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Chapter 3. 깨어 보니…… (2)
‘진 소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도 진미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드시, 반드시 이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그런 생각도 잠시, 정천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
“어이, 어이! 일어나시오.”
한창 달게 자는데 우렁찬 목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어젯밤에 보았던 제럴드라는 사람이다. 고맙게도 아침을 챙겨 온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빵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생소한 형태의 물건이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음식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안녕하셨습니까?”
“거 넉살도 좋소. 아침 먹고 하북팽가로 갑시다.”
“네? 하북팽가?”
정천우는 그릇과 빵을 받아 들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하북팽가’라는 말에는 그의 평정심이 깨지고 말았다.
하북팽가라니……
그렇다면 이곳을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면 부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색목인.
괴상한 상황이 눈을 뜨자마자 이어지니 정천우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하북팽가를 모르시오?”
“아니, 잘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하북팽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놀라워서 그런 겁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정천우는 대충 둘러댔다. 확실한 것은 직접 하북팽가에 가 봐야만 알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러셨소? 너무 긴장할 것 없으니 마음 편안히 먹어도 되오. 어서 식사나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정천우는 꾸역꾸역 숟가락으로 멀건 탕(?)을 떠먹었다. 색목인들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속이 느글거리는 느낌은 있긴 해도 먹을 만은 했다.
‘어쩐지 느낌이 싸하네?’
빵을 뜯어 먹으면서 정천우는 뭔지 모를 찜찜함이 남았다. 마치 큰일을 보고 뒤를 처리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길 기다린 사람처럼 스푼을 내려놓기 무섭게 제럴드가 찾아왔다.
“이제 나오시오. 하북팽가의 영주관으로 들어가야 하오.”
“영주관? 그게 어딥니까?”
처음 들어 보는 말에 정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북팽가에 영주관이라는 게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심문하려면 집법당에 가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뜬금없이 영주관이라 하니 정천우가 당황했다.
아니, 영주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나 생소하기만 하다.
그러자 제럴드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영주관에서 당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오. 다른 영지의 첩자라면 각오해야 할 거요.”
제럴드는 정천우를 아래위로 훑으며 수상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난 첩자 따위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장서십시오.”
정천우는 최대한 당당해 보이기 위해 어깨를 펴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이었기에 정천우는 태연할 수 있었다.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육체로 자신의 경공을 따라올 수 없으니까.
제럴드는 한참 동안 정천우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럴드는 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오는 것부터가 믿음이 갔다.
“뭐, 당신의 정체는 하북팽가에 가면 알게 될 일이니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이 검은 신분이 증명되면 돌려주는 것으로 하겠소.”
“그렇게 하십시오.”
정천우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사실 이렇게 가느다란 끈과 수갑은 내공을 사용하면 끊을 수 있다. 혈도를 제압당하지도 않았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일이야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감옥을 나섰다.
그러나 이내 입을 쩍 벌렸다.
“무슨…….”
이제껏 자신이 봐 온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항주에서 가끔 보았던 색목인들의 전형적인 옷차림과 비슷했다.
건물들은 또 어떠한가!
나무로 기둥을 세웠지만 벽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이런 씨부랄! 진짜 다른 세상이라는 거냐!’
하북팽가라고 해서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던 게 바보 같았다.
하북팽가는 말 그대로 하북성에 있다.
하북성의 풍물은 심심치 않게 들었다. 비록 주루나 객잔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파는 매담자(賣談者)를 통해서지만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들은 것과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다. 하북성에 이렇게나 많은 색목인이 살고 있을 리도 없고, 이런 식의 건축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정신을 잃은 곳과 하북성은 하루 이틀 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늦겠소. 타시오.”
“아, 예, 예!”
정천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리번거리자 제럴드가 등을 떠밀어 마차에 태웠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정천우는 쉴 새 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곳이 하북팽가요.”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정천우는 멍한 얼굴로 제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럴드가 하북팽가라고 말한 건물은 하나의 커다란 성이었다.
중원의 성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다.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멋스러움이라곤 전혀 없다. 그저 위압적이기만 한 건물이었다.
전쟁에서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는 있게 생겼지만 어느 모로 봐도 무림세가의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멍한 눈으로 하북팽가라 주장하는 성을 바라보다가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성문 위에 조각된 글을 발견하고 나서다.
<하북팽가(河北彭家)>
성문 위에는 그 네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입니까?”
“위대한 하북팽가가 있는 곳, 동대륙 레무리아 왕국의 영지 중 하나요. 우리 영주님의 고귀하신 존함은 팽선웅 백작님이시오.”
제럴드가 말을 마치는 순간 정천우의 머리는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그가 하는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들은 말이라고는 저 무식하게 덩치만 커다란 성이 하북팽가라는 사실뿐이다.
전혀 믿어 주고 싶지 않은…….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하북팽가라고 했잖소.”
“음…… 혹시 명나라는 알고 있습니까?”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정천우가 물었다.
이젠 놀라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반사적으로 묻는 거다.
“지금 날 놀리는 거요? 명나라는 벽력대제 팽진옥 대공이 태어나신 전설 속의 나라가 아니오?”
“전설 속의 나라?”
정천우는 뜻밖의 대답에 제럴드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으로 보아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기운이 쪽 빠지는 기분에 정천우는 할 말을 잃었다. 괜히 더 물어봐야 머리만 더 아플 것 같았다.
제럴드도 이내 관심을 접고 마차를 모는 일에 전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자, 자! 이제 내려야 할 때요. 궁금한 것은 첩자 혐의가 풀리거든 실컷 물어보시오.”
제럴드는 성문 앞에 마차가 서기 무섭게 정천우를 내리게 했다.
하북팽가 앞을 지키는 문지기의 모습에 정천우는 또 한차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문지기들은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움직임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뛰기라도 했다가는 쉽게 지칠 것 같았다.
‘저런 걸 입고 경공을 펼칠 수 있을까?’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경공을 발휘할 수 있다고 쳐도 소음이 일어나 적에게 쉽게 발각당할 것이다.
“들어가라!”
철갑을 두른 문지기가 위압적으로 소리치자 제럴드가 정천우를 묶은 끈을 쥐고 앞장섰다.
성의 안쪽은 더욱 놀라웠다.
바깥에서 봤을 때는 위압적이기만 한 성이었는데 안쪽에는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지어져 있었다.
“뭘 하는 거요? 빨리 끝내고 쉽시다.”
“예, 예!”
정천우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럴드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뒤를 따르면서도 눈은 쉬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그 덕분에 지금 있는 곳이 중원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저곳이 영주관이오. 멜로스 셰리프 님이 묻는 말에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멜로스 셰리프(Sheriff, 중세의 법집행관)? 그건 또 뭡니까?”
정천우는 생소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당신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아니오? 멜로스 님은 하북팽가의 셰리프를 맡은 분이니 조심하시오. 셰리프는 법을 집행하는 직책이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으니 어서 올라갑시다.”
제럴드는 귀찮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재촉했다. 두 사람은 돌로 지은 커다란 건물의 3층으로 올라갔다.
똑, 똑, 똑!
“들어오십시오.”
제럴드가 노크하자 안에서 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천우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가볍게 놀랐다. 중원의 사람과 닮아 있었다. 제럴드와 달리 검은색 머리카락에 피부가 동양인 특유의 밝은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어젯밤에 목책을 통과한 사람이 바로 저자인가?”
“그렇습니다, 멜로스 셰리프! 첩자라면 위험하기에 데리고 왔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자네는 잠시 여기서 기다리게. 그리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
멜로스가 고압적인 자세로 정천우에게 손짓했다.
정천우는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수틀리면 박살 내고 도망칠 생각이라도 수틀리기 전까지는 따라 줄 생각이었다.
맨 끝 방에 가서야 멜로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법사가 너를 증명할 것이다. 들어가라!”
“예.”
‘마법사? 그건 또 뭐야?’
정천우는 짧게 대답하고 수갑을 찬 손으로 어렵게 문을 열었다.
마법사라는 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긴 한데 대체 뭐하는 작자인지 알 수 없었다.
‘정 안 되면 조지고 튀지, 뭐.’
문을 열면서 정천우는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모았다.
“이리 와 앉아라!”
대략 불혹(不惑)의 나이로 보이는 음침한 얼굴의 사내가 손짓하며 명령조로 말했다. 정천우는 불쾌한 기분이 들기는 해도 일단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ŊŦБ£…… 진실의 서약!”
음침한 얼굴의 사내가 웅얼거리더니 손바닥을 펼쳤다.
‘뭐지?’
정천우는 음침한 얼굴의 사내가 뭐라 중얼거리는 순간, 이상한 기운이 덮치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몸을 일으켜 턱을 찰 뻔했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기운이라 그냥 놔두었다.
“첩자인가?”
“아닙니다.”
“혹시 도망쳐 나온 노예인가?”
“노예가 뭔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건 넘어가고, 범죄자나 혹은 도망자인가?”
음침한 얼굴의 사내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고는 질문을 이어 갔다.
“아닙니다.”
“됐어! 이걸 가지고 나가 봐!”
음침한 얼굴의 사내는 파란색 종이를 내밀고는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싶었던 정천우가 파란색 종이를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풀어 줘!”
“예, 멜로스 셰리프.”
정천우가 파란색 종이를 들고 나오자 멜로스가 제럴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죠?”
“뭐긴 뭐겠소? 무죄가 입증된 거지.”
“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만?”
“마법사님이 파란색 종이를 준 것 아니오?”
“저 안에 있던 사람이 파란 종이를 준 건 맞습니다.”
“그럼 된 거요. 의심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오.”
“예?”
정천우는 대체 이 인간이 뭔 개소리를 지껄이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럴드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수갑과 끈을 풀어 주었다.
“됐고, 당신이 너무 모르는 것 같으니 그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영지를 떠날 거요, 아니면 남을 거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떠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여기에도 하오문 같은 곳이 있으려나?’
정천우는 가장 먼저 이곳 세상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역천검에서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럼 나갑시다. 신분증은 당분간 그 종이로 대신할 거요. 돈은 있소? 그 임시 신분증을 가지고 나가려면 수수료를 내야 하오만.”
제럴드가 역천검을 돌려주며 물었다.
정천우는 그 말에 곧바로 등에 멘 봇짐을 풀었다. 의뢰의 대가로 받은 금자가 남아 있었다. 정천우는 그중 하나를 꺼내 제럴드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됩니까?”
“이상하게 생긴 금화잖아?”
제럴드는 금자를 받아 들고 이로 가볍게 씹어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불순물이 많아서 제값 받긴 글렀소. 멜로스 셰리프! 이걸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래, 가 봐!”
멜로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나가라는 듯 손짓을 해 댔다.
제럴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천우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섰다.
“나이가 몇이나 되었소?”
“스물셋입니다.”
“오! 그렇게 안 생겼는데 동갑이잖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제럴드는 귀찮은데 잘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천우가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무엇보다 정보가 절실했기에 제럴드를 통해 이 세상을 알아 갈 생각이었다.
“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에이! 이 친구, 왜 이래? 같이 말 놓아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술이나 한잔하지? 물론 술값은 네가 내고. 어때? 네가 물어보는 거 대답해 주느라 목이 많이 마르거든. 너 때문에 밤새워 근무하고도 쉬지 못했으니 위로는 해 줘야 싸나이지. 안 그래?”
제럴드는 은근슬쩍 어깨동무까지 해 가며 친근하게 굴었다.
‘재미있는 친구네?’
정천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는 행동이 화의룡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럴까?”
정천우도 스스럼없이 대답하고는 하얀 이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타고 온 마차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하북팽가라고 자칭하는 성을 떠나 목책 근처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