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0화 (20/200)
  • # 20

    Chapter 6. 몬스터 침공 (2)

    “네놈! 네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길동무로 삼을 테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름이 뭔데?”

    “내 이름은 장…… 에잇! 말할 수 없다!”

    복면인 대장은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려다가 아차 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비밀 임무 수행 중인 몸이건만 하마터면 어처구니없는 유도신문에 넘어갈 뻔했다.

    복면인 대장은 정천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롱 소드의 손잡이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한심한 새끼! 이름도 밝힐 수 없는 주제에 뭘 잘났다고 지랄이야!”

    정천우는 비웃음을 가득 담아 약을 올렸다.

    굳이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등에 제법 깊은 상처를 만들어 주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눈앞의 복면인 대장이다.

    “와라! 죽여 주겠다!”

    “싫어, 인마! 아까 그 새끼도 그러더니, 똑같은 새끼네? 됐고! 아쉬운 놈이 와!”

    “이이이…….”

    복면인 대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먼저 속이 뒤집혀 죽을 것 같았다.

    “망할 자식아!”

    복면인 대장은 눈이 뒤집힌 채 정천우에게 욕을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롱 소드에는 푸른빛과 함께 붉은빛이 한데 뒤섞인 검기가 흐르고 있었다.

    “돌았군.”

    정천우는 복면인 대장의 반응에 바짝 긴장했다.

    안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이성을 잃고 선천지기(강호에서 말하는 생명의 근원)까지 끌어다 쓰는 모양이었다.

    선천지기와 맞부딪치는 건 위험한 짓이다. 생명을 버리면서 쓰는 것인 만큼 지속시간이 극히 짧지만 대신 경지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발휘하니까.

    “덤벼! 도망가지 말란 말이다! 으아아아!”

    복면인 대장은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로 롱 소드를 마구 휘둘렀다.

    생명력을 폭발시키기 전까지야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정천우는 그저 피하기 바빴다.

    보법을 사용해 복면인 대장의 사각지대로 교묘하게 몸을 빼내며 강력한 공격을 무산시켰다. 이대로 선천지기가 소진될 때까지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쿨럭! 쿨럭! 덤벼! 덤벼라! 제발…….”

    복면인 대장은 아예 애원하는 얼굴로 정천우를 향해 소리쳤다.

    “지겨운 놈! 좋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정천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 역천검을 두 손으로 잡고서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일검필살(一劍必殺).

    상단 자세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피하지 않고 응수하겠다는 무언의 승낙이다.

    “망할 자식! 기사로 죽게 해 줘서 고맙다!”

    복면인 대장은 롱 소드를 들어 올리며 나지막하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오직 한 번!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생명력이 다 소진되어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번 공격을 펼치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모조리 피를 토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하다.

    “우웁!”

    복면인 대장은 목구멍을 타고 치솟는 핏물을 애써 삼키며 마나를 쥐어짰다.

    롱 소드에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뒤덮인 마나 쉐도우가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듯 영롱한 빛이었다.

    복면인 대장이 황홀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코앞에까지 다가왔지만 후회는 없다. 생의 마지막을 한 자루의 검에 맡기고 기사로 죽을 수 있다면 그간의 삶이 덧없지만은 않았다.

    파박!

    복면인 대장은 힘차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날아갔다. 몸이 부서져 내리는 고통이 덮쳐 왔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주군을 위해!’

    복면인 대장이 롱 소드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사선으로 베어 갔다.

    장장 30년을 넘게 수련해 온 대각선 베기다. 최후의 순간에 펼칠 검식이 이렇게나 무미건조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 일격은 그에게 생소한 감각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아아! 부질없구나! 나는 멍청했다! 너무나 멍청했구나!’

    투구와 천으로 가려진 복면인 대장의 얼굴에 한 가닥 환희가 차올랐다.

    위력적인 검술.

    완전무결한 검식.

    이제껏 그것만을 목표로 검(劍)을 수련해 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펼치는 검술은 겨우 단 한 번의 사선 베기였다. 검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간결한 동작.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다 느껴졌다.

    멀리서 힘겹게 기합을 지르며 싸우는 자신의 부하, 자신의 앞에서 기세를 끌어올리며 마나를 잔뜩 응축하는 이름 모를 사냥꾼.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베어 가는 자신의 롱 소드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궤적.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어나며 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복면인은 롱 소드를 그어 내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다만…… 후회가 남았다. 마지막 순간에 상대를 믿었다는 후회가.

    쩌겅!

    “네 녀석은 정말…… 쿨럭, 그루룩…….”

    “생각해 보니까 내가 손해 같아서 말이지. 그냥 편히 가라.”

    정천우가 이죽거리며 복면인 대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복면인 대장은 땅바닥에 롱 소드의 날을 반이나 파묻은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만큼 전신의 힘이 하나로 집중된 일격이었다.

    ‘무식한 새끼.’

    정천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해 보이지만 사실 정천우는 속으로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웬만하면 한 번쯤 검을 맞대고 정면 대결을 해 주려고 했다.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을 흘려 대는데 안쓰러워 보여서라도 마지막 한 번은 맞부딪치려고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내가 뒈질 뻔했어. 덤벼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 공격은 여기 있는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정천우는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복면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마지막 공격은 이류 무사를 넘어 거의 일류의 경지에 든 무인들이나 보일 수 있는 위력이었다. 삼류에 머물러 있는 정천우가 대적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공격이었다.

    “그런…… 거였나?”

    “맞아, 최고의 위력이었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복면인 대장에게 정천우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복면인 대장은 급격히 생기를 잃어 가는 눈으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고, 고맙…….”

    복면인 대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눈을 감았다. 적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최고의 찬사다.

    “뻥인데.”

    “너 이 새끼, 마지막까지…….”

    복면인 대장은 끝까지 복장을 뒤집어 놓는 정천우의 말에 한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자식들, 아직도 쩔쩔매고 있…… 끝났군.”

    정천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치열한 전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하얀 흉갑 위에 샤벨타이거를 그려 넣은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수십 명이나 뛰어드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쯤 되면 전투는 완전히 정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새롭게 증원된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펄펄 날아다녔다.

    “강하잖아?”

    정천우는 이제 막 합류한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독스럽게도 무식한 검술이었다.

    아니, 검술은 아니다.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검이 아니라 도(刀)였다.

    강호의 무인들이 흔히 쓰는 환수도(環首刀,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리고 칼날이 일직선인 형태의 도)와 비슷한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묵직해 보이는 것이, 하북팽가의 무공과 상당히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전장이 대충 정리되자 하북팽가의 기사 중 하나가 정천우에게 다가왔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그란드 팽’입니다. 하북팽가 라이온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편하게 그란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정천우가 처음 싸움이 벌어진 곳에 도착했을 당시 전장을 감독하던 기사가 바로 그란드였다.

    “정천우라고 합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곤륜파와…….”

    그란드는 이름을 듣자마자 안색을 굳히면서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벽력대제 팽진옥의 후예를 자처하는 문파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성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중원식으로 짓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경외심 같은 것이라 일반인들은 3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전통적인 이름을 짓는다.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에 모여 살아서 다들 이름을 편하게 지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정천우는 이름 때문에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한차례 경험했기에 곧바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셨군요. 덕분에 부하들이 쉽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거듭 감사합…… 잠시 검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란드는 정천우의 손에 들린 역천검을 발견하고는 정중한 얼굴로 요구했다.

    그 또한 기사였기에 검을 다루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검을 맡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진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정천우는 그란드의 우려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역천검을 내밀었다. 그에게 있어 병기라는 건 살인 도구에 불과한 정도의 의미일 뿐이니까.

    그란드는 품에서 헝겊을 꺼내 역천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자세히 관찰했다.

    지직! 탱그랑!

    “크윽! 마법이 걸린 검인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그란드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역천검을 집어 칼자루 쪽을 정천우에게 내밀었다.

    “마법? 전 이런 경우를 처음 봅니다만…….”

    “재질이 좋아 보여서 검에 마나를 집어넣었더니 감전되었습니다. 주인 인식 마법이 걸린 검의 특징입니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역천검을 받아 검집에 넣으면서 가볍게 웃어 주었다.

    마법에 걸린 검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란드가 부러워하는 걸 보니 최소한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단장님! 단장님!”

    “숀, 무슨 일인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란드는 안색을 바꾸며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와 그란드의 앞에 섰다.

    “놈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숀은 정천우의 눈치를 보며 얼굴에 난색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릴 수 없는 이야기라는 의미다. 난감해하는 숀의 표정을 본 정천우는 자신이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 싶어서 몸을 돌렸다.

    “상관없으니 말하게. 이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놈들을 놓치고 우리가 당했을 게 아닌가! 은인이란 말일세!”

    정천우가 가려는 기색이 보이자 그란드가 재빨리 숀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란드는 정천우를 하북팽가에 영입할 작정이었다. 실력은 확실하고, 무기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산속에서 살았기에 어느 문파의 소속도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신분만 확실하다면 하북팽가에서도 틀림없이 정천우를 환영하여 ‘팽(彭)’씨 성을 주고 싶어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흐뭇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 숀의 입에서 의아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놈들이 낮에 침입해서는 영지에 디바인 마크를 심어 두었다고 합니다.”

    “디바인 마크?”

    디바인 마크라는 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믿음의 증표로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다. 큰일 날 물건일 턱이 없고, 때문에 그란드는 숀이 다급해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란드의 머릿속에 찬물이 끼얹혔다.

    “그것이, 마교의 다바인 마크라고 합니다.”

    “뭣이! 그게 정말인가?”

    그란드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워했다.

    정천우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교라는 이름만으로도 살이 떨렸다. 마교가 중원도 아닌 이곳에서까지 악명을 떨치다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둠의 기운을 품고 있기에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거라고 합니다.”

    “어디냐! 어디에 그 망할 디바인 마크를 숨겼다고 했는가!”

    우우우웅…….

    다급한 얼굴로 숀을 다그치던 그란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북팽가의 성 부근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틀림없는 어둠의 기운이었다.

    “마기(魔氣)!”

    정천우는 황당한 상황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마교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음습한 느낌의 내공이 틀림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