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5화 (15/200)
  • # 15

    Chapter 5. 복면이라면 지긋지긋해! (2)

    정천우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위스키 잔을 든 손가락으로 한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뭐? 누구?”

    제럴드는 느끼한 얼굴로 창밖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윙크를 날려 대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껏 여자가 없었는지, 지금 하는 행동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도 여자한테 약하지만 제럴드는 그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윙크를 날릴 때마다 여자들이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제럴드는 지치지 않고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천우가 불렀음에도 입으로만 대답하지, 실상은 여자를 탐색하는 데 온정신이 쏠려 있었다.

    우두둑!

    정천우가 주먹을 움켜쥐자 제럴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친구! 말해 봐. 궁금한 걸 참으면 병이 되지. 그래, 뭐가 궁금해?”

    제럴드가 정색하면서 정천우에게 물었다.

    낮의 끔찍했던 구타가 그의 몸에 아로새겨진 탓에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저 사람들,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어?”

    “누구?”

    “저 사람들 말이다.”

    정천우가 위스키잔을 든 손으로 한 번 더 건너편 테이블의 사람들을 가리키자 그제야 제럴드가 고개를 돌렸다.

    “아! 저 사람들은 이종족이야.”

    “이종족?”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종족이야. 저기 키가 작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이 드워프, 그 앞에 아름답게 생긴 사람은 엘프라는 종족이야.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지.”

    제럴드는 두 사람에 대해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얻어맞기 싫어서였다.

    설명해 주면서도 어떻게 하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속으로 한탄하는 제럴드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냥 편한 친구였는데 말이다.

    ‘그저 입이 방정이지.’

    제럴드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주둥이 한번 잘못 놀린 죄로 이렇게 설설 기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신기한 세상이로군.”

    정천우는 위스키를 한 모금 입에 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중원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귀가 저렇게나 긴 사람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세상. 확실히 여기가 중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들이 바글거린다.

    그래서 더 중원이 그리워졌다.

    엘프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의 등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어 대던 진미령의 얼굴이 떠올라 버리고 말았다.

    “이봐! 그렇게 쳐다보지 마! 이종족은 자신을 감상하듯 쳐다보는 거 무지하게 싫어해.”

    “왜?”

    “너 같으면 신기하다는 얼굴로 힐끔거리는 게 기분 좋겠어? 이런…….”

    조심하라고 말하던 제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워프가 정천우를 돌아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데?”

    정천우는 엄지손가락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드워프를 가리켰다.

    “인마, 무조건 미안하다고 빌어. 드워프들은 성격이 불같거든. 까딱 잘못하면 싸움 난다.”

    “설마…….”

    정천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저 몇 번 여자 엘프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런 것 가지고 싸움을 걸어온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중원의 무인들도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진 않는다.

    무인들은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힐끔거리는 건 자신보다 약한 증거라고 본다. 더 반복되면 감시자나 첩자로 의심받아 공격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말이다.

    ‘뭐야? 진짜?’

    드워프가 눈을 부라리면서 걸어오지만 정천우는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드워프의 몸에서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천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드워프가 다가오면서 기세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위기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싸우는 거야 중원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어디서 눈깔을 함부로 굴려?”

    드워프는 정천우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거칠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땅딸막한 드워프가 주먹을 날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하지만 정천우를 위협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 드워프의 주먹을 받아 냈다.

    퍽!

    “아쭈? 막아?”

    드워프는 이미 반쯤 꼭지가 돌아 버린 상태였다. 그가 다가오기 전에 미리 용서를 빌었다면 몰라도, 이미 정천우의 앞에 도착한 시점에서는 늦었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천우가 드워프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아 내고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럴드가 이종족을 빤히 쳐다보는 게 잘못이라고 했으니까.

    “미안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미녀라 호기심에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정천우의 사과에 드워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푸하하하! 아이고, 배야!”

    드워프는 갑자기 기세를 흩트리며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드워프가 죽는다고 웃어 대자 정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역시 넌 수상해…….”

    제럴드는 질겁한 얼굴로 의자를 뒤로 뺐다. 마치 가까운 데 있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파삭! 후두두둑…….

    드워프가 배를 잡고 웃는 가운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천우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아 와인을 마시던 엘프가 손아귀 힘으로 잔을 부순 것이다. 유리 조각이 탁자 위에 우수수 떨어졌다.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손을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엘프의 얼굴은 상처받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드르륵! 우당탕!

    엘프는 독기 어린 눈으로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지?”

    정천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제 아예 바닥에 뒹굴며 낄낄거리는 드워프와 화가 난 엘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엘프는 싸늘하게 빛나는 눈으로 정천우를 쏘아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술집 안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탁자를 들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러고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엘프와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물론 술집 주인과 종업원은 똥 밟았다는 얼굴로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왜 그런 눈으로…….”

    “난…… 남자다, 이 망할 자식아!”

    엘프는 정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을 뻗어 왔다.

    정천우는 순식간에 눈앞으로 주먹이 날아오자 재빨리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공격이 무산되었지만 엘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회전하면서 반대편 팔꿈치가 정천우의 머리를 노렸다.

    터걱!

    정천우가 급하게 손을 들어 머리를 노리는 팔꿈치를 막아 내고 오른손 정권을 내질렀다.

    엘프의 움직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연계가 빨라 수비만 하다가는 된통 얻어맞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흥! 어림없는 짓!”

    엘프는 코웃음을 치며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천우는 공격을 실패한 것에 실망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엘프의 품에 파고들었다. 엘프는 정천우가 일직선으로 휘둘러 오는 주먹에 손바닥을 내밀어 바깥으로 밀쳐 냈다.

    쉬익!

    훤하게 드러난 정천우의 턱을 노리고 어퍼컷을 올려치며 엘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공격에 정천우가 쓰러지면 잘근잘근 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퍼억!

    정천우가 턱을 노리고 솟아오르는 엘프의 주먹을 오른손으로 내리눌렀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밀고 왼 다리를 비틀면서 힘을 주었다.

    구웅!

    정천우의 어깨가 엘프의 가슴에 닿으며 상당한 충격을 가했다.

    “우욱!”

    엘프는 정천우의 기묘한 공격을 막지 못하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의 공격은 처음 당해 봤기에 충격을 줄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부디 화를 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정천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사과의 의미로 포권을 취했다. 자신의 오해로 인하여 엘프가 화를 내게 한 것이 미안했다.

    게다가 조금 전의 공격은 육합권(六合拳)의 어깨로 밀어치기인데 상당히 위험한 초식이다. 심할 경우 가슴뼈가 함몰될 수 있다.

    내공조차 느껴지지 않는 엘프에게 사용한 건 지나친 대응이었다.

    물론 상대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잘근잘근 밟아 줄 생각이었다. 여자가 아니라고 하니 손에 사정을 둘 이유가 없다.

    “좆 까는 소리! 때려 놓고 그만하자고? 이거 정말 개새끼잖아?”

    엘프는 생긴 것과 달리 험한 말을 쏟아 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술집에 앉은 사람들은 엘프의 욕설에 입을 쩍 벌렸다. 고상하고 고결한 성품으로 알려진 엘프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오는 건 그들에게도 생소했다.

    “거, 적당히 합시다. 이런 일로 꼭 싸워야 합니까?”

    정천우는 그만하자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로 부탁하진 않았다.

    상대가 남자란 걸 알아 버렸다. 이건 사나이의 자존심이다. 이 정도 체면을 살려 줬으면 알아서 물러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엘프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서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다.

    “빠는 소리 집어치워, 망할 자식아!”

    엘프는 욕설과 함께 몸을 날렸다.

    두 주먹에 흐르는 희미한 기운에 정천우의 안색이 바뀌었다. 내공도 없는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권기(拳氣).

    푸르스름한 기운이 엘프의 주먹을 타고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정천우가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후회했다. 차라리 제럴드의 말처럼 드워프가 다가왔을 때 빌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권기라니! 어디서 이런 고수가! 미치겠군.’

    정천우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에 기운을 두를 수 있을 정도면 자신보다 한참 윗줄의 고수라는 의미다. 살과 뼈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은 고된 수련을 통해 주먹이 강철처럼 단련되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아주 팬케이크를 만들어 버리겠어! 각오해라, 개자식아!”

    시종일관 거친 욕설을 퍼부으면서 엘프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려왔다.

    “이거 큰일 났네! 드워프님, 어떻게 좀 말려 봐요!”

    “크크크! 몰라, 몰라! 푸하하하! 골 때리네, 정말 골 때려! 푸히히히!”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제럴드가 바닥을 뒹구는 드워프에게 통사정했다. 그러나 드워프는 배를 잡고 웃기 바빴다.

    “이야압!”

    엘프의 입에서 짤막한 기합이 터졌다.

    순간, 그의 몸에서 맹렬한 투기가 끓어오르더니 정천우를 향해 쇄도해 왔다.

    ‘위험해! 기운을 다른 쪽으로 흘려야…….’

    정천우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육합권의 기수식을 잡아 갔다.

    권기를 쓰는 무인과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위력이 얼마만 할지 몰라 불안감이 들었다.

    최선의 방법은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이치를 활용해 기운을 옆으로 흘리는 것인데, 저만한 고수가 그걸 모를 리 없으니 생각대로 될지 미지수였다.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쥐어짰다.

    그러나 정천우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터덩!

    “에계?”

    정천우는 엘프의 주먹을 육합권의 수법으로 받아 내 옆으로 밀어내면서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훤히 비어 버린 엘프의 명치에 정권을 박아 넣었다.

    쿠당탕!

    “우억! 허억, 허억! 어욱…….”

    명치를 얻어맞은 엘프는 바닥을 뒹굴며 숨을 헐떡거렸다.

    맞아 본 사람은 안다. 명치를 얻어맞으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하물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내공까지 불어넣은 주먹이었으니 엘프가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일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정천우는 아차 하는 얼굴로 급하게 다가가 추궁과혈(推宮過穴, 손에 내공을 담아 안마하는 내상 치료법)의 수법으로 엘프의 가슴을 더듬었다. 자신이 명치 부근에 주입한 파괴적인 공력을 거두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순간, 화끈한 싸움에 환호를 지르던 술집 내부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게이잖아…….”

    “……구역질 나.”

    “에이, 씨! 눈이 썩는 것 같아!”

    “남자 가슴을 저렇게 더듬는 놈은 처음 봐.”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토하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추궁과혈을 하느라 정천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공을 사용해 근육에 맺힌 충격을 흩어 놓고 엘프의 명치 부근에 맺힌 자신의 내공을 몰아냈다.

    “으음…… 헉, 헉, 으으음…….”

    엘프는 꽉 막혔던 가슴이 점차 뚫리면서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고 찡그렸던 얼굴이 곧 편안해졌다.

    “……저 엘프, 즐기고 있어!”

    “에이, 퉤! 똑같은 것들이었군!”

    엘프의 기묘한 반응을 본 사람들이 못 봐 주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