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8화 (18/200)
  • # 18

    Chapter 5. 복면이라면 지긋지긋해! (5)

    ***

    “꾸익! 죽여! 한꺼번에 덮쳐!”

    방패까지 착용한 오크가 분노한 얼굴로 괴성을 질렀다.

    오크 조장쯤 되는 모양이었다. 다른 오크와 구별되는 건 한쪽 팔에 쟁반만 한 크기의 작은 방패를 차고 있다는 정도다.

    “차아!”

    정천우가 역천검을 힘차게 들어 올리면서 기합을 질렀다.

    스가각!

    “꾸룩, 그르륵…….”

    글레이브를 휘두르려던 오크가 창대와 함께 사타구니에서부터 턱 밑에까지 단번에 갈라졌다. 피와 내장이 쏟아져 바닥을 더럽혔다.

    오크 한 마리를 해치우자마자 정천우가 신법을 발휘해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쿠웅!

    곧바로 무식하게 생긴 녹슨 모닝스타가 정천우가 있던 자리에 둔중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뻑!

    “뀌이익!”

    공중제비를 돌면서 뻗은 발차기에 맞아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쩌걱!

    괴로워하는 오크의 관자놀이에 역천검이 파고들었다.

    두개골에 검날이 절반이나 파고들었다. 흔들거리던 오크가 맥없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등골을 저릿하게 할 정도의 살기를 감지한 순간, 정천우의 몸이 푹 가라앉았다.

    오크 조장이 갈고리를 휘둘러 오고 있었다. 주저앉았던 정천우의 몸이 회전하면서 일어났다.

    드드득! 파바박!

    역천검이 바닥을 긁으면서 대각선으로 솟구쳤다.

    “크롹! 치사한 인간! 덮쳐! 덮쳐!”

    방패를 들어 흙과 돌멩이가 튀어나오는 걸 막았지만 늦어 버리고 말았다. 눈에 흙이 들어간 오크 조장이 괴성을 지르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쯔걱!

    “쿠룩! 치사한…….”

    눈에 들어간 흙 때문에 마구 갈고리를 휘두르던 오크 조장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투덜거렸다.

    “바빠서 그래.”

    가슴에 역천검을 꽂아 넣은 정천우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역천검을 비틀어 상처를 벌렸다. 뜨거운 피가 꿀렁꿀렁 새어 나와 역천검의 검날을 타고 흘렀다.

    정천우는 발을 들어 오크 조장의 가슴팍을 걷어차 역천검을 뽑아냈다.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수평으로 길게 베었다.

    슈각!

    녹슨 검으로 정천우의 등을 노리던 마지막 오크가 허무하게 목을 잃었다.

    “후와! 지친다, 지쳐!”

    정천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돼지 새끼들도 모이니까 아주 징그럽네!”

    쓰러진 오크들의 시체를 둘러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그마치 아홉 마리다.

    여섯 마리만 해치우면 나머지 셋과는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결정을 내린 순간, 기척을 죽이면서 오크 무리에 다가갔다.

    다섯 마리는 드로잉 나이프로 머리를 노려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운 나쁘게 드로잉 나이프 하나가 가로막혔다. 오크 조장이 부하가 죽는 것을 보고 방패를 들어 드로잉 나이프를 막은 탓이다.

    “마을에 들어가거든 드로잉 나이프를 좀 더 사 둬야겠어.”

    입맛을 쓰게 다시며 정천우가 중얼거렸다.

    드로잉 나이프가 넉넉했다면 굳이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간단히 해치웠을 것이다. 설마 오크가 이렇게나 많이 뭉쳐서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숨이 가라앉자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전륜공을 운용했다. 빨리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고 오크의 가죽을 벗겨 내야 한다.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가 다가오기 전에.

    “이상한데?”

    예상보다 사냥이 빨리 끝난 덕분에 일찍 복귀하던 정천우는 목책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나치게 목책 부근이 밝다. 그리고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천을 꺼내 오크에게서 얻은 모닝스타의 헤드 부분에 두툼하게 묶었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고 목책에 다가갔다.

    “저 왔습니다!”

    “알아! 알아! 빨리 들어와!”

    정천우가 소리치기 무섭게 목책의 문이 열리면서 경비병이 머리를 빼꼼 내밀고 손짓해 왔다.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으로 보아 뭔가 문제가 터져도 단단히 터진 것 같았다.

    정천우는 불안해하는 경비병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재빨리 목책 안으로 스며들듯이 들어갔다.

    “샘슨 아저씨, 왜 이렇게 어수선해요? 무슨 일 생겼습니까?”

    정천우는 용케 경비병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는 이유를 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안으로 들어와서 난리를 피우고 있어. 밖에도 놈들이 와 있을지 몰라.”

    “흠, 그래서 불안해하셨군요.”

    정천우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들어왔다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을 접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샘슨의 말 때문이었다.

    “제럴드가 걱정돼 죽겠어.”

    “제럴드가 왜요?”

    정천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쪽 세상으로 와서 처음 사귄 친구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걱정됐다.

    “정체불명의 적들이 지금 그 부근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거든. 우리 같은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투르카가 저 꼴이 되었어.”

    샘슨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목이 잘린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정천우는 시체에 다가가 절단면을 살폈다. 목이 아주 깔끔하게 절단돼 있었다. 그것도 지나칠 만큼.

    이건 무기의 예리함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뼈가 잘린 형태로 보아 검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어이없이 죽었어. 장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정천우는 고개를 돌려 목책 마을을 쳐다보았다.

    “제럴드…….”

    목책 마을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고함과 무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들려올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뭐 하려고 그래!”

    “가 봐야죠. 저런 놈들이라면 제럴드는 눈에 띄는 순간 죽습니다. 이것 좀 맡아 주십시오.”

    정천우는 배낭과 사냥을 통해 얻은 부산물을 내려놓으면서 드로잉 나이프를 뽑았다.

    “위험해!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갔으니 기다려! 그저 무사하길 바라는 게 나아!”

    샘슨이 정천우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러나 정천우는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가지…… 빠, 빠르다!”

    샘슨은 경공을 발휘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정천우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기사쯤은 돼야 가능한 움직임을 정천우가 보이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정천우는 살기를 억누르면서 속도를 줄였다.

    정면으로 싸우는 건 위험하다. 이 세계의 무인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정면 대결은 너무 무모하다. 그러니 암습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암기는 하나씩!

    여러 개를 한꺼번에 던지기에는 드로잉 나이프가 부족하다. 암기 하나에 제대로 내공을 담아 일격필살을 노리는 편이 낫다.

    소리가 나지 않게 뒤꿈치를 들고 경신술을 사용해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젠장! 하필이면!’

    정천우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짜증 나게도 제럴드의 집 근처에서 싸워 대고 있었다.

    누가 적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낮에 지붕 뛰어 다니던 놈들이잖아? 왜 나쁜 새끼들은 항상 복면을 쓰는 건데?’

    드로잉 나이프에 내공을 주입하면서 상황을 살폈다.

    나름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살펴보던 정천우는 무인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조금 더 실력이 좋아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중원으로 치면 삼류와 이류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류 무인의 경지쯤 되는 것 같았다.

    아군을 도와준다면 자신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해볼 만하겠어.’

    정천우는 아직 제럴드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한시름 덜었다.

    녀석은 한쪽 구석에서 방어만 하고 있었다. 한데 뭉쳐 있는 집단에 속해 적을 견제하는 역할이었다. 나름 안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적이 난입한다면 한순간에 쓸려 나갈 게 분명했다.

    눈앞에서 칼날이 휙휙 지나가는 광경에 제럴드는 바짝 얼어 있었다.

    “천우! 구해 줘!”

    실력자인 정천우를 때마침 발견한 그가 크게 소리쳤다.

    ‘저 멍청한 자식!’

    정천우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적의 눈에 띄는 행동은 주의를 끈다. 자신을 부르는 바람에 제럴드가 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증원이 오기 전에 서둘러라!”

    복면인들 중의 하나가 제럴드의 고함을 듣고서 크게 소리쳤다. 정천우의 접근을 확인한 것이다.

    어차피 발각된 마당에 암습은 물 건너갔다. 드로잉 나이프를 손에 쥔 정천우가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제럴드에게 관심 두지 못하게 주의를 끌어야 한다. 운이 좋으면 하북팽가의 기사가 유리해질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쉬이익!

    파각!

    “크악! 조심해! 저놈이 뭔가를 쐈다!”

    드로잉 나이프에 얻어맞은 기사가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며 경고성을 날렸다.

    가죽 갑옷에 드로잉 나이프가 절반이나 틀어박혔다. 투구 위로 천을 두르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순 없었지만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에 고통의 빛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좋아! 효과가 있어!’

    정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드로잉 나이프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튼튼해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어 효과가 있을지 걱정했는데 자신감을 얻었다.

    ‘치명상까지도 필요 없어! 상처만 입히면 돼!’

    정천우는 하북팽가의 기사를 믿고 지원만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도와주면 충분히 승부의 추가 기울 테니까 말이다.

    눈매를 좁히며 내공을 끌어모은 정천우의 손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피융! 태앵!

    “저놈을 먼저 처리하라!”

    정천우의 드로잉 나이프를 쳐 낸 복면인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제기랄! 이건 좀 아니잖아! 아직 하나도 처리 못 했는데!’

    정천우가 급하게 역천검을 뽑아 들었다.

    복면인이 전장을 이탈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대담하게도 혼자라는 점이다. 하기야, 숫자가 비등했으니 한 명을 빼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웠을 게 틀림없다.

    “죽어랏!”

    복면인은 달려드는 힘을 이용해 롱 소드를 세차게 휘둘렀다. 정천우의 기세가 변변치 않은 것을 느끼고 단숨에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역천검이 머리를 노리고 사선으로 베어 오는 복면인의 롱 소드를 받아 냈다. 정천우는 롱 소드와 역천검이 부딪치는 순간에 무릎을 굽히면서 충격을 줄였다.

    팔에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

    확실히 삼류의 수준은 뛰어넘은 무인이었다.

    그러나 정천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삼류의 경지에 접어들었고 스물세 살인 지금은 삼류 무인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다. 실전 경험만큼은 이류가 아니라 일류라도 무시 못 할 만큼 쌓아 뒀다.

    이류라 해도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놈에게 당한대서야 억울해서라도 얌전히 저세상 못 갈 판이었다.

    “차잇!”

    자세를 낮추면서 롱 소드를 막아 낸 정천우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기합을 내질렀다.

    퍼걱!

    “으허헛!”

    복면인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정천우가 롱 소드를 엉뚱한 방향으로 밀어내며 박치기로 복면인의 배를 들이받은 것이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박치기에도 내공이 담겨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복면인은 배를 쓰다듬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투구도 쓰지 않은 채 박치기를 해 대는 놈은 처음 보았다. 애초에 박치기를 해 올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않은 탓에 충격은 더 컸다. 내장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덤벼라!”

    복면인이 애써 아픔을 참으며 롱 소드를 겨누고 소리쳤다.

    “싫은데?”

    “뭐?”

    정천우의 황당한 대답에 복면인은 일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장난인가 싶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정천우는 복면인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투구 밖으로 드러난 복면인의 두 눈에 짜증이 묻어났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것인가!”

    “아니.”

    정천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구태여 아등바등 싸울 이유가 없다. 자신이 한 놈을 상대하는 만큼 하북팽가의 부담이 줄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그런 말은 그 복면부터 벗고 지껄였어야지?”

    정천우는 귀찮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복면인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빨리 해치우고 동료들을 도와야 한다. 그런데 정천우가 뺀질거리면서 싸우기를 거부하니 화가 치밀었다.

    “덤벼! 덤벼라!”

    “싫어, 인마! 아쉬운 놈이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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