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7화 (17/200)
  • # 17

    Chapter 5. 복면이라면 지긋지긋해! (4)

    ***

    머릿속은 엉망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하북팽가의 영지…… 아니, 지금 이곳 세상에는 단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한다.

    “주먹에 가공된 마나를 덧씌울 수 있다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을 거다.”

    샤칼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주먹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바람의 정령으로 주먹을 보호했을 뿐이다. 방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데다, 여차하면 바람의 정령이 직접 충격을 주기 때문에 무척이나 효율적이다.

    그런 공격이 정천우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샤칼이 맥없이 당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정령이란 게 없어서 몰랐습니다.”

    “세상과 완전히 담쌓고 사는 사람들인가 보군. 그나저나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만나 보고 싶어. 주먹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놀라워! 언제 한번 같이 가 볼 수 있겠나?”

    헤이먼이 감탄하며 물었다.

    그러자 정천우의 얼굴이 대번에 시무룩하게 변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하지만 되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이젠 소용없는 일이죠. 그저 잊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정천우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헤이먼을 비롯해 나머지 두 사람까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군. 못 들은 것으로 하게.”

    ‘응?’

    정천우는 헤이먼이 사과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갈 수 없어서 씁쓸하다고 한 말인데 그걸 알아들은 것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다.

    “굳이 더 묻지 않겠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두게. 시련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지. 훌륭한 무기 역시 끊임없이 두들겨 맞은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법일세.”

    “마셔! 제기랄 거! 인생 뭐 있어? 좆같은 기억은 빨리 빨리 훌훌 털어 버려! 그게 싸나이야!”

    헤이먼의 말을 받아 샤칼이 와인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천우와 제럴드는 얼떨결에 술잔을 부딪치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두 이종족은 정천우의 ‘잊고 살겠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정천우는 더 캐묻지 않으니 오히려 속이 편해졌다. 샤칼이 내가중수법에 대해 다시 물어 왔지만 달리 요령을 표현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젠장! 안 해! 몰라! 뭐가 그렇게 아리까리해?”

    샤칼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툴툴거리면서 와인을 마셨다.

    내가중수법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포기해야 했다. 어차피 내가중수법을 몰랐던 때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자신과 타협했다.

    “두 분은 어딜 가시던 중이었습니까?”

    “우리야 오라는 덴 없어도 갈 데는 많지. 이 성질 더러운 놈이 꼴에 하이엘프거든.”

    헤이먼은 턱짓으로 옆에 앉은 샤칼을 가리키고는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예에?”

    “너 이 새끼! ‘예에?’의 뜻은 뭐야? 죽을래?”

    샤칼은 제럴드의 괴상한 탄성에 기분이 상해 와인 잔을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 그게, 하이엘프는 정말 처음 만나 보거든요. 신탁을 수행한다는 위대한 엘프잖아요. 맞죠?”

    “그렇지!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제럴드의 변명을 들은 샤칼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거드름을 피웠다.

    “놀고 있네. 어쩌다 재수가 좋아서 신탁 하나 받은 주제에.”

    “망할 땅딸보!”

    “귀때기 병신!”

    “난쟁이 똥자루!”

    “미친 육식 엘프!”

    헤이먼과 샤칼은 한마디씩 툭툭 상대의 약점을 말하며 욕설을 이어 갔다.

    “그만들 하시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정천우는 위스키잔에 술을 따라 놓고는 진지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말해 봐. 뭐가 궁금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천우의 질문에 반응해 왔다. 샤칼과 말싸움을 벌이는 게 귀찮았던 모양이다.

    “벽력대제 팽진옥 대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너 이 세우나 안 세우나 똑같은…… 헙!”

    “자식아! 이 친구가 궁금하다고 하잖아! 좀 닥치라고!”

    샤칼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육체와 관련된 욕을 하자 헤이먼이 급하게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헤이먼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미 샤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정천우는 샤칼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면서 물었다.

    “대제(大帝)라면 황제라는 의미일 텐데, 어째서 지금의 하북팽가는 황제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건 제럴드에게도 물어본 것이었지만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른다고 했었다.

    정천우는 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중원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싫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왕 살아야 한다면 풍족하게 그리고 제대로 살고 싶었다.

    “벽력대제에게는 10명의 제자가 있었다네. 그리고 첫 번째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었지.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걸세. 벽력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나머지 아홉 제자들이 반발하고 나섰어. 팽군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지.”

    “음…… 왜 인정하지 못했던 겁니까?”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다. 사부가 정한 대제자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지근맥을 잘리고 파문을 당할 일이다.

    “다른 제자들은 토착민이었지만 팽군성은 타지 사람이었다네. 물론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만 살던 곳이었지.”

    “응?”

    정천우는 헤이먼의 이야기를 듣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휙 뛰어 다른 건물로 넘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경공(?)이라도 발휘했는지 워낙 순식간이라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왜 놀라는 건가?”

    “방금 뭐가…… 아니, 잘못 본 모양입니다.”

    “싱거운 친구로군. 이제 궁금증이 풀렸나?”

    헤이먼은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말랐는지 맥주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샤칼이 다시 도발하려고 했지만 헤이먼은 맥주를 한 잔 더 시키면서 그의 말을 잘랐다.

    “이곳의 영주가 왜 황제가 아닌지 아직 말씀을 안 해 주셨…….”

    “아, 그랬지! 이거 내가 정신이 없군. 뭐, 들어 보나 마나 한 얘기 아니겠나? 다들 한자리씩 차지하겠다고 뛰쳐나가 왕국을 세워 댔지. 그랬다가 벽력대제의 마지막 제자가 제국을 독차지하겠답시고 미친 짓을 벌였다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어.”

    “정말 더럽게 말 많네! 마지막 제자 놈을 겨우 동대륙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불안한 거지. 그놈은 무서우니까. 그래서 반드시 황제를 둬서 구심점으로 삼아야 했고, 황제 자리를 투표로 결정했다. 그리고 하북팽가는 그 뒤로 황제 자리에 앉은 적이 없지. 끝! 됐지?”

    느긋하게 설명하는 걸 견디다 못한 샤칼이 끼어들어 요약해 주었다.

    “대체 마지막 제자는 어떤 무공을 배웠기에 다른 모든 제자와 싸울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천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단전을 형성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럼 모두가 비슷한 조건이라는 말인데, 실제로 열 번째 제자는 혼자서 다른 모두를 감당했다.

    특별한 무공을 익힌 게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게 정천우의 추측이었고, 그것은 얼추 들어맞았다.

    “마지막 제자는 그 염병할 마교다.”

    “마교? 어떻게 그런 일이…….”

    정천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마교의 무공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파의 무공이 정순한 기운만 받아들여 인체와 조화를 이루는 데 반해 마교의 무공은 잡스러운 기운까지 모조리 몸에 받아들이고 본다. 그래서 불안정하더라도 급격히 강해지고, 같은 경지라도 더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굉장히 큰 모순이 있다.

    ‘잠깐, 말이 안 되잖아?’

    정천우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단전을 형성할 수 없다면 정순한 기운이든 잡스러운 기운이든 아예 쌓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단전을 만드는 대신에 마족을 소환했다. 그리고 마족의 기운을 빼앗아 마기(魔氣)라고 부르며 마나 대신 썼어.”

    “마족? 그건 또 뭡니까?”

    “이 자식은 뭐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 야, 이렇게 기본적인 건 나중에 네 친구 놈한테 물어봐. 우린 슬슬 가 봐야 하니까. 인마! 헤이먼!”

    “하이엘프라는 놈이 주둥이 놀리는 꼬라지 봐라!”

    “됐어! 영주 놈 만나고 후딱 떠나야 할 것 아냐!”

    샤칼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영주와 약속한 시간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 가볍게 술자리를 가졌는데 정천우의 무공에 혹해 따라나섰다가 시간을 너무 빼앗기고 말았다. 더 늦기 전에 영주를 만나러 하북팽가에 가야 했다.

    “에이, 씨!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모르면서 구원자를 찾긴 개뿔을 찾아? 하여간 누가 짝퉁 하이엘프 아니랄까 봐 신탁을 받아도 꼭 그런 걸 받아!”

    “까라면 까는 거지, 뭘 그렇게 툴툴거려? 콱 그냥!”

    “아쭈? 잘하면 한 대 치겠다? 알았어! 간다, 가! 어이, 친구들! 오늘 재미있었어. 혹시 다음에 또 만나면 거하게 취해 보자고. 계산은 하고 갈 테니까 더 마시다가 가!”

    헤이먼은 샤칼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인상을 찡그리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정천우가 포권을 하고서 고개를 숙이고 제럴드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헤이먼과 샤칼은 술집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았다.

    “더 마실 거야?”

    “계산 치렀대잖아. 이거 다 거저야, 거저. 짐 아저씨! 맥주 좀 더 줘요!”

    제럴드는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주 신났군.”

    “오늘 아니면 언제 이렇게 푸짐하게 먹어 보겠냐?”

    “너 잘났다. 그 배만 부른 걸 뭐가 좋다고 그렇게 퍼마시는지, 원.”

    “싸나이는 말이다! 이렇게 큰 잔으로 대범하게 마셔야 하는 거다. 쫀쫀하게 그게 뭐냐? 쥐 불알만 한 잔으로 찔끔찔끔.”

    제럴드가 거품이 흘러내리도록 가득 담긴 맥주잔을 들며 히죽거렸다. 두들겨 맞은 기억 따위는 취기에 섞여 모두 날아간 모양이었다.

    ***

    밤늦게나 되어서야 정천우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제럴드는 완전히 술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속 편한 놈이라니까.”

    정천우는 침대에 제럴드를 눕혀 주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가 봐야 할 시간이다.

    사냥에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느긋하게 있을 순 없다.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 몬스터를 잡으면서 실전 감각까지 키울 수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벌어야 이 생활 청산하지.”

    인상을 쓰며 한차례 혀를 차고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냥에 나가려면 술기운을 없애야 한다. 술 냄새 때문에 짐승이나 몬스터가 눈치챌 수 없게 하기 위해서다.

    반 시진 동안 운기조식을 하고서야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냥을 위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죽 배낭을 메고서 목책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제럴드의 친구입니다. 사냥을 나갈 생각입니다.”

    정천우가 목책 근처에 다가가 정중하면서도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낭인으로 평탄하게 살기 위한 첫 번째 원칙, 자신 때문에 사람들을 귀찮게 할 땐 살갑게 굴어야 한다. 그래야 밉살맞아 보이지 않고 귀찮은 일도 어물쩍 넘어간다.

    뭐 정 안되면 실력 행사에 들어가겠지만 이런 일까지 지저분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아침에 봤던 친구로군. 밤인데 위험하지 않겠어?”

    “이봐! 뭐가 걱정이야? 혼자서 오크 세 마리나 잡은 친구잖아. 몬스터들이 야행성이니까 지금 나가는 게 맞지.”

    “어서 가 봐! 새벽에 돌아올 것 같으면 미리 횃불을 같은 걸 들고 오라고. 괜히 크로스보우 겨누게 하지 말고. 이게 은근히 오발 사고가 많아. 하하하!”

    경계를 서던 경비병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다른 경비병들이 껄껄껄 웃으면서 목책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정천우는 한차례 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목책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