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화 (11/200)
  • # 11

    Chapter 4.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라! (1)

    “이 미친 소리를 믿어야 돼?”

    정천우는 황당한 얼굴로 탁자에 고개를 처박고 잠든 제럴드를 내려다보았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300년 전에 팽진옥이라는 사람이 동대륙에 나타나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다고 했다. 역천검이 놓여 있던 자리에 새겨진 글자가 서대륙의 문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세상에는 명(明)이라는 나라도, 중원이나 무림도 없단다. 설마 다른 세상은 아닐 거라고 가슴 한구석에 쌓아 두었던 불신마저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여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중원의 주술사들이 떠드는 영계니 환계니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40년 전에 실종된 팽진옥이 여기에서는 300년 전에 나타났을 만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천하제일인이었던 그조차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다.

    “좆 됐네! 빌어먹을! 술맛도 시큼털털하고 말이야. 이걸 마시고 취해? 어지간히 약골이군.”

    정천우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툴툴거렸다. 독한 술만 마시다가 맥주라는 술을 마셔 보니 그냥 맹물 수준이었다. 마시면 귀찮게도 소변만 마렵다.

    정천우는 널브러진 제럴드를 한차례 흘겨보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떠올렸다.

    돌아가느냐, 남느냐.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 그 외의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진미령을 다시 만나려면 그 이상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망할 자식! 달랑 이름만 가르쳐 주고 말다니!”

    정천우는 역천검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모든 게 이 망할 놈의 역천검 때문이다. 드디어 꽃 피는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가기도 전에 생이별을 한 셈이다.

    ‘뭐,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는 일인가?’

    정천우는 이곳에 넘어오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인 놈들한테 진천뢰를 날릴 생각이기는 했지만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았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 일어나 봐! 아침부터 뭐 하자는 거야!”

    제럴드를 흔들어 깨우면서 정천우가 짜증을 냈다.

    빨리 중원으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여자가 생겼는데, 그것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를 얻었는데 이따위 곳에 시간을 허비하긴 싫었다. 빨리 돌아가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했던 입술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좀 일어나 보라고!”

    정천우가 거칠게 제럴드의 몸을 흔들어 댔다. 그제야 제럴드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봐! 왜 귀찮게 하는 건데? 나 밤새웠다고!”

    “집에 가서 자야 할 거 아냐!”

    “집? 아! 맞아, 맞아! 집에 가서 자야지? 미안, 미안!”

    제럴드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는 배시시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기 얼마입니까?”

    “6실버 5브론즈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정천우는 급하게 돈을 내밀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금자를 모조리 전당포에서 바꾸었다. 금자에 포함된 불순물이 많다며 20골드를 받았다.

    다행히 물가는 중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화폐 단위가 생소하다는 게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인마! 같이 가야지!”

    “어! 어? 아! 그래, 천우! 맞지, 천우? 같이 가자! 으하하하!”

    제럴드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정천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동갑인 데다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친구가 되었다. 정천우가 떠돌이란 걸 알고 자신의 집에서 당분간 지내자고 제안해 왔다.

    사실은 두들겨 패서라도 얹혀살려던 정천우였다. 술 한잔 사 준 대가치고는 남는 장사였다.

    제럴드의 집은 술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목책을 지키는 경비대원이라 근처에 집을 산 것이다.

    “사람 사는 곳 맞냐…….”

    “으하하하! 경비대 생활 10년 만에 장만한 집이시다! 근사하지?”

    “퍽이나 근사하다…… 뭐야? 벌써 자냐?”

    정천우는 침대에 쓰러져 코를 골아 대는 제럴드를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건 사람 사는 방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속옷이 너부러져 있고 먹다 남은 음식이 흩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술 취한 몸으로 용케 침대까지 걸어간 제럴드가 신기해 보였다.

    “돌겠군.”

    한숨을 폭 내쉰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천우가 낭인 생활을 하면서 낡고 허름한 집에 살긴 했지만 그래도 방은 깨끗하게 치우고 살았다.

    역천검과 봇짐을 내려놓은 그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속옷은 한쪽에 몰아 놓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음식물 찌꺼기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묻었다.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네. 그런데 이제 뭐 하지?”

    정천우는 방을 다 치우고 나자 할 일이 없어졌다.

    제럴드와 달리 정천우는 잠을 실컷 잤다. 술을 마셨다지만 워낙 맹탕이라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입맛을 다신 정천우는 제럴드의 옷으로 갈아입고, 벗어 둔 진선문의 무복과 제럴드의 속옷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

    파바박! 쉭, 쉬익! 파방! 팡!

    ‘누가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구는 거야?’

    한창 달게 자던 제럴드는 잠결에 들려오는 파공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억지로 더 자려고 했지만 한번 잠에서 깨어나자 밖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이 점점 더 귀에 거슬렸다.

    “에이, 씨! 어떤 새끼가 남의 집 앞에서 지랄하는 거야?”

    제럴드는 날카로운 소리를 더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시하고 자기엔 너무나 거슬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방을 나와 출입문을 열었다. ‘어떤 개자식이야!’라고 소리치려던 제럴드는 움직임을 딱 멈추고 입을 쩍 벌렸다.

    마나 쉐도우(중원에서 말하는 검기).

    정천우가 마나 쉐도우를 담아 역천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마나 쉐도우가 분명했다.

    정식기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 쉐도우. 그것을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제럴드였다.

    ‘똥 밟은 거 아냐?’

    제럴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천우가 기사인 줄도 모르고 그를 막 다뤘다. 아무런 기세도 느낄 수 없어 기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실력자를 함부로 대했으니 혹시라도 그가 딴마음을 먹으면 큰일이다.

    “어이! 천우! 뭐 해? 검술 수련하는 거야?”

    제럴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행동이었다.

    “일어났어? 자꾸 딴생각이 나서 몸 좀 푸는 중이야.”

    정천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이 생각나 머리가 복잡했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마음을 주겠다고 한 여자다.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세상에 떨어지게 된 것인지 고민하다 보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피붙이 하나 없는 중원이라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딱히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진미령만큼은 계속해서 정천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더욱 무공 수련에 정성을 쏟았다.

    “기사였냐?”

    “기사? 그게 뭔데?”

    “기사를 몰라? 방금 마나 쉐도우를 사용했잖아.”

    “마나 쉐도우? 그건 또 뭔데?”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다 깬 얼굴로 와서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해 대는 제럴드가 그저 이상할 뿐이었다.

    “이제껏 검에다가 마나 쉐도우를 씌웠었잖아!”

    “검에 씌워? 이거?”

    정천우는 내공을 역천검에 주입했다.

    흐릿한 뇌전의 기운이 검날을 타고 검기를 형성했다. 21년의 내공으로는 이게 한계다. 대주천을 이루었다면 달랐겠지만 말이다.

    “그래! 마나 쉐도우가 맞잖아! 너 혹시 다른 나라에서 기사였냐?”

    제럴드는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런 실력자가 세상을 너무 모르고 있어서 더 수상하다.

    왕궁에서 어릴 적부터 기사로 키운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혹시 왕족이라면 더욱 큰일이었기에 제럴드는 더욱 정천우가 조심스러웠다.

    ‘마나 쉐도우라는 게 검기를 말하는 거였군.’

    “기사라는 건 또 뭔데?”

    정천우는 검기의 명칭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라는 말이 어쩌면 무인이나 표사 같은 걸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라는 건 너처럼 마나 쉐도우를 사용할 줄 아는 강한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강해? 내가?”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원에서는 무인들에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다. 무인들은 차라리 일반인을 대우하면 대우했지, 낭인들을 만나면 무인의 수치라며 무시한다.

    그렇게 살아온 자신더러 강하다고 말하는 제럴드가 이상했다.

    하지만 곧 이해가 갔다.

    제럴드는 경비병이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중원으로 따지면 지방군 정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다.

    중원의 일반인들이 뒷골목의 삼류 건달조차 무인이라며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 우리 영지의 하북팽가 안에서도 기사는 고작해야 100명 정도거든.”

    “100명? 겨우?”

    “그것만 해도 많은 거야! 이웃 영지인 무당파도 그러니까.”

    “무당파?”

    정천우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무당파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팽진옥이 하북팽가를 세웠다는 건 아침에 같이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하북팽가 백작은 팽씨 성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하북팽가만 해도 놀라운데 무당파까지 거론되자 정천우의 얼굴엔 점점 의구심이 커졌다.

    “원래 벽력대제 팽진옥 대공께서는 검술서를 여러 개 가지고 계셨어. 그분이 가르치던 제자들이 검술서를 하나씩 가지고 흩어진 거야. 제자들이 공을 세우면서 왕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가문을 만들었어. 그중의 하나가 바로 무당파야.”

    ‘어쩐지 무공 비급이 하나도 없다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

    정천우는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속에 있던 백골은 얼추 100구에 가까웠다. 그런데 무공 비급이 하나도 없다 했더니, 팽진옥이라는 사람이 몽땅 들고 나간 모양이었다.

    ‘그럼 혹시……?’

    “너도 검술을 할 줄 알아?”

    “당연하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가 주특기야.”

    “오호단문도?”

    오호단문도가 이곳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니. 정천우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오호단문도는 하북팽가의 독문무공으로,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날뛰는 모습처럼 포악하고 힘이 넘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 무공을 제럴드가 익히고 있다?

    “보여 줄 수 있어?”

    “나보다 실력 좋은 놈 앞에서 쪽팔리게 왜 그러냐?”

    외인에게 무공을 보일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단지 쪽팔릴 뿐이라니?

    팽진옥이 말과 무공을 가르쳤다고 하지만 무림의 법도까지 전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해 봐.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뭐, 굳이 보고 싶다면야…….”

    말로는 하기 싫은 척하면서도 제럴드는 집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검을 들고 나왔다.

    비록 도(刀)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크기의 검이었다. 저런 형태의 중검(重劍)이라면 도법을 펼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싶었다.

    “후읍!”

    제럴드가 검을 쥐고 기수식을 잡아 갔다. 순간,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똑같다!

    낭인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한번 보았던 하북팽가 무인의 기수식과 일치한다.

    ‘저 자세에서…….’

    정천우가 놀라움을 감추고 기수식에 이어 초식을 펼치려는 제럴드의 움직임을 좇았다.

    한 걸음 크게 내디딘 제럴드가 사선으로 베고는 그대로 전진하면서 도끼로 장작을 패듯 검을 내리찍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상체를 회전시키면서 수평으로 베었다.

    단단하고 강인한 근육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펼치다가 오히려 자신이 다칠 만큼 난폭한 도법.

    ‘똑같다! 저건 진짜 오호단문도야!’

    정천우는 입을 쩍 벌린 채 제럴드가 움직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후욱, 훅! 에구구구, 오랜만에 하려니까 힘드네. 잘 봤어?”

    “그래, 확실히 오호단문도인 것 같다. 그런데 왜 내공을 사용하지 않지?”

    “내공?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얘기잖아. 너처럼 검에 마나 쉐도우를 씌울 수만 있어도 대단한 거야.”

    제럴드가 피식 웃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 냈다.

    “전설?”

    “그래. 오호단문도를 사용하면 검에서 번개로 이루어진 호랑이가 나온다는 설명은 있지만, 그게 말이 돼? 벽력대제의 오호단문도는 그랬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제럴드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호단문도의 교본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지만 너무나 허황된 말이었기에 제럴드도 그 대목을 읽으면서 키득거렸던 게 생각났다.

    “설명? 잠깐! 혹시 오호단문도 비급…… 아니, 책이 너한테 있어?”

    정천우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명을 보았다는 것은 제럴드가 직접 보았다는 말이다.

    “당연하지, 우리 하북팽가 영지병의 기본 검술이니까.”

    “보, 보여 줄 수 있어?”

    정천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전륜공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무공은 하북팽가의 무공이다. 하북팽가의 내공이 뇌기(雷氣)를 바탕으로 하는 혼원벽력신공이니까 말이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보여 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반드시 볼 생각이었다.

    오호단문도와 같은 무공 비급을 가졌다는데야, 이런 놈 하나 겁주는 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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