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2화 (12/200)
  • # 12

    Chapter 4.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라! (2)

    정천우의 눈에서 욕망의 불꽃이 타올랐다.

    전륜도법 같은 삼류 무공을 익혔기에 낭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호단문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류 무공, 무인으로서 경지를 높일 수 있게 이끌어 주는 무공이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냐? 서점에 가면 널린 게 검술서야. 가격이 좀 비싸서 그렇지. 기다려 봐! 가져올게.”

    정천우가 자신을 애타는(사실은 패 버리기 일보 직전의) 눈으로 쳐다보자 제럴드가 피식 웃었다.

    “그, 그래.”

    ‘서점에 가면 흔해?’

    이 세상 자체가 황당하긴 하지만 얼마나 더 놀라야 하는 걸까. 하북팽가의 독문무공이 서점에 가면 흔하다니 그냥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자! 여기 있다. 난 다 본 책이라 없어도 돼.”

    “……이거 겉장이 왜 이러냐?”

    “냄비 받침으로 썼거든.”

    “…….”

    정천우는 할 말을 잃었다.

    중원이라면 유출된 것만으로도 난리가 났을 오호단문도의 비급을 고작 냄비 받침으로 썼을 줄이야…….

    더 놀랄 기력도 없어서 힘없이 겉장을 넘겼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눈이 커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세상에! 진짜야! 진짜 오호단문도야.”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제럴드는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마나 쉐도우까지 다룰 줄 아는 실력자가 오호단문도 따위의 시시한 검술서에 감동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그나저나 어쩔 거냐? 다른 데 갈 데 없지?”

    “으응? 없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직장 잡아야지. 기사가 되어 볼 생각 없냐?”

    “기사? 하는 일이 뭔데?”

    “하는 일은 간단하지. 영주님한테 충성을 맹세하면 기사가 될 수 있어. 적이 나타나면 싸우고, 평소에는 병사들을 관리하는 사람이야. 돈은 잘 벌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거냐 하면 말이지…….”

    “싫어. 귀찮은 거 딱 질색이다.”

    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낭인의 삶을 살았던 이유도 한 군데 얽매이는 게 싫어서였다. 삼류 무인이면 어느 문파라도 최소한 낭인보다는 훨씬 사람다운 대접을 해 준다.

    문제는 칼받이 신세에다가 문파에 소속되어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기사를 한다고 해도 다른 기사들을 압도할 실력을 갖춘 뒤에나 하고 싶었다. 남들 밑에서 같잖은 명령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럼 뭐 할 건데?”

    “할 거야 많지. 사냥꾼도 괜찮고, 약초를 캐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할 줄 알아? 나 같으면 차라리 기사가 되겠다.”

    제럴드는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마나 쉐도우를 뽑아낼 능력까지 지닌 정천우가 사냥꾼이 되겠다니 그 실력이 아까웠다.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나보다 약해?”

    “글쎄? 음…… 잘 모르겠지만 너보다 약한 사람은 없을걸? 다들 짙은 마나 쉐도우를 뽑아낼 줄 안다고 했으니까, 아마 너보다 실력은 좋을 거야. 그래도 기사가 어딘데! 돈 잘 벌지, 음식도 좋은 거만 먹지. 좋지 않냐?”

    “됐어. 남 밑에 들어가서 눈치 보느니 그냥 속 편하게 사는 게 더 낫다. 나중에 실력이 늘면 생각해 봐야지, 지금은 아니야.”

    정천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럴드가 자신더러 강하다고 해서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 보니 여기서도 바닥 인생이다.

    차라리 사냥이나 하면서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다. 중원에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때나 생각해 봐야 할 일이지,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제 겨우 이 괴상한 세상에 온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럼 신분증부터 만들어야겠네?”

    “이걸로 해결되는 거 아니었어?”

    정천우가 파란색 종이를 꺼내 들고 물었다.

    “그건 임시로 발행해 준 거야. 정식으로 발급받으려면 기름칠이 필요하지.”

    제럴드는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비싸진 않아. 한 10골드?”

    “알았어. 줄 테니까 좀 만들어 줘. 그리고 여기 대장간이 어디야?”

    “대장간은 왜?”

    “사냥하려면 물건들이 필요해서 그러지.”

    “아침에 술 마시던 여관 알지? 그 뒤에 건물이 바로 대장간이야.”

    “그래, 알았다.”

    “정말 사냥꾼이 되려고?”

    “그럼 농담으로 사냥꾼이 되겠다고 하겠냐?”

    정천우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한쪽에 놓아 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당장 오호단문도를 수련해 보고 싶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낫다. 지금은 실력을 키워야 할 때지 남들 눈에 띄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제럴드의 옷을 대충 입은 상태라 옷부터 사야 했다.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신 덕분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장간 건물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옷가게가 있어 옷을 한 벌 사고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뭘 찾으시오?”

    무뚝뚝한 인상의 대머리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단검 좀 보러 왔습니다.”

    “단검?”

    대머리 사내는 30cm 정도의 라운들 대거(Roundel Dagger, 손잡이 위아래가 원반 형태인 단검)를 내밀었다.

    정천우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다. 암기로 사용할 단검을 사러 왔으니까 말이다.

    “던지기 좋은 놈으로 부탁합니다.”

    정천우는 대장장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자 손으로 던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중원의 언어가 혼용되는 곳이다. 말보다는 차라리 행동으로 표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아! 드로잉 나이프(Throwing Knife)?”

    대장장이는 정천우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야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진열대 밑에서 상자를 꺼내 드로잉 나이프를 하나씩 진열대 위에 내려놓았다.

    “종류는 세 가지요. 이건 개당 4실버, 요놈은 5실버, 마지막으로 이건 6실버요.”

    대장장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드로잉 나이프를 정천우가 유심히 살폈다. 세 가지 모두 나쁘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그중에서 개당 5실버에 판다는 드로잉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드로잉 나이프는 전체가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어 힘껏 던지면 칼끝이 앞으로 향한 채 날아가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다.

    딱 정천우가 원하던 거였다.

    “이걸로 여섯 개 주십시오.”

    정천우가 5실버짜리 드로잉 나이프를 고르고는 3골드를 주었다. 대장장이는 드로잉 나이프를 굴러다니는 종이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서 주었다.

    정천우는 드로잉 나이프를 챙기고는 역천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검에 맞는 검집이 있겠습니까?”

    “이리 줘 보게.”

    대장장이가 손을 내밀었다.

    정천우는 별생각 없이 역천검을 대장장이에게 주었다. 검집도 없이 허리춤에 찔러 넣고 다니다 보니 위험하고 볼썽사나웠다.

    “잘 만들어진 검이군. 혹시 내게 팔 생각은 없소?”

    “애착이 많이 가는 물건이라 팔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 참 아쉽소. 음…… 어디 보자…… 이거라면 대충 맞을 듯싶소. 생긴 게 워낙 평범한 검이라서.”

    대장장이는 바닥에 세워져 있는 검집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더니 역천검을 집어넣었다.

    “약간 남는 듯싶은데…… 잠시 기다려 보시오.”

    대장장이는 역천검을 뽑아 검집에 대 보고는 톱으로 검집을 썰었다. 쇠 장식을 빼내 검집의 입구에 다시 박아서 정천우에게 건네주었다.

    “얼맙니까?”

    “뭐, 쓸모없는 물건이긴 한데 톱질값으로 2실버만 주시오. 한데 이건 안 필요하시오?”

    대장장이는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하고는 폭이 넓은 가죽 허리띠를 들어 올렸다.

    검집을 걸 수 있는 고리가 있었고, 드로잉 나이프 같은 것을 꽂아 둘 수 있는 작은 통이 매달린 허리띠였다. 저런 물건이 있다면 검을 휴대하기 편해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가격을 물어보려는 정천우의 눈에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 보였다. 봇짐보다 넉넉하고 튼튼해 보였다.

    “저것하고 같이 계산하면 얼맙니까?”

    “배낭? 두 개 합쳐서 2골드만 주면 팔겠소.”

    “여기 받으십시오.”

    정천우는 가방과 허리띠를 즉석에서 몸에 착용했다. 허리띠에 역천검을 착용하고 드로잉 나이프를 꺼내 가죽으로 만들어진 통에 넣었다.

    “돈 쓰기 참 쉽네.”

    정천우가 허탈한 듯 혀를 차며 털레털레 제럴드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의 전 재산은 중원의 은하전장에 맡겨 뒀고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남은 돈은 딸랑 2골드.

    어느 세상이고 돈은 중요하다. 중원으로 언제 돌아갈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풍족하게 지내다가 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제럴드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왔어? 점심은 먹었냐?”

    “아니.”

    “받아! 먹을 만할 거다.”

    정천우는 날아오는 빵을 잡아챘다. 딱딱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제럴드, 뭘 잡아야 돈이 되지?”

    정천우는 제럴드가 내미는 물잔을 받아 들고는 이제껏 고민하던 것을 물었다.

    “돈?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서 팔면 돈이 되지. 하북팽가에 사는 계집들은 털 많은 짐승의 가죽을 좋아해. 카펫을 만들어 바닥에 깔아 놓는 걸 좋아하거든. 요즘 유행이라고 하더라.”

    “카펫? 그건 또 뭐야?”

    “바닥에 깔아 놓는 거 있어. 하여튼 털 많은 짐승이 좋아. 그런데 잡기가 귀찮지. 털 많은 짐승은 크기가 작거든. 너 정도 능력이면 몬스터를 잡는 것도 좋겠지. 몬스터의 가죽은 제법 비싸게 팔리거든.”

    “몬스터?”

    “어휴…… 하여간 넌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몬스터라는 건 괴물들이야. 성질 더럽고 힘도 세지. 그놈들 때문에 목책을 둘러친 거니까.”

    “어떻게 생겼는데?”

    “그걸 언제 다 얘기하고 있냐? 그냥 척 보면 알아. 하여튼 좆같이 생긴 것들이니까. 보통은 푸른색 피부를 가진 놈들이 많지. 웬만한 공격으로는 잘 죽지도 않아. 트롤 같은 놈들은 베어도 금방 상처가 아물지.”

    잠시 고민하던 제럴드는 몬스터를 떠올렸다가 이내 두루뭉술하게 대답해 주었다.

    ‘일종의 영물 비슷한 놈들인 건가?’

    “어딜 가면 볼 수 있는데?”

    “목책 바깥으로 나가면 사방에 널렸어. 평소엔 산속에 숨어 살거든.”

    “알았어. 그럼 오늘부터 사냥을 나가야겠다.”

    “오늘부터? 사냥 도구는?”

    “여기 있잖아.”

    “미친 거냐? 크로스보우 정도는 있어야지!”

    제럴드는 자랑스럽게 드로잉 나이프를 꺼내 보여 주는 정천우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크로스보우? 아! 그 연노같이 생긴 거? 난 필요 없어. 이게 훨씬 좋아.”

    정천우는 제럴드가 손으로 가리킨 물건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공을 담아 드로잉 나이프를 암기처럼 던지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연노를 매달고 다니기도 귀찮고, 정확도를 자신할 수 없다. 차라리 평소처럼 암기에 내력을 담아 던지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 너 꼴리는 대로 해. 출발할 거면 같이 가자. 이번 주는 야간 근무니까. 가는 김에 주간조 사람들한테 인사시켜 두면 왔다 갔다 하는 데 문제없을 거다. 신분증은 내일 처리하는 걸로 할게.”

    “알았다. 기다려 봐. 짐 좀 챙기고.”

    정천우는 집 안으로 들어가 봇짐을 꺼내 왔다.

    봇짐 안에서 건량과 잡동사니들을 꺼내 새로 장만한 가방에 집어넣었다. 낭인 일을 하면서 모아 둔 물건이라 실용성만큼은 인정할 만한 물건들이었다.

    아직도 진천뢰가 두 개나 남아 있었다. 써먹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가자!”

    “어째 좀 불안한데…… 그래 가지고 사냥이 되겠냐?”

    “걱정 붙들어 매라.”

    정천우는 가방을 등에 메고 빙그레 웃었다.

    괴상한 세계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친구가 생각보다 정이 많은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제럴드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에는 제럴드를 두들겨 패고 협박하려 했던 정천우는, 그가 나쁜 놈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스러웠다.

    목책까지 나름 사이좋게 걸어간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위해 헤어졌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알았어. 내일 아침에 보자고.”

    정천우는 목책을 향해 뒤를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냥은 얼마 하지도 못하고 해가 질 시간이지만 정천우는 일부러 이런 시간에 나왔다. 오호단문도를 수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겸사겸사 해 떨어지기 전에 미리 덫을 놓을 계획이었다.

    정천우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긴장을 풀어 주고는 단전의 내공을 일깨웠다. 주변에 사는 짐승은 다른 사냥꾼들이 사냥한다니 경공으로 멀리 나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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