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화 (2/200)
  • # 2

    Chapter 1. 낭인 정천우 (2)

    ***

    “하앗! 차아!”

    정천우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아침부터 박도를 휘둘렀다.

    넉 자(약 120cm) 길이의 박도는 열 근(약 3kg)의 무게를 가졌다. 정천우는 그런 박도를 휘두르며 초식을 연마하는 중이다.

    전륜도법(電輪刀法).

    검(劍)으로 펼쳐도 되고 도(刀)를 사용해서 펼쳐도 거의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들 중 하나다.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무공이라는 뜻이다. 오죽 특징이 없으면 검을 사용하든 도를 사용하든 차이가 없을까.

    그럼에도 정천우는 정성을 다해 초식을 펼쳤다. 배운 무공이라고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쉬익! 바웅! 파바밧!

    박도에서 일어나는 파공음이 날카로웠다가 묵직해지기를 반복했다.

    정천우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이 무공이라도 정성을 다해 연마하는 게 답이다. 이 빌어먹을 전륜공과 전륜도법이 다른 무공을 배울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내공의 성질이 지랄맞기 그지없어서 다른 내공심법은 배우지 못한다. 이종(異種)의 내공이 단전에 흘러들면 전륜공이 곧바로 밀어낸다. 다른 삼류 내공심법으로 시험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두 가지 무공에만 전념하는 중이다. 삼류 주제에 뇌정지기를 단련하는 무공이라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삼류심법이라고 해도 내공 자체가 공격적인 특성을 지녔다. 동급 혹은 정천우보다 내공이 조금 더 높아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긴 다르네.”

    정천우는 박도를 땅바닥에 푹 찔러 넣으면서 줄에 걸어 둔 천으로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았다.

    다른 무인들이 봤으면 기겁할 일이다. 소중한 병기를 땅에 꽂아서 칼날을 상하게 하는 미친 짓은 아무도 안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천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기라는 건 사람 잡는 도구일 뿐이다. 금자 열 냥 정도면 살 수 있는 물건에 애착을 갖는 건 바보짓이다.

    물론 아주 비싼 보검이라면 애착을 가질 만하겠지만.

    “역시 먹은 게 좋았던 거겠지?”

    정천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젯밤에 느꼈던 후회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사실 박도를 휘두르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깟 일 년 내공, 포기하고 오백 냥을 벌고 말지 미쳤다고 날름 먹어 버린 게 너무나 아까웠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박도를 휘둘러 보니 몸에 힘이 붙은 게 확실히 느껴졌다.

    “으차! 어디 나가 보실까?”

    정천우는 땅바닥에 박아 놓은 박도를 뽑아 들고 집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웃옷을 입고 등에 짊어질 수 있게 만든 봇짐부터 맸다.

    이 봇짐은 팔 년의 낭인 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지니고 다닌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봇짐은 그의 구명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정천우가 복작거리는 황 노야의 식당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낭인들이 우글거렸다.

    건물 안팎으로 낭인들이 몰려든 모습은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그런데 낭인들은 두 개의 무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험악해 보였다.

    “안 꺼져? 지저분한 새끼들이 뭘 주워 먹겠다고 기어 나와?”

    황 노야 쪽에 선 낭인이 인상을 구기며 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흑발귀와 일하는 낭인이 걸게 욕으로 응수해 왔다.

    “지랄하네. 깨끗한 척하지 마, 새끼들아! 황 노야 밑의 새끼들이라고 다 깨끗한 줄 알아?”

    “뭐야? 이 자식들이 흑발귀하고 붙어먹더니 아주 간댕이가 배 밖으로 기어 나왔네? 오늘만 살고 죽을래?”

    황 노야와 일하는 낭인 중의 하나가 기분이 상해 귀두도를 뽑아 들고 앞으로 나갔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숙취다.

    “뭔 일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응? 저 녀석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던 정천우가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낭인들을 헤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의룡아, 이게 무슨 난리야?”

    “대형, 오셨어요? 대규모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오랜만이라 이 난리죠.”

    “대규모 의뢰?”

    화의룡의 말을 들은 정천우가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대규모 의뢰치고 위험하지 않은 게 없고, 뒤끝 좋았던 적이 드물다.

    “저기 중간에 앉아 있는 사람들 보이죠?”

    화의룡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정천우가 눈을 돌렸다.

    황 노야와 흑발귀가 대치하고 있었고, 그 중간에는 여자 하나와 남자 열아홉 명이 있었다. 그들의 허리에는 하나같이 검이 걸려 있었다.

    재미있는 건 남자들의 등에도 허리에 찬 것 외에 이상하게 생긴 검이 하나씩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또 무림인이야? 위험한 일 아냐?”

    “위험한 일이면 이렇게 모여들었겠어요? 저 사람들을 따라서 같이 이동하면 된대요.”

    “겨우 동행 의뢰? 이거 좀 수상한데?”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댔다.

    무인으로 구성된 스무 명이 뭐가 아쉬워서 낭인 따위를 고용하려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뭐가 또 수상한데요?”

    “칼밥 좀 먹었다는 강호인이 우리한테 동행해 달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 저것들이 언제 우릴 사람 취급이나 해 줬냐?”

    정천우는 의뢰를 맡기러 온 무인들을 살피면서 대꾸해 주었다.

    무인이라는 것들은 자부심이 강해서 낭인 알기를 버러지쯤으로 안다. 그런 놈들이 동행을 청한다는 데서 구린내가 풍겼다.

    “대형은 사람 취급 받으려고 낭인이 된 거였어요?”

    “인마! 누가 그렇대? 새끼가, 어른이 수상하다면 수상한 줄 알고 ‘네, 그렇습니다’ 하면 되는 거야. 저기 저놈들 봐라. 죄다 한가락 할 것 같은 무인들이잖아.”

    정천우가 흑발귀와 황 노야의 중앙에 선 무인들을 가리키며 중얼댔다.

    그가 보기에 낭인촌을 찾은 무인들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다들 이류는 가뿐하게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저런 것들이 낭인을 고용한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하여간 대형의 그 의심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이 자식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저 인간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같은 놈들한테 일을 맡겨?”

    정천우는 콧방귀를 뀌며 화의룡에게 투덜거렸다.

    그러자 화의룡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정천우의 의심병을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랄맞은 더러운 성격까지…….

    그래서 대놓고 의심 많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의심도 많고 성질도 더럽지만 틀린 말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 바로 정천우다.

    화의룡에게 평생 이해 못 할 인간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정천우를 꼽을 것이다.

    “야반도주 중이래요. 남자는 남궁세가 사람이고, 여자는 어느 집 출신인지 모르겠어요.”

    화의룡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주먹 쥔 손에서 새끼손가락만 편 채 까딱거렸다.

    “야반도주?”

    “여자 쪽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했다나 봐요. 그래서 둘이 도망치는 중인데 여자 쪽 집안이 꽤 대단한가 보더라고요. 추적자를 붙였다고 흩어지기로 했대요.”

    “그래서 자신들처럼 변장시킬 낭인을 구한다?”

    “역시 대형은 눈치가 끝내주네요. 뭐, 그런 셈이죠. 그래서 낭인이 백구십 명이나 필요하대요. 여자 낭인 아홉 명하고 남자 낭인 백팔십일 명.”

    “척하면 착이지. 이 짓도 오래 해 보면 눈치로 때려 맞추는 건 일도 아니야. 그나저나 많이도 데려가는구나. 그래서 일당은?”

    “하루에 금자 두 냥.”

    “오! 그거 꽤 짭짤한데? 있는 집 새끼들은 역시 씀씀이가 달라. 며칠이나 고용한대?”

    정천우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 물었다.

    야반도주한 연놈들을 도와주는 간단한 일에 일당 금자 두 냥이다. 그런 데다가 고용 기간까지 길다면 이거야말로 금상첨화다.

    “황산(黃山)에 있는 남궁세가가 목적지래요. 적어도 보름은 걸리지 않을까요?”

    “그래? 좋네! 근데 황 노야가 왜 나한테 사람 안 보냈지?”

    “저 사람들 조금 전에 왔어요. 정 대형한테 사람 보낼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냐? 이번 일 맡으면 한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겠는데?”

    “사람들 바글거리는 거 안 보이세요?”

    “자식아!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정천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봐라! 저기 무인들 보면 다들 젊잖아? 변장한다면서? 그럼 낭인들도 노친네들은 싹 빼야 할 거 아냐. 그럼 몇이나 남겠냐?”

    “아! 그러네요? 재미있겠는데요?”

    정천우의 말에 화의룡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무려 금자 두 냥짜리 일이다. 보름만 계산해도 서른 냥, 수지맞는 장사다.

    낭인들이 바글거린다고는 했지만 골목이 좁아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낭인의 수는 기껏해야 삼백 명 정도.

    나이 든 사람들을 뺀다면 충분히 자신들의 차례가 올 것이다.

    “저희가 직접 사람을 고를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두르겠습니다. 조용히 해 주셔야 저희가 사람을 선별하기 편해집니다.”

    무사 중 하나가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했다.

    낭인들이 바글거리는 중에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을 보면 그럭저럭 실력이 좋다는 얘기다.

    낭인들은 입을 다물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뽑히고 싶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정천우 역시 가만히 서서 눈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회색 바지에 검은색 상의를 입은 무인이 다가오며 낭인에게 보따리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무한테나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줘! 나도 줘!’

    화의룡에게 보따리를 건네준 무사가 정천우를 보고는 잠시 고심하는 눈치였다가 이내 보따리를 내밀었다. 정천우의 눈빛이 하도 간절하여 그냥 지나치기가 뭐한 모양이었다.

    보따리를 나눠 주는 작업은 이각 만에 끝났다.

    “보따리를 받으신 분은 저희와 같이 가실 분들입니다. 보따리 안에 선금으로 금자 열 냥씩 넣어 두었습니다. 잠시만! 잠시만 보따리를 풀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보따리에 숫자가 적혀 있을 겁니다. 숫자대로 모여 주시면 됩니다.”

    과연 보따리 겉에는 먹으로 찍 그어 놓은 것처럼 생긴 숫자 일(一)이 적혀 있었다.

    “넌 몇 번이냐?”

    “일 번요.”

    “나도 일 번이다. 잘 됐네. 너랑 같이 가면 심심하진 않겠다.”

    정천우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좋아했다.

    물건 혹은 서신을 전하는 것과 같은 장거리 의뢰는 사실 지루하다.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해야 덜 지루한데 그런 일은 보수가 적은 게 보통이다.

    이번 의뢰가 호위 동행이라 화의룡과 같이 간다는 건 잘된 일이었다. 최소한 지루한 여행이 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오래간만에 날로 먹는 의뢰였기에 정천우의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 일 번 보따리 모여!”

    정천우가 보따리를 머리 위로 올리면서 크게 소리쳤다.

    화의룡이 뒤따라 보따리를 머리 위로 올리자 일 번 보따리를 받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자만 열일곱 명이었다.

    “다들 일 번 보따리를 든 분이시죠?”

    아까 내공을 담아 소리쳤던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저는 위진충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제 말을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보따리를 풀고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곧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위진충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낭인들을 재촉했다. 그러자 일 번 보따리를 받아 들었던 낭인들은 서둘러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보따리 속의 옷을 꺼내 입었다.

    “이야! 이건 질 좋은데?”

    “그러게요. 옷 한 벌 공짜로 생겼네요.”

    정천우의 감탄에 화의룡이 새 옷을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다.

    낭인들은 새 옷을 살 일이 거의 없다. 아무렇게나 뒹굴고 다니다 보면 새 옷을 사 봐야 얼마 가지 않아 너덜거리게 된다.

    이렇게 좋은 옷을 살 돈이 생겨 봐야 그 돈으로 술이나 한 잔 사 마시는 게 바로 낭인들이다.

    “바로 출발할 겁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위진충은 낭인들이 옷을 다 갈아입은 걸 확인하고는 등을 돌렸다. 거기에는 한 명의 여자와 젊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 놈은 그럭저럭 잘생겼네?’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남자의 얼굴은 제법 잘생긴 축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적당한 키에 잘 단련된 몸을 가졌다. 과연 여자가 반할 만한 사람이었다.

    여자는 더 대단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확실한 생김새는 알 수 없지만 면사로 가리지 못한 눈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를 가졌으며 콧날이 오뚝했다.

    정천우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여자라면 야반도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하여간 괜찮다 싶은 여자들은 있는 집안 새끼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니까.’

    입맛이 썼다.

    세상에 수많은 미인이 있지만 다들 임자가 있다는 게 아쉬웠다.

    “다른 조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이동하겠지만 우리는 걸어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들 경공은 사용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위진충의 말에 낭인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낭인이라고 해도 이들의 기본은 무인이다. 비록 아무도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지만 무공을 익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보잘것없는 내공으로 쓰는 경공이라고 해 봐야 일반인보다 조금 더 빨리 뛰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자, 출발합시다!”

    위진충이 앞장서서 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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