천우는 바닥에 역천검을 떨어뜨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옆구리에 꽂힌 롱 소드의 날을 움켜잡았다.

    “침착해! 침착해!”

    오른손을 롱 소드의 손잡이에 가져다 댄 정천우가 고통을 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압!”

    정천우가 고통을 참아 가며 롱 소드를 잡고 몸에서 뽑아내기 시작했다.

    “으악! 제길! 제기랄! 더럽게 아파! 으으윽!”

    롱 소드의 검신이 빠져나간 자리가 더 벌어지지 못하도록 정천우가 내공을 모아 상처를 막았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고통에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롱 소드가 뽑혀 나가면서 살을 가르는 감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챙그랑! 터덩텅.

    완벽한 치료는 나중이었다.

    롱 소드를 뽑기가 무섭게 혈도를 점해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안 끝난 거냐!”

    정천우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아군이 죄다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나마 서 있는 아군이라고는 복면인 대장을 쫓아 나왔던 둘과 그란드뿐이었다.

    다행인 점은 복면인의 숫자도 겨우 셋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결코 안심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시체처럼…… 아니, 시체였던 복면인이 꿈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크하하하! 성공이다! 성공이야!”

    복면인 마법사가 희열에 가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복면인 마법사를 지키는 2명의 복면인 역시 긴장을 지우고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

    어둠의 권능으로 만들어지는 최강의 언데드.

    복면인들은 데스나이트의 탄생에 기뻐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이럴 수가! 설마설마했는데…… 이건 악몽이야!”

    그란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악의 가정이 현실화된 광경에 기가 막히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란드!”

    “예, 영주님!”

    보석이 박힌 화려한 세이버를 쥔 중년 사내의 부름에 그란드는 혼란에서 벗어나 크게 대답했다.

    “우리 팽가는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좌절하지 않는다! 팽가의 긍지를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영주님!”

    그란드는 영주의 말에 세이버를 다시 움켜쥐며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복면인 마법사가 나서서 오만하게 외쳤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이대로 떠나겠다. 어떤가, 팽선웅 백작!”

    쿵!

    “어림없는 소리! 팽가의 후예는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팽선웅 백작은 강하게 오른발로 땅을 밟으며 크게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정기가 가득했다. 과연 한 지역을 다스리는 패자(覇者)다운 모습이었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황제 폐하께서 금지한 데스나이트를 만들다니!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훗! 용서하고 말고는 그대의 권리가 아니다. 용서는 힘 있는 자의 특권이라는 걸 잊은 것인가?”

    복면의 마법사가 팽선웅 백작을 쳐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저놈을 먼저 해치워야 합니다. 이조장을 죽인 놈입니다.”

    방만한 자세로 서 있던 복면인 하나가 다가와 정천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썅! 왜 또 가만있는 날 건드리겠다는 거야!”

    정천우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복면인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복면인 대장을 해치웠겠다, 소환단 두 알이 고스란히 남았겠다, 일이 잘 풀리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또 꼬일 줄은 차마 몰랐다.

    ‘한 알 챙겼을 때 그냥 튈걸…….’

    정천우는 속으로 후회했다. 그놈의 욕심이 원수다. 한 알 챙긴 김에 하나 더 챙겨 보겠다고 껄떡대다가 완전히 일을 망쳐 버렸다.

    “큭! 저런 놈 따위야 데스나이트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рйёП…….”

    복면의 마법사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리며 주문을 외웠다.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정천우 따위는 우습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정천우는 다급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역천검을 주워 들었다.

    역천검을 쥐고 내공을 주입했지만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거리가 멀어 달려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달려든다고 해도 복면의 마법사를 호위하는 다른 두 놈에게 저지당할 게 뻔했다.

    “라이트닝(Lightning)!”

    정천우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기어코 마법이 발현되었다. 싯누런 빛이 정천우를 향해 들이쳤다.

    “으아아아!”

    정천우가 놀라 역천검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꽈릉! 파지지지직!

    “아아악! 아악! 아…… 아?”

    눈앞에서 빛이 터지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던 정천우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프지 않다!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역천검을 쳐다보았다. 누런 뇌전이 역천검을 휘감아 돌면서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검신의 중앙에는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룬어가 나타났다.

    번개의 군주.

    검신에 드러난 문자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여, 역천검!”

    상황을 지켜보던 팽선웅 백작이 경악한 얼굴로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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