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화 (9/200)
  • # 9

    Chapter 3. 깨어 보니…… (1)

    동굴.

    사방이 꽉 막힌 곳이다. 희미한 빛이 천장에서 새어 들어 어슴푸레하게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으으으…….”

    정천우는 온몸에서 전해지는 통증 탓에 신음을 흘렸다. 의식이 없는데도 숨을 내쉴 때마다 괴로운 신음이 끊임없이 섞여 나왔다.

    “크헉! 제기랄! 제기랄! 빌어먹을!”

    고함을 지르며 눈을 뜬 정천우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에 욕설을 터트렸다.

    기절한 동안에 악소추가 준 단약의 효과가 떨어져 후유증이 일어난 것이다.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느낌을 멀쩡한 정신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으아아아악! 니미럴! 끄아악…….”

    정천우는 육신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고통은 악소추가 말해 준 것보다 훨씬 오래 이어졌다. 거의 한나절을 꼬박 바닥에 뒹굴고 나서야 고통이 사라졌다.

    “씨발, 헉, 헉…… 뒈, 뒈지는 줄 알았잖아.”

    정천우가 숨을 헐떡이며 투덜거렸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조차 싫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이번엔 두통이 밀려와 그를 괴롭혔다.

    위기의 순간에 벼락을 얻어맞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춰졌다. 심지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빗물까지 멈췄다.

    정신을 잃기 전, 천상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시간을 빌려 간다.’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

    지금 가장 강하게 생각나는 건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진미령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멈춰 버린 그녀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제기랄!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정천우는 뒤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욕설을 터트렸다.

    분명 진미령과 동굴에서 나와 복면인들과 대치했었다. 역천검을 절벽 밑으로 집어던지려는 순간에 불이 번쩍하더니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 온몸을 맷돌에 넣고 갈아 버리는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다시 동굴 속에서 눈을 떴다.

    무슨 조화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으윽!”

    정천우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뼈마디가 부서지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꾹 참고 허리와 무릎을 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건 또 왜 여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정천우가 은은한 빛을 뿌리는 역천검을 쳐다보았다.

    역천검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 비슷한 곳에 놓여 있었다. 분명 허공에서 빛을 뿌리며 자신의 내공과 공명을 일으켰던 물건이었다.

    여기 어디고, 왜 역천검이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복면인들이 장난을 치는 거라면……

    이건 정말 지독한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진 소저!”

    정천우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자신의 뒤에 숨어서 두려움에 몸을 떨던 진미령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모든 것이 멈춰지고,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이렇게 황당한 상황…….

    정천우는 일단 주변부터 살폈다. 사방이 꽉 막혀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경우야! 대체 이곳은 어디지?”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큭! 이건 또 무슨 냄새…… 헉!”

    한참 동안이나 버럭버럭 욕설을 터트리며 짜증을 부리던 정천우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몇 걸음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어두운 동굴이라 발견하지 못했다가 썩는 냄새 때문에 인식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옷을 입은 시체였다.

    정신을 차리고 눈에 내공을 넣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체 외에도 인간의 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런 젠장! 여긴 대체 뭐야!’

    섬뜩한 느낌을 누르고 시체에 다가갔다. 자신이 입은 진선문의 무사 복장과 같은 옷이었기에 누군지 궁금했다. 진미령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체형이 달랐다. 그리고 부패가 진행되어 악취가 심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낭인촌에 찾아왔던 진선문 무사 중에는 이런 사람은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당시 낭인촌을 찾았던 사람 중에 백발이 성성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천우는 조심스럽게 시체의 품을 뒤졌다.

    “진……철……운? 진 소저의 아버지잖아? 왜 여기에…….”

    정천우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체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진선문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옥패였다. 거기에는 진철운이라는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다.

    진미령에게 들은 바로, 그의 아버지 진철운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새카맣게 타 죽은 시체는 자신이 진철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천우는 다른 백골들을 향해 다가갔다. 입었던 옷은 삭아서 넝마가 되었지만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왜 이것들이 여기에 있지?”

    물건들을 살피던 정천우는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한 명성을 휘날리던 사람들의 소지품들이 지금 그의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는 자그마치 무림맹주의 신물도 있었다. 말로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는 구경도 해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칠채보옥환(七彩寶玉環)과 용봉패(龍鳳牌).

    10년 전에 당시의 무림맹주 옥진영과 함께 사라진 물건들이었다.

    칠채보옥환은 끼고 다니면 내공을 정화시켜 순수하게 바꿔 준다는 팔찌다. 용봉패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주의 신물이었다. 품에 지닌 채로 내공을 수련하면 평소보다 더 많은 내력을 쌓게 해 준다는 귀한 물건이다.

    그런 용봉패를 감싼 금으로 만든 장식에 ‘무림맹주 옥진영’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었다.

    그 외에도 한때 유명했던 사람들의 물건들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정천우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곳에 너부러진 백골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역천검의 저주를 받아 사라졌다고 알려진 인물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역천검의 주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말인데…… 난 왜 안 죽였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다른 백골들은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옷 외에는 남아 있는 소지품도 없었다.

    그러나 진미령의 아버지인 진철운의 시신을 비롯해 십여 구의 백골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금자나 녹슨 무기도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두 부류 사이에 차이점이라는 게 있는 듯 보였다.

    다만 이름난 무인이라면 심득을 기록하기 위해 늘 품에 지닌다는 비급은 발견할 수 없었다. 진철운의 몸에서는 진선문의 비급이 나왔지만 정천우는 자신과 맞지 않는 내공심법이었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의 품에서 나온 물건치고는 초라한 수준이기도 했다. 공짜로 이만큼이나 챙겼으니 나쁘지 않은 일인 건 분명하지만 말이다.

    “일단 장인어른부터……”

    정천우는 진철운의 시신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진미령은 자신의 여자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할지 걱정되었다.

    주변에 너부러진 병기를 들고 땅을 파 나갔다.

    “휘유! 다 끝났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정천우는 진철운의 시신을 매장하고서도 쉬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놓인 백골들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보낸 것이다.

    다른 백골과 마찬가지로 한쪽에 가지런히 옮기는 것으로 정리 끝이었다.

    백골들을 다 정리하고 나니 밖으로 나갈 방법이 걱정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정천우가 복잡한 표정으로 제단에 다가갔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역천검이 놓여 있는 곳이다.

    “이거, 어디서 본 글자 같긴 한데.”

    역천검이 놓인 돌로 만든 제단 위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글자의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항주에서 간간이 보았던 색목인들이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사용하는 걸 보았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자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천우는 제단 위에 놓인 역천검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지잉! 우우우웅…….

    역천검을 손에 쥔 순간, 괴이한 진동음과 함께 동굴 내부가 흔들렸다.

    “또 무슨 일이야!”

    정천우가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제단에 새겨진 글자와 역천검에서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큭…….”

    정천우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단전의 내공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마구 날뛰던 기운이 혈도를 타고 흘러나가더니 역천검에 흘러들었다.

    [시공간을 넘어 선택받은 자여!]

    “이 목소린?”

    정천우가 놀란 얼굴로 사방을 휘저으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눈에 내공을 집중해 사방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대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려거든, 나 키아벨리아스를 찾아오라!]

    “뭐? 키아 뭐? 너 뭐하는 놈인데? 야! 인마! 어이! 대답 안 해?”

    정천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키아벨리아스를 찾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동굴 속의 진동만 더욱 강해졌다.

    드드드드…….

    정천우가 놀랄 사이도 없이 동굴의 한쪽 면이 열리기 시작했다. 밖은 어두웠다. 그러나 동굴 내부보다는 훨씬 밝았다.

    정천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단전의 내공을 일깨웠다. 무슨 도깨비놀음인지는 몰라도 출구가 생겼으니 나가야 한다.

    문제는 밖에 뭐가 있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다리에 내공을 보내고 역천검의 손잡이를 굳게 잡았다. 내공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압축해서 용천혈(발바닥의 혈도)에 쌓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압축했다가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차앗!”

    정천우는 기합을 지르며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으로 뛰쳐나갔다.

    몸을 날리면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동굴을 빠져나올 때까지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뭐, 뭐야?”

    바닥에 착지한 정천우는 고개를 들었다가 허탈한 음성으로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여기는 대체…….”

    정천우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파란 달.

    시인(詩人)들이 말하는 은유적인 표현의 청월(靑月)이 아니었다. 염료로 물들인 듯 새파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큰 보름달이었다.

    꼭 도깨비장난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이게 말이 돼?”

    정천우는 동굴 안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그르르릉…….

    등 뒤에서 돌 갈리는 소리를 내며 동굴 입구가 닫혔다. 천연의 바위가 입구를 가려 동굴이 있었는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위장됐다.

    다시 동굴의 입구를 열 수 있나 살펴보았지만 들어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진 소저는 어떻게 된 거지?”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 정말 괴상한 목소리의 말처럼 이곳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인가?

    “젠장! 골치 아프네! 대체 뭐야? 야! 나와 봐! 이봐!”

    정천우는 역천검을 흔들며 누군가를 불러 댔다.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존재는 그 괴상한 목소리의 주인공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튼튼해 보이는 평범한 검의 모습이었다. 아까처럼 빛이 나지도, 진동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아무 반응 없는 역천검을 노려보다가 정천우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동굴 밖은 특이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정천우는 가까이 다가가서 석상 받침에 음각된 글을 읽었다.

    ‘위대한 무인인 벽력대제 팽진옥을 기리며 석상을 남기다? 뭐야? 다른 세상이라며?’

    정천우는 팽진옥이라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세상이라면서 잔뜩 겁을 주더니 석상 받침에 새겨진 글은 중원의 글이었다.

    하지만 이내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팽진옥이라는 이름을 곱씹어 보고 난 뒤의 일이다.

    팽진옥은 40여 년 전 하북팽가의 가주로서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 역시 역천검의 저주를 받아 비가 오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으윽! 머리만 복잡해지는 기분이야.”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뭔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천우는 길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다져진 산길이다.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일단은 사람들을 찾는 게 우선이다.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사람부터 만나야 한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정천우가 단전의 내공을 다리로 보내며 땅을 박찼다.

    ***

    “불빛?”

    정천우는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어서자마자 두 눈에 들어오는 불빛을 확인하고는 긴장감을 높였다.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해졌다.

    인간이란 때론 맹수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니까.

    파란색의 달이라고 해도 크기가 커서 그런지 상당히 밝았다. 몸을 숨기지 않고서는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기척을 죽이면서 불이 밝혀진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색목인들?’

    정천우는 뜻밖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은 중원인이 아니었다.

    단단해 보이는 나무를 일렬로 땅에 박아 벽처럼 세워 놓은 구조물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구조물 위에서 푸른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은색 머리의 남자 둘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난 진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인가?’

    점점 더 정천우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여자에게 자신의 허접한 말발이 먹혔다.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괴상한 현상을 경험해야만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진미령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지금 안전할까?

    정신을 잃기 전,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춰진 것을 생각하면……

    ‘후…… 모르겠어.’

    정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괴롭히는 수많은 상상과 씨름하는 정천우의 귀에 경계를 서는 색목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수잔하고 재미 좀 봤어?”

    “자식이, 당연하잖아. 내가 누구냐! 그냥 자빠뜨렸다는 거 아니야! 아주 죽이더만!”

    “좋은 건 나눠 먹어야지. 혼자 홀라당 따먹으니까 좋냐?”

    “여자가 무슨 열매냐? 따먹게? 넌 인마,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여자 막 대하다가 언제 한번 크게 델 거다.”

    목책 위에서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수컷 아니랄까 봐 음담패설이 줄줄이 이어졌다.

    ‘지랄하고 자빠…… 잠깐, 색목인이 중원의 말을 써?’

    정천우는 색목인들이 하는 말에 혀를 차며 피식거리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중원의 말이 능숙해도 너무나 능숙하다. 색목인들을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중원인들의 대화로 착각할 정도다. 실제로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눈에 내공을 밀어 넣어 시력을 돋구었다. 색목인들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외공(外功)만 좀 익혔어. 꼭 관청의 병졸들처럼.’

    그마저도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정천우의 눈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이어지는 색목인의 대화는 무척이나 일상적이었다. 올해는 수확량이 적다는 둥, 세금이 무겁다는 둥 하는 이야기였다.

    얘기를 들을수록 이곳은 확실히 중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주’라느니 ‘섹스’라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단어들이 난무했다.

    인정해야 한다.

    이곳은 자신이 살던 곳…… 아니, 최악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인정해야 한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정천우는 일부러 멀찌감치 갔다가 손을 머리 위에 얹고서 목책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목책 위에서 경계를 서는 색목인들이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후우…….’

    정천우는 상대의 반응에 속으로 안도했다. 만약 공격부터 했다면 조금 번거로워졌을 테니까.

    이들의 반응은 중원의 화전민들과 비슷하다. 경계하고 정체를 묻는다. 무림과 얽힌 사람들이 보일 만한 반응은 아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천천히 다가오시오! 허튼짓하면 쏘겠소!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목책 위에서 색목인들이 연노(連弩)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겨누며 소리쳤다.

    연노의 모습을 확인한 정천우는 더욱 긴장이 풀어졌다. 연노라는 건 군대에서나 사용하는 물건이다. 저런 물건으로는 무공을 배운 사람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수십 발을 한꺼번에 쏜다면 몰라도.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신분증을 달라고 하지 않았소?”

    색목인들은 정천우가 협조적으로 나오자 약간은 긴장을 풀고 물었다. 하지만 연노를 거두지는 않았다.

    “신분증이 없습니다. 납치당했다가 깨어 보니 이상한 곳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불빛을 보고 걸어왔으니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좋소! 그럼 사람이 나갈 테니 무릎을 꿇고 순순히 묶이시오. 그러면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소.”

    정천우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색목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타협안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정천우는 순순히 대답하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목책의 문이 열렸다. 여전히 2명의 색목인이 목책 위에서 연노를 겨누고 있었다.

    목책 밖에 나온 2명의 색목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정천우를 단단히 묶었다. 쇠로 만든 수갑까지 채웠는데 수갑의 표면에는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색목인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다시 목책의 문을 열었다.

    이곳 세상에서는 강호의 무림인에 해당하는 기사라는 존재를 구속하는 기구가 바로 수갑이다.

    그러나 정천우는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저 손이 조금 더 불편한 정도였다. 내공을 사용하면 언제든 끊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목책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쪽 건물로 정천우를 데려갔다. 그 안에는 철창으로 이루어진 감옥이 있었다.

    “나는 제럴드라는 사람이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위에 보고할 테니 불편하더라도 이해하시오.”

    처음 정천우에게 연노를 겨누며 말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제럴드는 감옥의 문을 잠그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천우는 새삼스럽게 통증을 느꼈다. 기력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피곤해…….’

    긴장이 풀려서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으로 일어나 머리를 너무 많이 써 댄 게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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