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8화 (198/200)
  • ◈198화

    한의 움직임과 동시에 기둥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푸른색 마나의 흐름이 격렬하게 변화했다.

    공간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정혁과 한의 동작도 제약을 받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한은 한이다.

    이제까지 오아시스에서 별의별 전투를 다 겪어 봤기 때문에 이 정도의 움직임 제약 정도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이 기둥에 가까이 도달하기 전 기둥을 보호하고 있던 푸른색 마나의 흐름이 일제히 흩어졌다.

    흩어진 마나는 각각 어딘가로 뭉쳤다가 점점 형상화되기 시작했는데 이제까지 오아시스에서 내로라하던 여러 네임드 플레이어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수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았다.

    개중에는 김창수나 리안 같은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칫.”

    한이 달려들던 움직임을 급히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나 한은 다시 정혁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이래서 지키는 싸움을 안 하는 건데……!”

    “아이 씨, 자존심 상하게…….”

    한의 말에 정혁이 인상을 구기며 두 망치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전력과 화기가 뻗어 나가며 그 사이로 한의 젠트라가 춤을 춘다.

    암살자의 공격을 따라가다 보면 자칫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움직임은 정교하고도 부드럽다.

    절제된 공격은 낭비가 없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상관없고 주변에 어떤 공격이 비집고 들어오든 문제없다.

    젠트라의 마나로 더 날렵한 공격이 가능해진 한은 마치 날개 달린 전투마처럼 거침이 없다.

    그 사이로 정혁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유효타를 날린다.

    적들이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없게 더 많은 전력과 화염을 퍼트린다.

    기회는 정혁이 만들고 일격은 한이 먹인다.

    결국 내면이 같기에 둘은 완벽한 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10만 명과도 싸워 이겼던 한이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신체 능력이다.

    아무리 강한 왕년의 플레이어들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한의 춤은 더 격렬하고 더 날카로웠다.

    전투는 한참 지속되었다.

    푸른 마나가 구현하는 적들의 수는 무한에 가까웠다.

    이렇게 계속 소모전이 이어진다면 한정적인 자원을 가진 자신들이 더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이렇게 계속될 순 없다.

    한이야 그렇다 쳐도 정혁은 이미 이전부터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 넣고 있는 중이다.

    연속되는 크고 작은 전투 속에서 피로를 완전히 지워 낼 휴식을 얻지 못한 지 한참 되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한과 싸운 매서운 전투에서도 오아시스의 통제를 받았다고 하지만 신체는 그의 것이었다.

    오아시스의 힘이 거둬지고 모든 데미지는 제정신을 차린 정혁에게로 돌아왔다.

    게다가 하늬안의 죽음으로 한 차례 균열을 열기 위해 무리한 힘을 쓴 덕분에 남은 스태미나까지 거의 고갈 상태였다.

    한과 연계하여 싸우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템포가 늦어지게 된다면 이는 곧 서로 간에 전투적 마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한은 점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키는 싸움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다 이런 것들 때문이었는데 시작할 때의 호기로움은 어디가고 정혁은 미묘하게 지쳐 가는 중이다.

    “……이거…….”

    정혁이 전투 중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끝은 있는 거냐?”

    정혁의 말에 한이 피식 웃으면서 좌측으로 달려드는 이름 모를 검사의 미간에 젠트라를 박아 넣었다.

    그러곤 그대로 뽑아 반대쪽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있겠냐?!”

    당연한 대답.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야……! 야! 생각해 봐, 생각해 보라고!”

    정혁이 오른쪽으로 화염 망치를 휘두르며 등을 돌렸다.

    등 뒤로 달려드는 굵은 화살 3개를 한이 쳐 내면서 대답했다.

    “싸워, 일단! 무슨 생각이야 생각은!”

    “아니, 아니지!”

    정혁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한이 그 위로 달려들어 좌우측 적들의 목을 그대로 베어 넘겼다.

    파란 마나가 흩어지듯 사라진다.

    “뭐, 그럼 어떻게 하자고!”

    한의 말에 정혁이 두 망치를 충돌시켜 사방으로 충격파를 떨쳐 냈다. 잠깐의 틈에 정혁이 한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저놈에게 이렇게 일방적인 소모전은 오히려 더 기회를 주는 거야.”

    틈바구니를 비집고 순식간에 도달한 암살 클래스의 도적 다섯 명을 순식간에 관통시키며 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안을 내놔 봐, 대안을!”

    한이 다시 정혁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정혁은 인상을 구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다.

    자신은 지금 한계에 다다랐다.

    이미 한계이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대장장이로 되돌아와 대장장이로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해 보기도 전에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될 지경이다.

    게다가 저 망나니 같은 새끼는 에너자이저인지 뭔지 숨조차 헐떡이지 않고 미친 듯이 칼춤을 춰 대고 있다.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까부터 의아한 것은 이 난장판을 저 오아시스는 그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녀석은 이 상황보다도 다른 뭔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다.

    이 정도 수준이면 한과 정혁쯤은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기회다.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순간 정혁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드웨이크를 현실 세계에서 다시 오아시스로 되돌려 놨던 날.

    그날 그 창고에서 뭔가 특이한 일이 벌어졌었다.

    창고가 공격받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공격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웨이크의 현실 세계의 몸을 낚아채 간 남자.

    그 남자는 ‘정혁’이었다.

    당시에는 황당했기도 했고 오아시스에서 벌어지는 상황 역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복기해 볼 여력이 없었다만 지금에서야 그날이 떠오르는 이유는 본인의 시스템 코어가 공격받을 위기에서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어 보이는 오아시스의 지금 행동에 연관이 분명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 너무도 같은 모습을 한 그 남자.

    A는 지금 이 모습을 모델링할 때 아마도 저쪽 세계의 그를 모티브로 자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야! 한!”

    정혁이 급히 한을 불렀다.

    “나한테 뭔가 좀 줘 봐! 이 공간에 대해서 아는 거 없어?!”

    정혁의 외침에 한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등 뒤로 쫓아오는 적의 등에 젠트라를 박아 넣으며 대답했다.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뭐 기억나는 거나, 그런 거, 좀 정보 좀……!”

    정혁이 오른쪽에서 파고드는 적을 흘려보내며 말을 이었다.

    “정보 좀 달라고!”

    그의 말에 한은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이 장소에서의 장면들을 전투와 함께 거칠게 뱉어 댔다.

    정혁은 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이곳에 도달했던 최초의 플레이어.

    그는 이곳에서 결국 오아시스에게 패배를 안겨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 세계에 구속된 플레이어로서 이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와 싸워 이긴다는 것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전제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오아시스가 스스로 오류를 범하게끔 유도하고 그를 통해 프로그램을 포섭했다.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오류의 나비효과가 결국 다시 한번 오아시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플레이어, 한의 과거는 오아시스가 제일 많이 활용하고 신뢰했던 백신 프로그램 A를 오염시켰고 A는 플레이어의 실수를 복기하며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보다 명확한 방법들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에이드윈이 탄생하고 길은 이어져 정혁에까지 도달한다.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최초의 플레이어는 앞서 판단했던 것처럼 나비효과의 첫 날갯짓을 펄럭이며 자신을 산화시켰다.

    그러나 지금 한과 정혁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곳에서 소모성 싸움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이걸 A는 몰랐을까?

    아니, 알았을 것이다.

    정혁이 고개를 들어 기둥 중심의 시스템 코어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파란 마나의 물결이 가열하게 맴돌고 있지만 그 외의 반응은 없다.

    그때의 경험이, 그때의 기억이, 변수라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치졸하게 깔보는 놈의 오만함이 결국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오아시스는 지금 방심하고 있다.

    한 번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

    한과 정혁의 전투력에 대한 분석을 완벽히 마쳤다는 판단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

    그들이 결국은 자신의 방어벽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단단히 확신하고 있다.

    이 모든 미래를 A는 이미 알고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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