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4화 (14/200)
  • # 14

    Chapter 5. 복면이라면 지긋지긋해! (1)

    “제럴드! 나 왔다!”

    정천우는 목책 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등에는 아직도 핏물이 마르지 않은 녹색의 가죽이 차곡차곡 개어져 끈에 묶여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내려갈 거야.”

    “빨리 열어 줘. 비린내 때문에 머리가 띵하다.”

    정천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가죽을 벗기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의뢰를 처리하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직접 사냥으로 끼니를 때웠던 경험이 많다.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이 돼지를 닮은 괴물이었지만 가죽을 벗기면서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팔다리가 있다 보니 꼭 인간의 가죽을 벗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그런 데다가 피비린내는 어찌나 심한지, 가죽을 매고 오는 내내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야! 오크를 잡았어?”

    “오크? 이 괴물의 이름이 오크야?”

    “맞아. 이놈들 강한데 용케 잡았네? 위험하진 않았…… 세 마리나? 대단한데?”

    정천우의 등에 진 오크 가죽을 세어 본 제럴드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낡은 장비를 든 오크 한 마리와 우월한 장비를 든 일반 병사가 싸우면 비등한 수준이다. 그런 오크 세 마리나 잡는 게 쉬울 리 없다.

    “가죽을 벗겨 오라고 해서 벗겨 오긴 했는데, 정말 이게 돈이 되냐?”

    “네 허리띠와 가방도 오크 가죽 자투리로 만든 거야. 오크 가죽은 쓰이는 곳이 많아. 비싸게 팔 순 없지만 못해도 하나에 1.5골드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괜찮네? 그럼 이것들도 팔 수 있어?”

    가죽 세 개를 팔면 4.5골드를 받을 수 있다. 구역질을 참아 가면서 가죽을 벗긴 보람이 느껴져 정천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왕 물어본 김에 철퇴 두 개와 청룡언월도를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렸다.

    “당연히 되지. 녹이 슬어서 제값은 어렵고, 고철값은 받을 거다. 최소한 2골드는 넘겠네. 오늘 한턱 쏘냐?”

    “어제도 내가 산 걸로 아는데.”

    “따지기는! 친구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어서 들어가. 야간조는 오늘까지니까 한잠 자고 일어나서 신분증이나 만들러 가자.”

    제럴드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정천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목책 위로 올라가 버렸다.

    “저게 은근히 사람 덤터기 씌우네? 뭐, 얹혀살고 있으니 보답이라고 생각해야지.”

    정천우는 목책 위를 한차례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넉살 좋게도 제럴드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집으로 돌아온 정천우는 뒷마당으로 돌아가 헛간에 오크의 가죽을 널어놓고 무기까지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마을의 우물로 가서 씻고 돌아왔다.

    새벽이라서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피비린내에 기겁했을 것이다.

    “정말 쓸 만한 무공이야.”

    오호단문도를 떠올리며 정천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오크 세 마리를 잡고 나서 밤새도록 오호단문도를 수련했다. 상승 무공에 목말라 있던 정천우였기에 그것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중원에서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가부좌를 틀었다. 밤새 쌓인 피로와 소진된 내공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천우의 호흡이 안정되면서 주변의 기운이 그의 백회혈로 파고들었다.

    ***

    “여어! 기다렸어?”

    ‘왔나 보군.’

    정천우는 내공을 갈무리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거참, 남들은 예쁜 마누라가 반겨 준다는데 나는 이게 뭐냐?”

    제럴드는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서도 너스레를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라고 뭐 좋은 줄 아냐? 빨리 돈 벌어서 독립할 테니까 걱정 마라.”

    정천우가 기분이 상해 한마디 툭 내던졌다.

    반가웠던 마음이 밉살스러운 얘기에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제럴드가 정천우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삐졌냐? 사내자식이 그런 걸 가지고 꽁하냐? 아침은 어떻게 했어?”

    “됐어, 자식아! 아침은 대충 해결했다.”

    새벽에 수련을 마치고 건량으로 허기를 해결한 상태다.

    “그럼 난 자련다. 점심때쯤 일어나서 같이 나가자.”

    “그래.”

    정천우는 짧게 대답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제럴드가 들어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올라가기 무섭게 코를 드르렁 골았다.

    “속 편한 친구야.”

    정천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바람 빠지듯 피식하고 웃었다.

    중원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르는 사람을 집 안에 들이고서도 저처럼 마음 편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점차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워 나갔다.

    “으그그그극!”

    “요란하기도 하다!”

    정천우는 방정맞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제럴드를 타박했다.

    정천우는 삼류에 불과하더라도 무공을 단련한 사람이다. 내공을 지니지 않은 일반인보다 체력 회복이 몇 배는 빠르다. 자기 전에 내공 수련까지 마친 상태라 잠시 눈을 붙인 것만으로도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눈뜨자마자 왜 시비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어째서 내게 아무런 경계심도 갖지 않는 거지?”

    정천우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궁금하냐?”

    “당연하잖아. 네가 잠든 사이에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렇게 태평한 거야?”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강호에서 제럴드처럼 행동했다가는 영문도 모르고 죽을 수 있는 일이다. 그 태평함이 그에게는 묘하게 푸근함을 주고 있었다.

    그러자 제럴드의 표정이 돌변했다. 눈매가 좁아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천우의 미소가 거슬렸다.

    마치……

    “……너 게이였냐?”

    “게이는 또 뭐야?”

    정천우는 처음 듣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말은 잘 통하는데 생소한 단어들이 너무나 많다.

    “남자한테 흥분하는 놈들을 게이라고 하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하얀 설사나 오줌 눌 때 거시기에서 똥 냄새 나는 거 질색이다! 꿈도 꾸지 마!”

    제럴드는 정색하면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손으로는 엉덩이를 가리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정천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드득…….

    정천우는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좀 맞자!”

    “이 개새끼! 새디까지? 컥! 으아악!”

    퍽! 퍼버벅! 퍼벅!

    정천우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게이’라는 말이 남색(男色)을 즐기는 남자를 말하는 건 알겠다.

    그 말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취향 차이니 그거야 존중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존중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바로 제럴드의 생김새였다.

    “그, 그만! 버, 벗을게! 벗으면 되잖아!”

    제럴드는 주먹을 견디다 못해 악다구니를 써 댔다.

    그게 더 정천우의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 정천우의 주먹이 한 번 더 그의 복부를 두들겼다.

    “난 게이 따위가 아니다. 넌…… 거울도 안 보냐? 생각만으로도 우욱…….”

    정천우는 끔찍한 걸 떠올렸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했다.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제럴드가 알몸으로 자신에게 엉덩이를 들이대는 모습을 말이다.

    “토 나와!”

    빡!

    “컥!”

    제럴드는 정천우가 내지른 정권 지르기에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늦은 오후.

    정천우와 제럴드는 목책 근처의 숙소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럴드는 입이 툭 튀어나온 채 계속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나 무지막지하게 강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맞은 건지도 모르게 두들겨 맞았다. 뻔히 보이는 주먹을 피하지 못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나쁜 새끼!”

    제럴드가 퍼렇게 멍든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화 풀어.”

    정천우는 겸연쩍은 얼굴로 딴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럴드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중이다.

    “미안하면 근사한…… 젠장, 이 꼴로 뭘…….”

    아가씨들이 있는 근사한 곳에서 술을 사 달라고 하려던 제럴드는 이내 자신의 얼굴에 든 멍을 떠올리곤 한숨만 푹 내쉬었다.

    “맛있는 거 사 줄게.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라. 그런데 마법사가 정말 대단한 거야? 내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그렇게 빨리 구분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정천우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제럴드가 툴툴거리길 끝낼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다른 화제를 꺼내서라도 상식적인 대화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었다.

    “마법사가 그래서 무서운 거야, 인마. 거짓말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거든.”

    단순한 제럴드는 금세 툴툴대기를 멈추고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로 입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동대륙에서는 마법사가 워낙 귀해서 하북팽가에도 마법사는 셋밖에 되질 않는다고 한다. 정천우가 만났던 마법사는 셋 중에서도 가장 하급 마법사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법은 무섭다고 했다.

    “가죽은 어디다가 팔지?”

    “잡화점에 파는 게 가장 좋지. 가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니까.”

    “그럼 이 무거운 쇳덩이부터 어떻게 해결하자.”

    정천우는 어깨에 짊어진 거추장스러운 오크들의 무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약속 지켜라! 무기 판 돈으로는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술 산다는 거!”

    “속고만 살았어? 나는 한다면 하는 사나이다.”

    정천우가 턱을 치켜들었다.

    약속 하나 빼면 시체가 바로 정천우다. 불리한 약속은 금방 잊지만 웬만한 약속은 칼같이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둘은 빠르게 물건들을 처분하고 곧바로 술집에 들어갔다. 지난번의 싸구려 술집이 아니라 나름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다.

    그래 봐야 안주값이 비싸고 술이 조금 더 좋다는 정도였지만 제럴드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발란의 남자라면 반드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셔 줘야 하는 법이야! 으하하하!”

    제럴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제럴드를 보면서 킥킥거렸다. 호탕해 보이기엔 그의 눈가에 멍 자국이 우스웠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걸 잠시 망각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발란의 낭만’이라는 술집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제럴드가 정천우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덕분에 술집을 찾은 시간이 적당해졌다. 술집 안은 제법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 좋은 자리가 있었어!”

    제럴드가 눈을 빛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들어간 타이밍에 맞춰 창가 쪽 자리 사람들이 일어났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제럴드가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재빨리 식탁을 치워 주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싸나이는 흑맥주지! 너는 어떤 걸로 마실래?”

    “맥주 말고, 독한 거 없어?”

    정천우는 맥주가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꼭 오줌을 받아먹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그럼 위스키로 해. 독해서 목구멍이 타들어 갈걸?”

    “그래, 독하기만 하면 상관없다.”

    “여기, 소시지 한 접시에 스테이크 이 인분, 그리고 위스키 한 병이랑 흑맥주 시원하게 부탁해.”

    제럴드의 주문에 종업원이 주문을 꼼꼼히 받아 적고는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자 제럴드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흑맥주를 들이부었다. 자기 돈 아니라고 아주 작정하고 먹었다.

    그에 반해 정천우는 느긋하게 조금씩 음식을 먹었다. 낭인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습관이 들었다.

    ‘좋군. 제법 쏘는 맛이 있어.’

    위스키가 입맛에 맞았다. 한 모금 더 들이켜던 정천우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제럴드! 저건 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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