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8화 (8/200)

# 8

Chapter 2. 역천검(逆天劍) (5)

이렇게 비가 올 때는 은사를 사용할 수 없다. 빗물 때문에 발각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가장 살상력 높은 효과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정천우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많다면 좀 더 악랄하고 확실한 덫을 놓았겠지만 시간이 부족해 간단한 것들로만 설치했다.

‘전륜공이 이럴 땐 고맙네.’

정천우가 마지막 덫의 설치를 끝내면서 길게 숨을 내뿜었다.

전륜공에는 움직이면서도 내공을 회복할 수 있는 동공의 효능도 있다.

삼류 내공심법인 전륜공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아직도 악소추가 준 단약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으로 반 시진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았다.

덫을 모두 설치한 정천우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진미령을 찾았다. 자신이 도망가진 않았을까 걱정하는지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갑시다. 머지않아 다시 쫓아올 겁니다.”

정천우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아까 사고 친 것 때문에 민망해서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두 사람은 나뭇가지와 튀어나온 돌을 밟으면서 이동했다.

“후욱, 훅! 후욱…… 쉬, 쉬었다가 갑시다.”

일각 정도를 달린 후, 정천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공이 고갈되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함정을 설치하며 내공을 회복시키긴 했지만 역시 운기행공에만 전념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단약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쓰러져도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진미령은 정천우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은 아직 여유가 있는데 남자인 정천우가 겨우 일각 만에 먼저 내공이 고갈될 줄은 몰랐다. 일개 낭인의 무공 수준이란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숨 좀 돌리겠습니다. 소저도 몸을 추스르십시오.”

정천우는 지친 얼굴로 헐떡이다가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번에야말로 내공을 최대한 보충할 생각이었다.

‘대주천만 완성했어도 이렇게까지 허덕이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정천우는 속으로 자신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한탄하면서도 이내 운기에 빠져들었다.

‘이상한 사람…….’

진미령은 정천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낭인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들에게는 법과 정의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뭔가 달랐다.

관심 없는 척 행동하면서 자신을 흘깃거렸다. 다른 남자들처럼 끈적거리는 음흉한 눈빛이 아니었다.

아까의 황당한 고백에 진미령이 곧바로 화를 내지 않은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챙긴다. 남궁석과 위진충의 희생에서 눈을 돌리게 해 줬고 건량도 나눠 주었다.

복면인들에게 자신과 역천검을 넘긴다든가, 자신을 미끼로 놓아두고 혼자서만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대로 돌아와 주었다.

아까의 고백도 사실은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아버지 같다. 그렇다. 이 사람의 행동은 아버지를 닮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정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헉!”

정천우는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다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진미령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놀란 것이다.

진미령 역시 깜짝 놀랐다.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서 운기조식을 취한다기에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반 각 만에 그가 눈을 떴다. 역천검 때문에 사라진 아버지가 떠올라 잠시 멍해진 게 실수였다.

그녀는 어색함에 살짝 얼굴을 붉혔으나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다시 도망칠 시간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콰광! 쾅!

“걸려든 모양입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데 때마침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덫에 걸어 놓은 진천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이십여 개의 덫을 설치했는데 그중에서 진천뢰가 설치된 덫에 걸린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진천뢰가 설치된 덫을 건드렸다는 건 최소한 한 명은 확실하게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의미다. 게다가 적들의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이다.

“쉴 곳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정천우는 진미령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발견하고는 은신할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도망만 다니다간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판이다. 차라리 은신할 곳을 찾아 숨었다가 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길 바라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숨어 있다가 어둠을 이용해 도주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견뎌 주십시오.”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진미령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 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정천우는 이동하다가 방향을 꺾었다. 추적에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 목적지를 정해 놓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은신할 수 있는 곳,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진천뢰가 이제야 터졌다는 것은 그래도 추격자를 상당히 따돌렸다는 의미다. 조금만 더 거리를 벌리고 은신하면 추적자들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빗속에서 도주한 사람 둘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안심할 정도는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먼 거리를 따돌렸습니다. 이제 안전한 곳에서 체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왼쪽을 살필 테니, 소저께서는 오른쪽을 살펴 주십시오.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볼게요.”

진미령은 경공을 펼치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저들이 쫓아왔다는 것은 남궁석과 위진충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해야만 한다.

“저기! 저기 좀 보세요.”

“가 봅시다.”

정천우는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방향을 틀었다. 비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한쪽은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고, 절벽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의 입구는 정천우의 허리 높이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낮고 작았다. 동굴 입구를 나무와 풀로 가리면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사냥꾼이 사용하던 곳 같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쉴 수 있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위장해 둘 테니 안에서 좀 쉬십시오.”

동굴의 내부를 살피며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이었다. 한쪽에는 약간이지만 장작까지 쌓여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두 사람에게 최고의 은신처였다.

“저도 도울게요.”

“제가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불을 피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천우는 협봉검 한 자루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동굴 주변에도 나무가 자라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들추지 않는 이상은 찾을 수 없을 만큼 입구를 교묘하게 가렸다.

***

“대충 옷이 말랐으니, 불을 꺼야 합니다.”

“네, 그래야죠.”

진미령이 아쉬운 얼굴로 모닥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천우는 동굴 바닥의 흙으로 불을 덮어 껐다.

오래도록 비를 맞은 탓에 몸이 으슬으슬했지만 추격자에게 발각되어 죽는 것보다 추운 게 낫다.

“힘들더라도 먹어 두십시오.”

정천우는 봇짐에서 하나의 물건을 또 꺼냈다. 역시나 기름종이에 싸인 건량이었다.

모닥불을 쬐는 동안 진미령이 눈물을 뚝뚝 흘려 대는 통에 정천우는 기분이 찜찜했다. 눈앞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으니 눈이 호강한다고 좋아해야 하는데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서 웃을 수는 없었다.

불을 끄는 바람에 우는 모습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우울해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팔자에도 없는 매담자(賣談者, 이야기꾼) 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대부분이 낭인 생활을 하면서 겪어 온 일들이었다.

진미령은 정천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닥쳐온 불행과 가족의 죽음에서 비롯한 울음을 참기 위해서라도 정천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낭인들은 참 자유분방한 것 같아요.”

진미령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 자유가 부럽다는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는 걸 정천우는 놓치지 않았다.

모닥불을 꺼 버리는 바람에 동굴 안은 캄캄하기만 했다. 바로 앞에 있는 정천우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진미령은 일부러 밝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정천우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야, 낭인 생활이 쉬운 줄 알아?’

정천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움을 참으려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겠지만 낭인 앞에서 할 말로는 틀려먹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또 울어 버릴지 모른다.

무엇보다……

예쁘니까 모든 게 용서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였으니까.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자유롭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많이 드렸잖아요.”

진미령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낭인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었다. 본의 아니게 속인 셈이 되어 더 얹어 준 건 있지만 낭인에게 주기엔 많은 돈이라고 들었다.

낭인들이 그렇게 번다면 먹고사는 게 왜 문제일까?

“이런 일이 자주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주는 의뢰는 이렇게 뒤끝이 나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천우가 지금의 처지를 빗대어 말했다.

“……그렇군요. 미안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꼭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덕분에 소저도 만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좋았…….”

정천우는 황급히 변명을 꺼냈다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얘기하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까 그녀에게 협박에 가까운 고백을 한 게 떠올랐다.

‘내가 미쳤군. 확실히 난 여자와 말하는 재주가 너무 후져. 의룡이 그 자식은 혓바닥에 기름칠한 놈 같은데 말이야. 하아…….’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는 정천우.

그러고 보니, 의뢰하는 내내 화의룡과 여자 얘기만 했던 게 생각났다.

‘제길…… 소미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정천우는 화의룡을 떠올리면서 그의 죽음을 이제야 실감했다. 그를 좋아하는 뚱녀 은소미에게 뭐라고 해 줘야 할지 암담할 뿐이었다.

“……왜 절 만난 게 좋았던 거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진미령이 나직하면서도 맑은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진미령은 자신이 말하고서도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이야기가 끊기니 다시금 두려움이 몰려왔다. 뭐든 말해서 대화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필 이런 물음이라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이왕에 꺼낸 말이니 굳이 무르지는 않았다.

“네?”

정천우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 그야 진 소저는 아름답고…… 음, 음…….”

“피이…… 단지 그게 이유의 전부인가요?”

진미령은 가볍게 혀를 차며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자 자신에게 숙맥처럼 구는 정천우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읍! 으음……”

정천우는 자신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제 대답이에요.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그렇게 할게요.”

진미령은 간신히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 이건…… 아하하하…….”

정천우는 방금 자신의 입술에 느껴졌던 감촉이 그녀의 입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와 같은 미인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이런 때는 멋있게 말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정천우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진미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천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당황해하던 정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보여?’

내공을 끌어올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진미령의 얼굴이 확연하게 보인다.

정천우의 고개가 천천히 입구를 향해 돌아갔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군. 들어갈까? 아니면 나올래? 일단 암기부터 쏟아부을 생각인데, 어쩔 거야?”

입구에서 비에 흠뻑 젖은 복면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정천우는 서둘러 협봉검 두 자루를 쥐며 욕설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른손의 협봉검을 던지고 역천검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무림에 이름난 검이다. 평범한 협봉검 따위보다는 백배 낫다. 저주니 뭐니 하는 건 목숨을 건지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끝으로 봇짐에 손을 넣어 마지막 남은 진천뢰를 품속에 챙겼다.

“어떡해요?”

달콤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박살 나자 그녀의 얼굴은 다시 불안과 긴장으로 물들었다.

“일단 나갑시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정천우가 일어서자 진미령이 겁에 질린 얼굴로 따라 일어났다. 그러고는 정천우의 등에 꼭 붙어서 밖으로 나갔다.

‘미치겠군. 이렇게 멋진 여자를 얻었는데…….’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한 여자가 자신의 뒤에 숨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정천우는 억울하면서도 기분이 묘해졌다.

진미령은 자신이 한눈에 반해 버렸을 만큼 기가 막힌 미인이다. 그런 여자가 자신에게 마음을 준다고 했다.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녀를, 진미령을! 아니, 내 여자를!

쿠르르르릉…….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간간이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면서 쉽게 그칠 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동굴 밖에서는 열 명의 복면인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화가 나는군. 우리는 빗속을 헤맸는데 이것들은 동굴 속에서 알콩달콩 재미를 보고 있었어?”

이마 부분에 붉은 점이 찍힌 복면인이 냉소하며 이를 갈았다.

“너희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닌가? 넘겨줄 테니 우릴 보내 다오.”

정천우는 역천검을 앞으로 내밀며 눈치를 보았다. 진미령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천하의 보검 따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붉은 점의 복면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할 것도 없잖아?”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따졌다.

붉은 점의 복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면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비웃음일 게 분명했다.

“우리가 역천검을 빼돌렸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거든. 오직 시체만이 비밀을 지키지. 뭐, 우릴 고생시켰으니 대가는 치러야겠어. 좀…… 굶주렸거든.”

붉은 점의 복면인이 진미령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음흉한 목소리를 냈다.

“아! 너도 걱정하지 마. 저 친구가 남자 취향이니까. 네놈이 제법 그럴듯하게 생겨서 무척이나 좋아하겠어.”

붉은 점의 복면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정천우를 향해 끈적이는 눈빛을 보내는 복면인이 있었다. 구역질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약자는 자신과 진미령이었다. 성질을 못 참고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목숨이 날아간다.

등 뒤에서 잔떨림이 전해져 왔다. 추워서 떠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흑…….”

진미령은 음탕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기가 질려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더러운 자식들! 다가오면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

정천우가 역천검으로 절벽을 가리키며 위협했다.

“뭐, 그러든지. 조금 번거롭긴 하겠지만 내려가서 찾는 거야 일도 아니지. 타협은 없다!”

붉은 점의 복면인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젠장! 목숨이 날아갈 판에 곱게 넘겨줄 것 같아?”

정천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역천검을 던지면 그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게 분명하다. 그들로서도 큰 수고는 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느긋한 척해 봤자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복면인들이 순간 무릎을 굽히며 튀어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과연 정천우의 생각대로였다. 역천검을 던지고서 그 틈에 진천뢰를 터트릴 생각이었다.

이 한 수에 목숨을 건다!

정천우가 절벽으로 던지기 위해 역천검을 치켜드는 순간!

꽈르릉!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정천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벼락이 정천우에게 떨어진 것이다.

정천우에게 내리꽂힌 벼락은 그의 팔을 타고 역천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역천검은 흘러든 뇌전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무, 무슨 일이…….”

정천우는 황당한 현상에 말을 잇지 못했다.

빛의 기둥이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게 멈췄다는 점이다.

겁에 잔뜩 질린 채 벼락 때문에 눈을 감은 아름다운 진미령의 모습, 자신에게 협봉검을 앞세우며 몸을 날린 자세로 허공에서 멈춰진 복면인의 모습.

빗방울 하나하나까지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멈춰 있었다.

[그대, 선택된 자여! 신성한 맹약…….]

온몸이 울릴 정도로 장엄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정천우의 귀에는 그저 천둥처럼 느껴질 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의 시간을 빌려 가노라!]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끝나 가는 것과 동시에 역천검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흘러나와 정천우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끄아아아아악!”

정천우가 비명을 질렀다.

단전에서 일어난 전륜공의 기운이 역천검에서 흘러나온 빛과 합쳐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육신이 으스러지는 느낌과 함께 정천우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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