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2화 (22/200)
  • # 22

    Chapter 7. 활약 (1)

    “ЭюбД…… 매직 라이트(Magic light)!

    기사와 함께 온 늙은 마법사가 손바닥을 펼치면서 시동어를 크게 외쳤다.

    지지징!

    시동어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기묘한 파공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목책 위에 밝힌 횃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밝은 빛이 저 멀리 허공에 생성되었다. 사람들은 라이트 마법의 빛 아래를 보고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세상에…….”

    “믿을 수 없어…….”

    흐릿하게 드러난 몬스터들의 숫자에 경비병들은 질린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겁먹지 마라! 우리에겐 마법사가 있다!”

    “ЙФбЭ…… 파이어(Fire)!”

    팽우룡이 독려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화염의 덩어리가 생성되어 날아갔다. 화염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은 유성을 연상시켰다.

    콰과광!

    파이어 마법에 오크 열댓 마리가 한꺼번에 통구이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 이길 수 있다!”

    “할 수 있어!”

    절묘한 타이밍에 발현된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경비대원들이 용기백배하여 소리쳤다.

    “모두 크로스보우를 조준하라! 몬스터가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쓰러뜨려야 한다. 발사!”

    경비대원과 병사들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팽우룡이 힘차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경비대와 병사들의 손에 쥐어진 크로스보우에서 연달아 파공음을 울리며 쿼렐이 날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법사 휠튼은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부으면서 마법을 날려 댔다.

    “쿼워어어억!”

    “꾸익! 돌격! 돌겨억! 인간들을 먹어! 고기가 우릴 기다린다!”

    트롤과 오크들이 눈을 붉게 물들이며 전진해 왔다.

    나름 머리를 쓸 줄 아는 오크들은 트롤을 방패 삼아 전진해 왔다. 빗발치는 쿼렐의 홍수 속에서도 오크들은 나름 안전했다.

    “트롤을 공격해! 트롤에게 사격을 집중하라!”

    팽우룡은 오크들의 잔머리에 이를 갈며 명령을 내렸다.

    “쿠훠억! 후워어어억!”

    일제 사격에 당한 트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쿼렐이 관절과 근육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대단한 회복력을 지니고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크들은 쿼렐을 뽑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고기방패를 버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길 선택했다.

    일사불란하게 쏘아 대는 쿼렐과 마법에 오크들이 계속 죽어 갔다. 수천 마리나 되어 보이는 몬스터였지만 경비병과 병사들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았다.

    “놈들은 멍청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멍청아! 잡소리하지 말고 쿼렐이나 장전해!”

    제럴드가 신이 나서 조잘대자 정천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천우의 손에도 크로스보우가 들려 있었다. 병사들이 나누어 준 무기였다. 낭인 생활을 하면서 활을 쏘아 본 가락이 있기에 잠깐 배우는 것만으로도 쉽게 쓸 수 있었다.

    “장전!”

    팽우룡의 구령에 따라 정천우와 제럴드가 몸을 일으키면서 허리춤에 달린 후크(Hook)로 활시위를 당긴 뒤 걸이쇠에 걸었다.

    확실히 크로스보우는 지금 상황에서 위력적인 무기가 틀림없었다.

    대부분의 몬스터가 오크와 고블린 같은 소형 몬스터였기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마법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기가 죽었을 것이다.

    “꾸익! 죽은 놈으로 막아라!”

    오크 중의 한 놈이 동료 오크의 시체를 들어 올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게 재앙의 시작이었다.

    “쏴라! 멈추지 마라!”

    팽우룡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몬스터들이 목책까지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주어야 하는데 뜻하지 않은 오크의 잔머리 때문에 일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휠튼 님!”

    다급한 마음에 팽우룡이 고개를 돌리며 크게 소리쳤다.

    “크윽! 무리일세! 마나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네.”

    “빌어먹을! 병사들은 수비에 집중하라! 끓는 기름을 가져오고 돌을 준비하라!”

    마법사 휠튼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자 팽우룡이 혀를 차고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꾸익! 돌격! 돌격!”

    동료의 시체를 머리에 이고 오크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냐! 꾸이익!”

    “그, 그건…….”

    목책 앞까지는 도착했으나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때, 오크들에게 돌과 끓는 기름이 쏟아졌다.

    투두둥! 촤아악!

    “뀌이익! 뜨거워! 뜨겁다!”

    목책 밑에 모여 있던 오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시체 방패도 소용없었다. 기름은 한 방울만 튀어도 심한 고통을 주었고, 무거운 돌이 떨어지면 시체와 함께 짓이겨지고 말았다.

    “뀌익! 도망쳐! 도망…….”

    맨 처음 잔머리를 굴렸던 오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뒤에 잔뜩 몰려 있어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쿠워억! 커컥!”

    “뀌이익! 꾸엑…….”

    목책 밑에서 우왕좌왕하던 오크와 고블린들은 위에서 쏟아지는 기름과 뒤에서 밀어붙이는 몬스터 때문에 속절없이 죽어 갔다.

    “목책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막아라! 창을 들어라!”

    팽우룡의 목소리가 몬스터의 비명을 뚫고 사람들에게 똑똑히 전해졌다.

    “창 들어! 뒈지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

    정천우가 제럴드를 향해 말하고는 크로스보우를 내려놓고 글레이브를 움켜잡았다.

    몬스터들이 동료의 시체를 발판 삼아 목책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시체의 계단을 밟고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벌써 시체 발판이 쌓이고 쌓여 트롤처럼 몸집 큰 몬스터는 목책에 손이 닿았다.

    “크워억!”

    서걱!

    트롤 하나가 목책을 붙들고 올라와 포효했다. 그러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정천우의 글레이브에 허무하게 목이 잘렸다.

    정천우는 낭인 시절 경험했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바깥을 향해 다가갔다.

    “씨발! 뭘 멍 때리고 있어! 올라오기 전에 창으로 내리찍어! 다 뒈질 거야? 조져!”

    정천우가 고함을 질렀다.

    목책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도끼로 장작 패듯 몬스터를 내리찍었다. 제럴드를 비롯한 경비대원들과 병사들이 그것을 보고 무작정 따라 하기 시작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무기를 붙들리면 망설이지 말고 손을 놓는다!”

    정천우의 말에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을 찍어 댔다.

    괴성을 지르며 올라오려고 기를 쓰는 오크의 가슴에 창날이 파고들었다가 피를 묻히며 빠져나왔다.

    “찔러! 무조건 찔러!”

    기사들까지 합세해서 목책을 넘으려는 몬스터들을 저지했다.

    몬스터를 죽이면 죽일수록 시체의 발판은 점차 높이를 더해 갔다. 못해도 2천 마리 이상 되어 보이는 수의 몬스터가 아직도 괴성을 지르면서 목책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아직 때가 아니다. 하북팽가 기사 놈들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대기한다. 알았나!”

    “예, 단장님.”

    목책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복면을 한 일단의 무리는 긴장한 눈빛으로 인간과 몬스터의 처절한 싸움을 수수방관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목책은 난리가 났다. 드디어 시체로 이루어진 발판이 한계까지 만들어졌다. 이제는 키가 작은 오크마저도 까치발을 하면 목책 내부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이다! 모두 서둘러라!”

    복면인들을 이끄는 대장이 나직하게 명령을 내리고서 몸을 날렸다.

    나머지 복면인들이 뒤따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몬스터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피해 외곽으로 이동했다.

    몬스터들이 불을 보고 달려들었기에 외곽은 어두우면서도 한산했다. 몬스터가 몰려들지 않으니 외곽 쪽의 병력도 거의 없었다.

    터걱!

    절벽과 이어진 목책의 밑에서 복면인 대장이 줄에 매달린 갈고리를 던졌다. 튼튼하게 걸렸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른 복면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인 대장은 줄을 잡으면서 걷듯이 목책을 타고 올라갔다. 4미터 높이의 목책쯤, 복면인 대장 정도의 실력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으헉! 웁…….”

    스걱!

    복면인 대장은 목책 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보며 헛바람을 집어 삼키는 병사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베었다.

    “휴우…….”

    당황한 병사가 아무 소리도 못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복면인 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에게 빨리 올라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복면인 대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눈치챈 사람은 없어 보였다.

    ***

    “지긋지긋한 돼지 새끼들!”

    정천우가 인상을 쓰면서 글레이브를 휘둘러 댔다.

    손아귀가 뻐근할 정도로 쉬지 않고 내리쳤다. 그런 탓에 그가 지키는 목책 밑에 시체가 제일 높이 쌓였다. 자연히 몬스터들이 높은 곳으로 몰려들었다.

    점점 더 버거워지는 느낌에 몸이 지쳐 가고 있었다.

    “지금이다! 횃불을 던져라!”

    팽우룡이 목구멍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병사들이 목책에 걸어 둔 횃불을 쳐 냈다.

    “크워억!”

    “꾸익! 꾸이익!”

    “뜨겁다! 뜨겁다!”

    계속해서 뿌려 댄 기름이 몬스터들의 시체와 버무려져 삽시간에 크게 번졌다.

    몬스터들은 발밑에서부터 불길이 솟아오르자 더욱 악착같이 목책에 기어오르려고 난리를 피워 댔다.

    “꺼져!”

    정천우가 몸에 불을 붙이고 목책을 넘으려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창대로 후려치며 소리쳤다. 몇 번 더 몬스터가 목책을 넘으려고 했지만 정천우의 공격에 맥없이 죽어 나갈 뿐이었다.

    “하아! 하아! 야, 이거 못할 짓이네.”

    정천우는 목책 너머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이 다 빠져서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너 아니었으면 뒈질 뻔했다.”

    제럴드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정천우의 곁에 철푸덕 앉았다.

    위태로워지면 정천우가 귀신같이 알아채고서 도와주었다. 만약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알았으면 잘 모셔, 인마! 잠깐! 불? 목책은?”

    정천우는 힘없이 웃었다가 놀란 얼굴로 소리 질렀다.

    나무로 만든 목책 밑에 불을 질렀으니 멀쩡할 리가 없다는 게 생각났다.

    “바보냐? 이건 아이언 우드(Iron wood)야. 불에 안 탄다.”

    “아이언 우드? 아! 몰라! 몰라! 안 타면 됐지, 뭐…… 응? 저건 또 뭐야?”

    정천우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제럴드에게 묻는 것도 귀찮아서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갸웃거렸다.

    “왜?”

    “저거 아까 그 자식들이랑 같은 놈들 아냐? 그란드 님, 저거 아까 그놈들 아닙니까?”

    “후욱, 훅…… 대체 뭘 보고…… 이런!”

    그란드는 정천우의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놀란 얼굴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짙은 회색의 가죽 갑옷을 입은 놈들이 연신 뒤를 살피며 영지 안쪽으로 가고 있었다. 숫자가 무려 20명이나 되었다.

    움직임이 가볍고 날랜 것이, 최소한 자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거라고 그란드는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하북팽가의 적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지금의 상황을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그란드는 힘든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한달음에 팽우룡에게 달려갔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팽우룡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정천우의 눈에 들어왔다.

    “젠장…… 재수 없으면 또 엮이겠는데?”

    “뭘 엮여?”

    제럴드가 훨훨 타오르는 불의 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을 즐기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꾸 날 쳐다보는 게 수상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제럴드는 만사가 다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장시간의 전투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제럴드뿐만이 아니다. 다른 경비대원들과 병사들도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장기전을 예상한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한 후유증이다.

    “염병! 좆같은 예감은 항상 잘 맞는다니까!”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란드의 모습을 본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천우 님, 도와주십시오.”

    “너무 지쳐 있어서 저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일에 끼어들 정도로 그는 오지랖이 넓지 않다.

    제럴드야 같이 사는 처지라 그놈의 손톱만 한 정 때문에 도와줬을 뿐이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정천우 님, 기사도를 발휘해 주십시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정천우는 거듭된 권유에도 거절의 뜻을 밝혔다. 기사도라는 게 뭔지 제럴드에게 대충 들었다.

    정천우가 생각하기에 기사도란……

    나서기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의 덜떨어진 생활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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