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화 (19/200)
  • # 19

    Chapter 6. 몬스터 침공 (1)

    정천우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왼손 검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이, 이! 망할 자식!”

    복면인이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정규기사도 아닌 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슴에 품은 마나를 끌어올려 롱 소드에 잔뜩 밀어 넣었다. 롱 소드가 마나를 받아들이면서 흐릿하게 빛이 났다.

    “모가지를 따 주마!”

    롱 소드에 맺힌 날카로운 기운을 한차례 감상하던 복면인이 씹어 뱉듯이 말하고는 자세를 잡아갔다.

    서늘한 기운을 담은 롱 소드가 자신을 겨누자 정천우 역시 역천검을 가슴 앞으로 가져와 태세를 갖추었다. 다분히 방어적인 자세였다.

    카강, 캉, 카가강!

    복면인의 롱 소드와 역천검이 어우러지면서 거친 쇳소리와 불꽃이 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움직임인데…….’

    전신을 노리고 휘몰아치는 롱 소드를 막으면서 정천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예전에 경험했던 느낌의 무공이었다.

    복면인의 거친 말과 달리 롱 소드의 움직임은 유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무당파?”

    “어엇! 허, 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무당파라는 말이냐!”

    복면인은 갑작스러운 정천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호흡이 흐트러져 당혹성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소청검법 같은데?”

    정천우가 허둥대는 복면인의 롱 소드를 걷어 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중원에 있을 당시, 동료 낭인들 중 하나가 소청검법을 배워서 썼다. 죽어 가는 무당파 사람을 구해 주고 한두 수 얻어 배운 정도였다.

    복면인의 움직임에서 동료 낭인이 즐겨 사용하던 익숙한 동작이 눈에 띄었다.

    “이이익! 살려 둘 수 없다!”

    복면인은 시뻘게진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언젠 살려 주려고 했어?”

    정천우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을 부딪쳐 보고 나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검기를 생성해 내는 능력에 비해서 상대의 무공이 너무 약하다. 선명한 검기(劍氣)를 사용하는 것에 놀라 지나치게 상대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샤칼이 주먹에 바람의 정령을 사용해 권기처럼 보이게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다지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정천우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이야압!”

    이제껏 방어적으로 대처하던 정천우가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복면인은 정천우가 다가오기 전부터 심장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고 롱 소드를 들어 올려 사량발천근의 수법을 준비했다.

    쾅!

    “커헉! 우웁…….”

    복면인은 정천우의 역천검을 받아 내는 순간, 손을 타고 전해지는 뇌전의 기운에 괴로워했다.

    “이 자식, 완전히 허당이잖아?”

    정천우는 의외라는 얼굴로 자신의 손에 쥔 역천검과 괴로워하는 복면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복면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이번 공격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다. 한 번의 공격도 막지 못하는 놈이 이류 무인의 기운을 품고 있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모욕하지 마라! 기사는 모욕을 참지 않는다!”

    “그런 건 복면이나 벗고서 지껄이라고 했지? 그리고 말이다, 좆도 실력 없을 땐…… 무조건 참아, 새끼야!”

    정천우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21년의 내공을 모조리 담아 역천검으로 상대를 내리찍었다. 장작을 패는 듯 무식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전륜도법상의 초식이다.

    오호단문도는 아직 수련이 깊지 않아 기의 운용이 어색했다. 실전에선 어설픈 고급 수법보다 몸에 익은 삼류 무공이 더 유리하다.

    콰앙! 캉! 카강!

    “이런 무식한! 이얍! 으윽! 크아악!”

    역천검의 공격을 막는 복면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기합이 점차 비명으로 변해 갔다.

    우두둑!

    “커윽! 내, 내가 졌다!”

    복면인은 정천우의 검격에 팔꿈치가 탈골되어 롱 소드를 놓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스걱!

    정천우는 패배를 인정한 복면인의 목을 단번에 날려 주었다.

    “젠장! 아직도 헤매고 자빠졌네!”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피던 정천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한 명을 해치웠는데도 아직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러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복면인들이 제럴드가 포함된 무리에 뛰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애써 구해 주러 온 의미가 없다.

    그를 위해 목숨을 걸 만큼의 의리는 없지만 구할 수 있다면 구해 주고 싶었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샤벨타이거가 그려진 하얀 흉갑을 입은 하북팽가의 기사가 상대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오늘로 하북팽가는 끝장이다!”

    복면인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하북팽가의 기사를 비웃었다.

    “전력을 다해 하북팽가의 얼간이들을 해치운다! 모두…… 어억!”

    투지를 불태우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복면인 대장이 갑자기 앓는 소리를 냈다.

    “나와라!”

    복면인 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가죽 갑옷을 뚫고 드로잉 나이프가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아까 비겁한 짓을 하던 그놈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이런 공격이 다시 이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부하가 당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말이다.

    드로잉 나이프를 뽑아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지는데 또다시 파공음이 일어났다. 복면인 대장은 당황하지 않고 롱소드를 들었다.

    쉬익! 투캉!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두 번이나 당할 줄 아느냐!”

    복면인 대장이 드로잉 나이프를 쳐 내면서 이를 갈았다. 숨어서 암습이나 해 대는 놈의 얼굴이 궁금했다.

    “아깝네, 구멍 하나 더 뚫어 놓을 수 있었는데.”

    정천우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적의 적이면 한편부터 먹고 봐야죠!”

    하북팽가의 기사가 호기심을 드러내고 물었으나 정천우는 드로잉 나이프를 한 자루 더 꺼내면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하북팽가의 무인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인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으니 일단은 아군이다.

    “받아라!”

    정천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드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공력을 모두 담아 던졌기에 무시 못 할 파공성을 일으키며 복면인 대장을 향해 날아갔다.

    “큭! 무슨 놈의 드로잉 나이프가 이런 위력…… 흐억!”

    드로잉 나이프를 퉁겨내면서 툴툴대던 복면인 대장이 깜짝 놀랐다. 다급한 얼굴로 서둘러 싸울 자세를 잡았다.

    상당한 거리를 벌리고 있던 정천우가 블링크 마법을 쓴 것처럼 코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카강! 캉!

    “꽤 하잖아?”

    정천우는 공격이 가로막히자 뒤로 물러나면서 칭찬하듯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싸웠던 복면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음에도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 다른 어정쩡한 놈들보다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이익! 언제까지 날 기만할 셈인가!”

    복면인 대장이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싸울 듯이 들어와서는 곧바로 몸을 빼내는 정천우의 움직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을 빼내 도망쳤다.

    이건 싸우자는 건지 자신을 농락하자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농락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하북팽가를 돕긴 하겠는데, 목숨까지 걸고 싶진 않아서 그래.”

    정천우는 복면인 대장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이번 싸움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복면인들이 도주해도 굳이 뒤를 쫓을 생각은 없다. 단지 제럴드를 구하는 게 목적일 뿐이다.

    “……그 입을 찢어 놓겠다!”

    정천우의 말이 하도 기가 막히다 보니 복면인 대장의 눈에서 살기가 증폭되었다. 어쩌면 말을 해도 저렇게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지, 그로서는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매섭게 눈을 치켜뜨면서 전신에 흐르는 마나를 롱 소드에 퍼부었다.

    다른 복면인보다 더욱 선명한 검기가 롱 소드에 맺혔다. 복면인 대장이 롱 소드를 앞세우며 땅을 박찼다.

    “자식이 사람을 아주 물로 보네!”

    정천우는 허리춤에서 드로잉 나이프를 꺼내 암기 투척술의 원리를 담아 집어 던졌다.

    정면 대결 따윈 눈곱만큼도 할 생각 없었다.

    “치졸한 짓!”

    복면인 대장이 분노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드로잉 나이프를 쳐 냈다. 그러면서도 달려오는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평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정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역천검을 들어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롱 소드를 퉁겨 냈다.

    하지만 복면인 대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상체를 바로잡으면서 우직하게 수직베기로 응수해 왔다.

    “눌러 죽인다!”

    복면인 대장은 자신의 공격을 힘으로 받아 내는 정천우를 향해 씹어 뱉듯이 말했다.

    몸속의 마나를 총동원해 롱 소드에 집어넣었다. 가죽 갑옷이 터질 듯이 근육을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모든 힘을 다해 힘껏 내리눌렀다.

    순간, 정천우의 입매가 뒤틀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퍽!

    “큭! 이익! 끝까지 지저분한 놈이구나!”

    난데없는 통증에 복면인 대장이 롱 소드로 정천우를 밀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가기 직전, 정천우가 복면인 대장의 발등을 밟아 버렸다.

    강호에서야 흔하디흔한 잡스러운 기술에 불과한 일이다. 그러나 복면인 대장은 처음 당해 보는 것인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놈이네?”

    정천우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히죽 웃어 주고는 복면인 대장의 눈을 쏘아보았다.

    복면인 대장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목책 부근을 지키는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15명.

    자신들의 목적은 이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목책에 줄사다리를 걸치고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예기치 못하게 발각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빌어먹을 자식!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났지? 더 시간을 끌면 위험한데…….’

    복면인 대장의 눈에 난처한 기색이 드러났다.

    만에 하나 목책을 지키는 하북팽가의 기사들과 싸운다 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만한 전력을 꾸렸는데 막판에 꼬였다.

    모두가 눈앞에서 뺀질거리는 저 되바라진 놈 하나 때문이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

    복면인의 대장은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북팽가의 기사도 아닌 놈이 자신과 대등한 싸움을 벌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비록 지저분한 짓거리를 해 대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나? 사냥꾼!”

    “가증스러운 놈! 네놈은 전혀 진지하지 않구나!”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나만큼 진지하게 사는 놈도 드물어. 내가 8년째 칼밥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살아 있는지 알아?”

    정천우는 방만했던 자세를 바로하며 인상을 굳혔다.

    “뭐냐!”

    “안 가르쳐 줄래. 그냥 궁금하다 뒈져 버려!”

    “개자식! 이야아아아!”

    짜증이 치밀어 오른 복면인 대장이 악에 받친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정천우가 복면인의 롱 소드를 역천검으로 받아 내고는 상체를 비틀면서 회피했다. 공격을 받아 내려면 하체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야 하는데 옆으로 스르륵 빠져나간 것이다.

    “어억!”

    복면인 대장은 허탈한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맞대응할 줄 알았던 정천우의 역천검에는 아무런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휘두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복면인 대장의 롱 소드가 땅바닥에 틀어박혔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화끈한 통증이 등에서 느껴졌다.

    츠가각!

    “끄, 끝까지…….”

    복면인 대장이 옆으로 몸을 날려 정천우의 후속 공격을 경계하며 중얼거렸다.

    밖에 드러난 두 눈에는 억울함과 허탈함,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정면 대결을 할 듯하다가 몸을 피하는 경우는 처음 당해 보았다.

    “이야, 그런 도발에 이렇게 달려들 줄은 몰랐어. 더럽게 단순한 놈이구나?”

    정천우는 역천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비웃었다.

    사실 강호에서라면 도발 축에도 끼지 못하는 말장난이었다. 상대의 심리를 뒤흔들어야 싸움에서 유리하기에 시도했던 건데 이건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으으윽! 비겁하고 야비한 자식!”

    복면인 대장은 정천우를 노려보며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멀리서 어지럽게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하북팽가의 정예기사들이 몰려오는 게 분명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절로 이가 갈리고 화가 치솟았다. 얼굴에서 당황한 빛이 사라지고 비장한 기운이 대신 자리 잡았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임무는 완수했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한 놈이라도 더 죽음의 강을 건널 길동무로 삼아라!”

    복면인 대장이 전장을 훑어보며 비통한 목소리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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