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1화 (21/200)
  • # 21

    Chapter 6. 몬스터 침공 (3)

    “숀! 백작님께 즉시 이 사실을 알리고 디바인 마크를 파괴하라 일러라! 서둘러! 발란 영지가 위험하다!”

    그란드가 황급히 소리치며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자 기사 하나가 목책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요란하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지 전체에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목책 입구에서 폭죽이 솟아오르더니 공중에서 펑 터져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붉은빛을 뿌렸다.

    “이게 대체 뭐야? 정신이 하나도 없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그란드가 떠나가자 정천우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이고는 제럴드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냐?”

    “오늘 인생 종 치는 줄 알았다. 이제 끝난 거겠지?”

    제럴드는 기운이 쪽 빠진 얼굴로 대검을 허리춤의 검대(검을 걸어 두는 고리)에 걸었다.

    “네가 있다는 말에 뭐 빠지게 뛰어왔다, 인마!”

    “고맙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도 같이 싸워야 했을 거야. 그래 봐야 칼질 몇 번 하다가 죽었겠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일단 들어가자! 어서!”

    제럴드는 정천우를 끌고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에 걸쇠를 단단히 채웠다.

    “상황 끝났는데 지금 뭐하냐?”

    “놈들이 아직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까 그놈들이 얼마나 무서웠는데!”

    제럴드는 질린 얼굴로 불안해했다.

    정천우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안심되지는 않았다. 더는 적이 없다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 숨죽이고 있을 작정이었다.

    쾅! 쾅! 쾅!

    “누, 누구야!”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럴드가 겁먹은 얼굴로 소리쳤다.

    “비상사태다! 모두 나와서 몬스터 침공에 대비하라! 소집에 불응하는 놈들은 참수한다!”

    죽인다는 소리에 제럴드가 바람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몬스터 침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 앞에서 끔찍한 전투가 벌어져 심장이 벌렁거렸던 제럴드다. 그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거 안 보여?”

    “아…….”

    제럴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징집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붉은색 폭죽이 터지면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하아…… 가겠습니다.”

    제럴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내로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집결 장소는 알고 있겠지?”

    “……네.”

    제럴드는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세상 다 살아 버린 노인의 얼굴을 한 제럴드는 벽에 걸린 창과 방패를 꺼내고 허리에는 세이버(Saber, 기병용 병기)를 착용했다.

    기사들이 사용하던 것과는 달리 칼날이 완만하게 휘어져 베기 공격에 최적화된 무기였다. 무공 수련은 무거운 검으로 하고 실전에는 무게가 덜한 세이버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같이 가자.”

    “넌 뭐하러 같이 가? 이 영지 사람도 아니면서 괜한 목숨 버리지 마라. 아까 도와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동 먹었다.”

    “오크 가죽도 가지러 가야 하고, 네놈을 혼자 보냈다가는 질질 짜다가 뒈질까 겁난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가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문고리를 잡는 제럴드가 위험해 보였다. 저런 상태로 싸움에 나섰다가는 죽기 딱 좋다.

    위험해지면 튀면 된다고 생각한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공짜로 싸워 주겠다는데 창 하나는 줘.”

    “창이 남아도는 줄 알아? 됐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

    제럴드는 정천우를 말렸다.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몬스터가 뭔지도 모르는 친구다. 발란 영지에 목숨을 바칠 의무도 없는 정천우에게 경비대의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린 것인데 정천우는 의외로 막무가내였다.

    “됐어! 가기로 했으면 가는 거야. 아!”

    정천우는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밖에 나가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간 정천우는 창날도 없는 창대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날은 고철로 팔아치우고, 자루만 남은 글레이브였다.

    “그거 가지고 뭐 하게? 몬스터들이 그런 걸로 죽을 것 같아?”

    “내가 너냐? 목책 초소에 글레이브 날이 있어. 일단 가자.”

    정천우는 제럴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목책 근처에는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목책 마을에 사는 경비병들이었다.

    “샘슨 아저씨!”

    정천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을 한쪽으로 세우는 샘슨을 불렀다.

    “살아 있었구나! 제럴드는?”

    “저기 뒤에 죽을상을 하고 있어요.”

    “자식, 명줄은 기네.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아! 왜 불렀어?”

    “아까 맡겨 둔 짐 좀 찾으려고요.”

    “지금 그런 거 찾을 때가 아니야. 몬스터가 몰려온다고.”

    샘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요. 날이 없잖아요. 제가 맡겨 둔 짐에 날이 있어요. 그것 좀 찾아서 끼워야 저도 싸우죠.”

    정천우가 창대를 보여 주면서 끝 부분을 가리켰다.

    “아! 그래, 이쪽으로 와!”

    샘슨은 정천우를 이끌고 목책의 정문 경비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꺼내 정천우에게 내밀었다.

    “이 열쇠로 옆에 창고 문을 열면 네 짐이 있다. 난 바빠서 나가 봐야 하니까 알아서 하고, 열쇠는 제자리에 갖다 놔!”

    “네, 아저씨.”

    정천우는 샘슨이 가르쳐 준 대로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잡동사니들만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배낭을 발견한 그는 거기서 창 자루가 잘린 글레이브를 집어 들었다.

    역천검으로 글레이브의 날을 고정하는 못을 빼내고 잘려 나간 창대를 뽑아냈다. 그러고는 제럴드의 창고에서 가져온 창 자루에 옮겨서 끼웠다.

    “난전엔 창이 낫지.”

    정천우는 역천검을 검집에 꽂아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글레이브는 창날만 60센티미터에 이른다. 거리를 두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역천검보다 훨씬 유리하다.

    정천우는 열쇠를 원래의 자리에 놔두고 제럴드를 찾았다.

    “저 자식, 아직도 얼빵하게 저러고 있네.”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럴드가 배치된 목책에 올라갔다.

    어차피 소속도 없는 그였기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영지민이 자발적으로 싸움에 나서는 경우도 흔했으니까.

    “제럴드! 안 어울리게 왜 이래?”

    정천우는 제럴드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인상을 썼다.

    그가 아는 제럴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상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기사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 처했던 탓에 의기소침해진 모양이었다.

    “내, 내가 뭘!”

    “몰라서 물어? 떨고 있잖아.”

    정천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러자 제럴드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손에 쥔 버디슈(Berdysh, 창 자루 끝에 도끼의 날을 단 무기)를 움켜쥐었다.

    “무서워서 그래. 몬스터와의 싸움은 처음이거든. 아까 기사들 싸움에 끼어든 것도 처음이야.”

    “뭐?”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제 자신이 오크를 잡아 왔을 때만 해도 노련한 척하면서 가죽 판 돈을 뜯어먹던 놈이다. 그런데 몬스터와 싸워 본 적이 없다니?

    “예전에 여기 목책으로 몬스터가 쳐들어온 적이 있다고 듣기만 했지, 내가 경비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그런 적이 없어. 어떡하지? 몬스터들이 밀려오면 우리 죽는 거 아냐?”

    빡!

    잔뜩 풀 죽은 얼굴로 두려움에 떠는 제럴드의 모습이 보기 싫어 정천우가 주먹을 쥐고 그의 가죽 투구를 때렸다.

    “아욱! 왜 때려!”

    갑작스러운 고통에 정신이 번쩍 난 제럴드가 인상을 구기면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가죽 투구 따위로는 정천우의 주먹이 주는 충격을 다 막아 낼 수 없었다.

    “사내새끼가 등신같이 왜 이래? 튼튼한 목책이 있잖아. 여기에 서서 기어오르는 몬스터들 대가리만 까부수면 끝이야! 뭐가 무서워? 그 지랄 하다가 끌려 내려가는 새끼 여럿 봤다. 정신 안 차려?”

    “네가 몰라서 그래, 인마! 몬스터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

    “이 자식, 완전히 정신줄 놨네? 어제 오크 세 마리 가죽 벗긴 돈으로 술 얻어 처먹은 새끼는 누구야? 오늘도 아홉 마리나 가죽 벗겨 왔거든?”

    “아…… 그랬지?”

    “아, 그랬지? 이 자식이 완전히 똥오줌 못 가리네? 너 죽지 않게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정신 좀 차리고 지금 상황이 뭔 일인지 설명 좀 해 봐.”

    정천우는 혼란 상태에 빠졌던 제럴드가 그나마 정신을 차리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분명히 자신도 듣긴 들었는데 솔직히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라는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아 디바인 마크라는 게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는 정천우로서는 위험한가 보다 하는 정도의 감흥이었다.

    “마교 놈들의 디바인 마크가 폭발했다잖아.”

    제럴드는 한숨을 내쉬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정천우는 마나 쉐도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그런 친구가 옆에서 지켜 주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게 뭔데?”

    “아! 넌 모르겠구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정천우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떠올린 제럴드는 설명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제 일을 떠올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샤칼 님이 한 얘기 중에서 마교라는 거 기억나?”

    “마교라면 잘 알고 있지.”

    “응? 그래? 아무튼 다른 영지들과 다르게 거기는 광신도 집단이야. 뭐, 지금은 서대륙으로 도망갔으니 상관은 없지만…….”

    “짧게 말해.”

    “새끼, 성질은…… 디바인 마크라는 건 종교 단체에서 쓰는 성표인데, 보통은 신성력(神聖力)을 담아. 그런데 마교의 디바인 마크는 마계의 기운을 담는 거야.”

    정천우가 생각하기에 불교에서 쓰는 만(卍) 자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걸 글씨로 쓴 게 아니라 나무나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라면 기운을 담을 수도 있다.

    “몬스터는 마계의 기운에 감염되어 생겨난 놈들이고, 마교의 디바인 마크가 폭발했으니까 미친 듯이 이곳으로 올 거야. 그놈들한테 여기는 고향 같은 느낌일 테니까. 나도 샘슨 씨한테 대충 들은 거라 더 이상은 잘 몰라.”

    제럴드는 이성을 되찾고 평소처럼 말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니 최소한 멍청하게 굴다가 뒈질 것 같지는 않아 정천우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기사들도 오는군. 응? 저 사람은?”

    “왜? 아! 마법사들이야. 다행이네. 마법 지원까지 해 주려나 봐.”

    늠름한 모습의 지원군을 확인한 경비병들이 환호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저들이 오기 전에 몬스터들이 쳐들어왔으면 경비대는 박살이 났을 것이다.

    “병사들과 자경대는 들어라!”

    말을 타고 나타난 기사 중에서 선두의 기사가 앞으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대단한 내공!’

    정천우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방금 소리친 기사를 쳐다보았다.

    하북팽가를 뜻하는 하얀 갑옷에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과 번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입을 꽉 다문 모습이 무척이나 강직해 보였으며 전체적으로 잘 발달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썬더(Thunder) 기사단의 팽우룡이다! 우리가 왔으니 안심하라! 너희는 각자 맡은 위치를 고수하면서 우리의 기사와 병사들을 도와라! 알겠나! 모두 목책 위에 불을 밝혀라!”

    팽우룡이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소리치자 먼저 목책 위에 올라 자리 잡은 경비대원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 뒤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5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목책에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움직임이 어찌나 신속한지 저 많은 병사들이 올라서는 데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평소의 훈련이 어떤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병사들이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한 뒤, 기사들이 병사들 사이에 한 명씩 섰다. 목책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아! 여기 계셨습니까?”

    “네, 저도 일단은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이니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정천우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 상대에게 공손히 대답해 주었다. 정천우와 제럴드가 지키는 곳에 배정된 기사는 그란드였다.

    “천우 님과 같은 분이 곁에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너무 띄워 주시면 곤란…… 오는 모양입니다.”

    대답하던 정천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칙칙한 살기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끈적끈적한 살기는 인간이 내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두 준비하라!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다!”

    목책의 방어를 책임진 팽우룡의 목소리가 목책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의 괴이하고도 흉포한 포효가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왔다.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