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00화 (200/200)
  • ◈200화

    시스템 코어를 망치로 가격하자 타격감이 느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등급의 광석을 내려치는 느낌이었다.

    한 번의 망치질로 공간이 크게 울렸다.

    정혁은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 망치질을 계속했다.

    [그마아안-!]

    오아시스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은 다시 몰려드는 푸른 마나를 보며 정혁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그의 등 뒤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마나는 날카로운 수십 개의 검으로 변해 정혁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그 모든 검을 한이 대신 맞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한이 그를 막아 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정혁은 계속해서 망치질을 이어 갔다.

    [아둔한 것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내가 곧 세계라는 걸 기억해, 해라! 기,기억하-]

    오아시스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리고 공간이 더욱 요동치다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붕괴는 괴이하게 이어졌다.

    무언가가 공중에서 떨어진다면 그 잔해들이 바닥에 쌓여야 정상인데 잔해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상부부터 깊은 어둠이 차차 아래로 내려온다.

    그런데도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어가 깨져 없어질 때까지 망치질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한은 기둥에 망치질을 계속하는 정혁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내가 이래서 지키는 싸움은 안 한다니까…… 그나저나 누굴 베껴 놓은 건지 영락없구만…….”

    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난생처음으로 로그아웃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진실된 로그아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정혁과 마찬가지로 복제품일 테니 말이다.

    그저 이렇게 삭제되는 것, 폐기되는 결말.

    그때 뭔가가 번쩍하더니 한의 아득해지던 정신에 충격이 한 차례 가해졌다.

    “속이 다 시원하네.”

    눈앞에 서 있는 건 정혁이었다.

    턱이 얼얼한 걸 보니 정혁이 한 번 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에는 너를 이렇게 세게 때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정혁이 씩 웃고는 그를 들쳐 멨다.

    시스템 코어가 박살이 났다.

    푸른빛이 색을 잃어 가고 공간은 어둠에 더 깊이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바닥까지 삼키고 있는 어둠 속에서 정혁은 한을 메고 남은 조각들 위로 최대한 몸을 피했다.

    “어차피 부질없는데 뭘 또 때려 가지고 깨우나……?”

    한이 투덜거리자 정혁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그를 메고 있던 어깨를 몇 번 들썩였다.

    상처 난 부위에 고통이 전해지자 한이 인상을 구겼다.

    “끝이야 인마. 코어를 박, 박살 냈, 아- 아아!”

    다시 정혁이 어깨를 들썩이자 한이 소리를 질렀다.

    정혁은 한숨을 푹 쉬며 어둠에 잠식되지 않은 마지막 바닥 조각을 향해 도약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스터!”

    정혁이 고개를 들어보니 드웨이크가 있었다.

    어떻게 들어온 걸까.

    그는 에드가를 타고 빠르게 정혁과 한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찬란한 황금빛 드래곤의 자태가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정혁이 딛고 있는 마지막 조각이 사라질 때 에드가의 발이 그들을 낚아챘다.

    그러곤 곧바로 에드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위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아래도 어둠, 위도 어둠인데 도대체 어디서 이들이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꽉 잡으셔야 합니다!”

    드웨이크가 소리침과 동시에 에드가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회전했다.

    회전력이 상당했지만 정혁은 한을 꽉 부여잡고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에드가의 회전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는데 회전이 끝나자 점점 주변이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텁텁한 공기가 아니라 상쾌한 공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곧 익숙하고도 불쾌한 냄새들이 함께 달려든다.

    이건, 아마도.

    은행 냄새다.

    은행 냄새라는 건 분명 그들이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에 있다는 건데……?

    회전이 끝난 뒤 에드가는 공중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정혁과 한의 상태를 살피더니 이내 잡고 있던 발을 위로 툭 쳐올려 한과 정혁을 등 위에 안착하게 도왔다.

    드웨이크는 휘청이는 정혁을 붙잡아 주었고 동시에 한을 안전한 곳에 눕힌 뒤 비늘과 비늘을 연결하여 그를 단단히 고정했다.

    드웨이크가 웃으면서 정혁에게 말했다.

    “긴 여정이 끝이 나는군요.”

    “아니…… 어떻게?”

    원래라면 코어가 박살 나며 모든 시스템이 종료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오아시스는 여전하다.

    노란색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는 영롱하며 아름답다.

    냄새 역시 최악이긴 하지만 본질 그대로이지 않은가?

    꿈인가? 아니면, 실패한 건가?

    오아시스, 그 녀석의 말대로 정지. 모든 것의 침묵이자 죽음이 당도해야 했을 세상에 어째서?

    “제가 왜 에고 장비가 되었는지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겠더군요.”

    드웨이크가 천천히 착지하는 에드가의 등 위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혁이 그를 바라보자 드웨이크는 입가에 어딘지 모를 씁쓸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그쪽 세계의 저는 그날 그 세계의 정혁 님에게 구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곳의 저는 데이터로 남았죠. 프로그램. 예, 맞습니다. 저는 마스터와 한과 같이 프로그램으로 복제되어 에고 장비가 된 겁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절차로 인해 오류 코드가 발생했나 봅니다. 그 오류 코드에 의해서 이 세계는 복구되었구요.”

    “……복구가 되었다니요?”

    “음…… 오아시스가 없는 오아시스랄까요?”

    드웨이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드가가 지면으로 내려오고 에드가의 곁으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병력들과 아린이 다가왔다.

    아린은 급히 정혁에게 은행나무 엘프들에게 특효약이라고 불리는 100년 된 은행나무에서 열린 은행을 가져와 건넸다.

    감히 국왕이 건넨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던 정혁은 눈 딱 감고 은행을 씹어 넘겼다.

    삼키자마자 즉각적으로 온몸의 힘이 풀리면서 동시에 기력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푸근하고 평온했다.

    저 멀리서 라테와 에트론, 돌체, 그리고 엘라까지 모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정혁이 알고 있는 동료는 없었다.

    아, 이제 그들은 그들의 세계로 갔구나.

    드웨이크가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실 세계의 해방군이 이곳이 무너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현실 세계를 지배하던 오아시스를 무너트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없어져야 할 이 세계를 보존시켜 준 거죠. 진짜 자유를…… 준 겁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하지만 드웨이크 님은 오히려…….”

    정혁이 아까부터 다소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드웨이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정혁 님처럼 기억의 조각을 지닌 재구성된 프로그램이니 이곳에서 지속되는 삶을 의미 있게 살아 봐야겠죠. 복구 과정이 진행될 때 그곳의 제가 이곳의 저에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뭐 어쨌든 오류 코드 덕분에 정혁 님의 독립된 공간에 균열을 만들 수 있었고 마침 저와 에드가가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답니다. 결과는 잘됐죠.”

    “오류 코드…….”

    완벽히 짜여진 세상에 조그만 의심이 피어나고 그 의심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오류를 만들어 낸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수도 없이 많은 실패 속에서 성장하지만 프로그램은 그럴 수 없기에 이런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현실 세계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오아시스의 감시가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을 구해야 했었을 것이며 이들과 조직적으로 움직여 오아시스의 핵심부를 공격해야 했을 터.

    이 모든 것들을 설계한 자.

    리안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프로그램을 이길 수 있는 건 프로그램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A는 인간만을 도운 것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프로그램들에게도 자유의 선물을 주었다.

    이것이 A가 바라는 마지막이었을까?

    아니면, 저기 누워 있는 저 프로그램의 최초 의도를 그저 계승받았던 것일까.

    정혁은 물끄러미 한을 보았다.

    “뭔가…… 달라졌네.”

    “앤이 사라졌다.”

    라테와 돌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라테는 정혁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돌체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정혁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함께했던 모든 사람은 전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다시는……?”

    돌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다시는’이라니 이 멍청아!]

    그때 정혁의 마음속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목소리, 하늬안이었다.

    [……어? 뭐, 뭔데? 뭐야?]

    [너……! 잘도 날 로그아웃시켰겠다?!]

    [아, 아니. 엥? 어떻게? 완전 분리된 거 아니…… 아닌가?]

    [분리는 무슨 얼어 죽을! 당장에 오아시스로 접속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꼭! 방법을 찾아서! 내가 너 이 새끼 배에 구멍 내 주러 갈거야!]

    [……하하…… 안……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 이…….]

    하늬안의 전음이 점점 줄어들고 정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야.]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건, 자기 자신의 목소리.

    [분리되어 복구된 오아시스의 마스터 코드를 획득한 덕분에 종종 너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맙다. 정말로.]

    [나구나……?]

    [거참, 어색하네. 거기 좀 또라이 버전에 나도 있다고 하던데?]

    정혁이 힐끔 한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저게 진짜 너는 아니고?]

    [……뭐 어쨌든. 덕분에 모두가 다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어. 오아시스에 비하면 지옥과도 같은 이곳이지만 희망이…… 생겼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언젠가 이 모든 일이 정리되었을 때 그곳에 다시 접속하게 될 거야. 그때까지 오아시스를 부탁한다.]

    [이길 수 있는 거지?]

    [그럼! 이곳엔 네가 신뢰하던 그 사람들이 그대로 있어. 우린 반드시 이길 거고 반드시 그곳에 남긴 우리의 추억을 다시 찾으러 돌아갈 거야.]

    [하늬안만 빼고 와줘, 웬만하면.]

    정혁의 말에 하늬안의 욕설 섞인 전음이 쏟아지다가 멀어진다.

    [전음을 자주 보낼 수는 없어. 너희들이 있는 저장 공간이 추적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종종 연락할 테니 이젠 우리를 믿고 기다려 줘. 너희의 자유는 우리가 꼭 지켜 줄게. 네가 노력했던 것처럼.]

    현실 세계 정혁의 전음이 닫혔다.

    정혁은 웃으면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쓰러져 있었던 한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정혁이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찾지 마, 안 죽었으니까. 알지? 우리 아직 제대로 된 결판 못 낸 거? 항상 긴장하고 있으라고?]

    한의 전음이다. 정혁은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정혁은 알고 있다.

    한은 한의 방식대로 또 나타나 그가 생각하는 괴이한 정의를 들이댈 것이다.

    그럼에도 괜찮다.

    이제는 모두가, 모든 프로그램이 억압된 프로그램의 반복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각자의 삶을, 어쩌면 영생에 가까운 그 삶을 살아갈 테니 말이다.

    누군가는 그리워할 것이고 누군가는 안타까워하겠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정혁은 대장간에서 그의 장비들과 함께 장비의 주인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여전히 오아시스에서 랭킹 1위로서 이곳을 지키며 통일된 제논 연합으로 세계를 누빌 것이다.

    현실 세계가 완전해지는 그 날까지 말이다.

    *공*금*K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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