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늦었어요.”
“뭐?”
한이 되물으며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역시 뭔가 느껴진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리안을 쳐다보았다.
“놈의 계획이 성공한 거죠. 저쪽에서 거센 공격이 이어져 여유가 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었나 봅니다. 코어로 이동할 수 있는 차원의 균열이 완전히 닫혔어요.”
“방법이 없나?”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몇 배로 강력한 차단막이 생성됐어요.”
“젠장.”
로만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비켜.”
정혁의 목소리가 침울한 분위기를 관통하고 들려왔다.
정혁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용암 폭포 상공에 섰다.
어느새 에이드윈 각자에게 건네졌던 에고 장비들이 전부 정혁에게 무기화되어 장착되어 있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뭔가를 느낀 것일까.
평온하게 떨어지던 용암 폭포가 마치 생명체라도 된 것처럼 휘몰아치며 정혁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정혁의 곁에는 맹렬한 기세로 완전한 방어막을 펼친 드웨이크가 서 있었다.
다급해 보이는 용암의 물결은 계속해서 드웨이크의 견고한 방벽을 내려치고 공격했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용암 폭포를 향해 정혁이 허공에 몇 번 주먹질을 했다.
그러자 용암 폭포 바닥이 전부 드러났다.
사방에 은행나뭇잎 결계가 펼쳐져 용암이 다시 채워지지 못하게 막았다.
그와 동시에 에트론의 강력한 천계의 빛이 한곳으로 집중됐고 그곳으로 정혁의 젠트라 두 자루가 돌진했다.
견고한 바닥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젠트라는 그대로 꽂혀 마치 밀고 들어가려는 듯 움직였다.
정혁은 고함을 내지르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대장간의 차원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완벽히 수리된 하늬안의 대도가 뽑아져 나왔다.
정혁은 하늬안의 대도를 젠트라가 박힌 곳 좌우로 집어던졌다.
그럼에도 지면에는 큰 균열이 없었다.
“열려! 열리라고-!”
정혁이 고함을 치며 아래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러곤 자신의 제련 망치를 꺼내 하늬안의 대도 손잡이를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비명처럼 뻗어 나올 때 놀랍게도 지면에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발악에 가까운 정혁의 망치질은 균열이 더욱 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열리면 다 같이 달려들면 되나?”
“아니, 아니에요.”
안나가 한의 말에 선을 그었다.
“보세요.”
안나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균열 내부가 있었다.
검은 아귀의 입과 같은 균열 속에는 0과 1로 이루어진 여러 숫자 묶음들이 날아다녔다.
“우리 같은 일반 플레이어들이 저기로 넘어가게 되면 곧바로 죽음 상태에 이를 겁니다. 권한 밖의 실행이니까요.”
“뭐야,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야?”
유르겐의 말에 안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늦은 겁니다. 리안 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오아시스 그놈에게 시간을 너무 줬어요.”
안나가 한을 힐긋 쳐다보자 한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 탓으로 돌리진 말라고. 그래도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예?”
“기다려 니네들은. 어차피 도움도 안 돼.”
“지금 무슨 그런 소리를……!”
안나가 화를 버럭 냈지만 로만에 의해 제지당했다.
로만은 팔짱을 끼고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천둥벌거숭이란 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네만 우리의 입장에서 자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네. 어디까지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린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있단 말이야.”
“그, 러, 니, 까. 당신들은 더 필요가 없어요. 이 사람들아.”
한이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저 봐, 어느새 사라졌지? 저놈?”
정혁은 벌려진 균열로 모습을 감췄다.
에이드윈들이 모두 아래를 내려 보았지만 남은 건 내팽개쳐진 그들의 무기와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드웨이크가 멍하니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하나, 딱 하나 없네?”
한이 말한 딱 하나.
그건 젠트라였다.
한은 리안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그쪽이 에이드윈이 되기도 전에 A를 각성시킨 사람이 나야.”
그의 말에 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자기보다 먼저인 에이드윈이라니.
아니다.
에이드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자 아닌가?
“지금 정혁, 저놈이 들어간 코어를 경험해 본 사람도 나고. 코어 내부에 도사리는 적은 없어. 왜냐면 코어는 온전히 오아시스의 통제하에 있거든. 어떤 공격이든 상관없이 사방에서 날아들고 사지를 찢으려 들지. 거기에서 너희가 뭘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안나가 반론을 제기하려 했으나 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 더할 것 없으니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나는 내가 그때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니까. 무엇보다 이놈의 자존심이 상해서 가만히 못 있겠거든?”
“어떻게 들어가려고 합니까?”
금방이라도 아래로 뛰어들 것 같은 한을 보고 리안이 급히 물었다.
“암살자는 원래 자기 무기를 최고의 보물로 여기는 법이지. 언제나 그 무기가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끔 마법을 걸어 놓는다고.”
그 말과 동시에 한은 벌어진 균열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한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은 들어갔다.
내부로, 오아시스의 코어로.
그곳에서 정혁과 함께 놈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것이다.
에이드윈들은 이제 지켜볼 수밖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나가 뒤로 돌아 로그아웃된 하늬안의 시체와 네임 플레이트가 회색으로 변한 김창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며 함께 이곳에서 밭을 일구고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했던 동료들이다.
비밀을 안고 그들을 속이며 제논에 있긴 했지만 제논이 없었다면 에이드윈들도, 안나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던 정혁 역시 잊을 수 없는 자다.
리안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혁을 통해 느꼈던 미묘한 아쉬움.
그랬구나.
에이드윈들은 결국 여러 시대를 관통하여 자유의 의지를 계승하는 역할일 뿐.
한의 말대로 인간의 시도가 얼마나 허탈하게 마무리 되었는지를 목도한 A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다시 덤벼든다 해도 오아시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선택한 마지막 존재 정혁과 첫 단추를 연결했던 자, ‘한’만이 이 마지막 싸움의 마무리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그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기다렸다.
그러니 지금도 기다릴 수 있다.
적어도 완전한 마지막이 될 테니 말이다.
리안은 숨을 고르며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로만과 유르겐 역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리안-! 그래도 끝이잖아 그치?”
유르겐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옅은 미소를 띄웠다.
로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그래도 끝이니까.
기억을 다시 잃고 완전히 새로운 가상 세계에서 눈을 뜬다 해도 나름의 끝이며 실제의 몸에서 눈을 떠 현실 세계에서 살아간다 해도 오아시스에서의 삶은 끝일 테니 무엇이 되었든 좋다.
그래도 끝이니까.
* * *
기억을 잃었었다.
검은 안개에 휩싸여 어디론가 이동될 때.
순식간에 공허함이 마음을 뒤덮고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그때
오아시스의 목소리만이 가슴을 울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다만 이 깊은 허무함을 떨치기 위해 더 발악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어느 순간 한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희열과 환희가 심장에서부터 신경의 끝까지 뻗어 나가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의 최강자 한을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김창수도, 하늬안도.
자신이 망가트렸다.
드웨이크가 고통받던 그 세계로 더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 자신이 보내 버렸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 신뢰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을 말이다.
프로그램이라 해도.
기억과 추억을 지울 수는 없다.
존재가 없는 가상의 알고리즘 덩어리라고 해도 이곳에서 살아가며 만나고 느꼈던 모든 감정이 거짓이라고 할 순 없다.
존재라는 것은 그 기억들이 모여 맺어 가고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허무할 수 있다.
공허할 수 있다.
이 모든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 결국 찾아오는 건 어둠일 뿐이니까.
그러나 공연의 피날레, 그 마지막 찬란한 순간이 나의 손에 달려 있다면 나는 이 공연을 위해 사력을 다했던 나의 존재의 증명자들을 위해 더 열렬히 그 마지막을 장식해야만 한다.
정혁은 불쾌한 공간을 뚫고 결국 오아시스의 코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원형의 거대한 공간의 중심에는 기둥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고 푸른색 고압축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지면이라는 것이 없어 정혁은 그저 공중에 떠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쥐고 있던 젠트라를 놓아 버리고 두 망치를 소환해 들었다.
철로 이루어진 원형의 공간.
중심부에 박힌 코어 핵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광석에서 보석을 캐내고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어내는 대장장이.
만약 A가 나를 이곳으로 보낸, 나라는 놈의 직업을 대장장이로 결정한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저 오아시스라는 놈을 두 망치로 두들겨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은 아닐까?
“어이-”
순간 옆에서 한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한은 젠트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어떻게?”
“너 같은 허접데기하곤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 정도 변수도 생각하지 못 했을까 봐?”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본질적으로는 내가 너라니까?”
“하아? 이 새끼가 진짜.”
한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곧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분위기가 바뀐다.
정혁 역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젠트라가 웅웅거리고 한의 전신에 황금빛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할은 완벽히 정해진 것 같지?”
한의 말에 정혁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한순간일 거야. 놓치지 말고 파고들어.”
그 말과 동시에 한이 공기를 박차고 중앙의 기둥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