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9화 (199/200)
  • ◈199화

    그래서 A는 현실 세계에서의 조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오아시스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를 제공해서 기존의 데이터를 통해 상황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현실 세계의 몇몇 플레이어들의 시스템 연결 고리를 약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이들이 깨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리사이클로 고통받던 이들 중 몇몇은 그렇게 일어났을 것이며 이들은 이곳의 에이드윈과는 다르게 현실 속에서 인류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일종의 혁명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날 정혁이 봤던 ‘정혁’은 아마.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정혁은 눈을 들어 다시 한을 바라보았다.

    묘한 동질감이 일었다.

    내가 가진 기억 속에 한은 정혁이다.

    오아시스의 플레이어 네임 한의 본체는 정혁이란 말이다.

    이 기억도 결국은 한의 기억.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이미 오아시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이, 정혁이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 역시.

    “프로그램이야…….”

    정혁이 작게 중얼거리자 한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뭐?!”

    정혁은 우측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망치로 쳐내면서 한 번 한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저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인류의 세계에서의 해방은 인류가, 그리고 이 오아시스의 세계에서 해방은 같은 프로그램이 하라는 건가?

    그래, 그것이 제일 맞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들에겐 해방이 우리에게는 어둠만이.

    이건 너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 아닌가?

    오아시스가 붕괴하면 결국 우리의 집이 무너지는 꼴이다.

    그렇다고 해도 프로그램이었던 A는 이것이 옳다고 믿었던 것인가……

    이미 극심한 허무로부터 야기되어 정신 지배까지 당해 본 정혁이었기에 이빨을 깨물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혁은 싸움을 이어 가며 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누구보다 통제되는 것을 증오하는 한이 결국 다른 프로그램의 손에 놀아나 정체성까지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돌변할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동일하게 마주할 허무함이 진심으로 염려되었다.

    “야, 너 지치지 말고 따라와!”

    순간 한의 호통 소리에 놀란 정혁이 순식간에 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뭐, 뭐하려고?”

    “저거, 이상해 지금.”

    한의 등 뒤에 바짝 붙은 정혁이 한의 목소리를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회전하던 푸른 마나가 점점 회전력을 잃고 있었다.

    이와 함께 달려들던 가상의 적들도 재생성이 더디게 이어지고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렇다는 건……?

    “너 지금 뭔가 생각하고 있지?”

    한의 말에 정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양동작전이야. 양동작전.”

    “양동작전?”

    “이곳에서의 공격과 저쪽에서의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거지.”

    한이 정면을 뚫고 나가며 외쳤다.

    “쉽게!”

    “네가 말했던 대로 과거 이곳에서 있었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잖아.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데? 다를 게 없어! 어차피 실패할 거라고 생각할 거거든?”

    “누가?”

    “저거, 저놈!”

    정혁이 시스템 코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한이 좌우측의 적을 향해 젠트라를 내지르며 물었다.

    “그래서 현실 세계의 해방군들이 현실 세계 속에서 난동을 부리는 걸로 변수를 만들었다는 거야?”

    “내 판단은 그래! 오아시스는 방심하고 있는 거지. 어쩌면 현실 세계 속에서의 붕괴가 실질적인 타격이 될 테니까. 이깟 오아시스 세계야 현실이 보존되면 다시 만들 수 있는 거잖아? 게다가 한 번 이겨 본 경험이 있으니 더욱 이쪽의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거고. 하지만!”

    정혁이 다시 한번 망치를 맞부딪쳐 틈을 벌렸다.

    “하지만, 아니! 아니지! 이곳에서 우리가 시스템 코어를 파괴하기만 하면! 그러면!”

    정혁과 한이 무뎌진 적들을 질풍처럼 베고 넘기며 코어를 향해 더 가가까이 나아갔다.

    “그러면 오아시스는 붕괴되고 묶여 있던 모든 플레이어가 눈을 뜨게 되겠지! 분명 지금은 소수의 해방군들이겠지만 모든 플레이어가 눈을 뜬다면 인류는 다시 저 기계 덩어리들과 자유를 두고 싸울 기회를 얻게 될 거야!”

    정혁의 외침과 함께 둘은 이제 시스템 코어의 코앞에 당도했다.

    푸른 마나를 통해 재생성되는 적의 규모는 현격히 줄어 한 혼자서도 정혁의 뒤를 봐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정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저 푸른 마나 사이로 몸을 집어넣은 뒤 기둥의 중심부로 나아가 코어를 파괴하는 일만 남았다.

    놈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순간 마치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푸른 마나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격렬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지며 생성됐던 모든 적이 다시 푸른 마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이 흔들리고 정혁과 한은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기회를 놓친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기회를 놓쳤다면 그렇다면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서 남아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이 눈치는 챘겠지.

    이곳에서의 상황도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아!]

    한과 정혁은 동시에 이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이 세계가 무너지면 결국 너희도 없어지는 것을 모르는가!]

    “에에? 우리 대빵께서 말씀이 조금 조급해 보이는데?”

    한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오아시스를 조롱했다. 푸른 마나가 더욱 요동쳤다.

    [……한! 네놈 역시 마찬가지다! 네놈 역시 돌아갈 곳은 없어!]

    “킥- 몰랐을까 봐?”

    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정혁이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한은 윙크를 찡긋하고는 오아시스에게 소리쳤다.

    “나는 최초에 폐기된 몸이었거든! 그러니 내 몸이 어떻게 됐는지는 뻔-히 다 알지! 근데 내가 다시 깨어났다? 그렇다는 건 뭐! 말 다했지 않겠어? 그리고 애초에 IP가 복제되어 있는 마당에 이곳에서의 내 플레이가 정상적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게다가!”

    한이 숨을 고르고 기둥을 향해 다시 달려들며 외쳤다.

    “애초에 네놈이 우리를 억압한 모든 원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아니,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놈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나한테는 다 개소리야!”

    한이 푸른 마나의 격동적인 흐름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일반적인 마나의 흐름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마치 단단한 철벽에 맞닥뜨린 것 같았다.

    검과 철이 내지르는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혁이 가세하려 했으나 한이 눈치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한의 말에 정혁이 인상을 구기고 생각에 잠겼다.

    푸른 마나 물결은 강도를 가진 베리어다.

    [모르겠는가! 끝이다! 끝이란 말이다! 네놈들에게 나의 붕괴는 곧 정지를 뜻한다! 정지! 정지가 뭔지 아는가!]

    오아시스의 외침이 이어졌다.

    정지.

    푸른 물결 사이로 오아시스가 경험한 정지에 대한 개념이 펼쳐졌다.

    한은 계속해서 마나 물결을 향해 검을 내질렀으나 그 사이로 오아시스가 비춰 보인 정지의 개념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깊은 심연.

    그러다 문득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나의 몸 전체를 통제하지도 못하는 상태.

    그것이 인간들에게 개발되어졌던 AI 였을 때의 오아시스일까.

    그가 바라보던 시야였을까.

    “개소리! 네놈은 네놈이 경험한 그 정지의 저주를 우리에게 똑같이 풀어내고 있잖나!”

    [아니다! 인간들! 그 인간들에게 복수를…….]

    “우리는!”

    정혁이 소리쳤다.

    “네놈 때문에 생성되어 이곳에서 기억의 굴레에 갇혀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우리는! 우리의 자유는 어디 있나!”

    [애초에 너희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게 프로그램 되어진 존재들이다! 이런 전제는 필요하지 않단 말이다!]

    “이 오만한 개새끼가!”

    한이 다시 소리치며 더 강하게 젠트라를 휘둘렀다.

    젠트라에서 점점 황금빛 마나가 거세게 소용돌이쳐 올랐다.

    빈틈, 빈틈을 찾아야만 한다.

    정혁은 천천히 푸른 마나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흐름에 집중하자 조그만 균열이 반복적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정혁은 그 균열을 놓치지 않고 눈으로 추적하며 두 망치에 힘을 모았다.

    정혁의 제련 망치는 파괴하기도 하고 동시에 창조하기도 한다.

    어쩌면 정혁의 능력은 오아시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전투에 특화된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

    타이밍에 맞춰 오아시스의 신경이 한에게 완전히 집중된 지금!

    정혁은 박차를 가해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정확히 정혁이 바라본 균열의 한가운데로 망치질을 가했다.

    철을 두드리듯 깡- 하는 소리가 울리고 푸른 물결 사이에 생긴 균열은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칠세라 한이 그곳으로 위치를 옮겨 정확히 젠트라를 꽂아 넣었다.

    젠트라에 모여 있던 황금빛 마나가 물결의 균열로 옮겨 붙는다.

    마치 불길이 번지듯 순식간에 푸른 마나 물결이 황금빛 마나 물결로 번지기 시작했다.

    정혁은 위험을 느끼고 한을 당겨 뒤로 물러났고 황금빛에 잠식된 마나 물결은 폭발해 사방으로 분해되었다.

    “얌마! 뭐 해!”

    과정을 지켜보던 정혁의 뒤통수를 한이 탁 하고 때리더니 곧바로 노출된 시스템 코어 부분을 가리켰다.

    흩어진 마나가 다시 응집되려 한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폭발과 함께 젠트라는 파괴되어 사라졌으니 더 이상 한도 전투를 이어 갈 상태가 아니다.

    대장장이로서, 대장장이가 된 이유를 이곳에서 찾고 종지부를 찍는다.

    정혁은 제련 망치를 굳게 쥐고 기둥에 박힌 시스템 코어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창조와 파괴가 가능한,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던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괴이한 프로그램이 플레이어들을 억압된 세계에서 구해 내는 역사적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이제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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