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6화 (196/200)
  • ◈196화

    “아닙니다. 이곳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우리 나가요.”

    린이 박달수에게 눈짓을 주자 박달수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자 김창수는 힘을 짜내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박달수의 손을 잡았다.

    비록 죽어 가고 있긴 하나 김창수의 두 눈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박달수는 정혁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김창수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박달수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김창수의 손등을 가볍게 툭툭 치고 그를 훌쩍 들어서 근처의 돌무더기에 앉혀 기대 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여기가 아니라 데리고 나가야죠!”

    린의 말에도 박달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김창수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강렬했던 눈동자는 열기가 조금 식어 있었다.

    “오래전 자네가 제논이라는 길드를 세우고 비르파인과 함께 할 때 난 그를 싸고 도는 자네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자네를 떠났지. 나름의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자네와 함께 제논의 일원이 되어 걸었던 이 여정을 후회하진 않네. 자네 덕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으니 말이야.”

    “……고맙네.”

    박달수는 그의 두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가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르파인과 정혁은 다른 자이네. 그러나 한편으로 자네에겐 비슷한 자이기도 하겠군. 부디 그의 끝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네.”

    “그럴…… 거야. 그렇게…… 하고 말걸세.”

    박달수가 몸을 일으켰다.

    린이 어쩌자는 거냐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박달수는 고개를 저으며 심장부를 나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린은 박달수의 뒷모습과 김창수의 표정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며 그를 따랐다.

    따라온 제논의 병력들은 김창수의 곁을 지나며 그에게 최대한 격식을 갖춰 예의를 표했다.

    김창수는 그저 눈을 깜박이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돌체가 김창수의 곁을 지나며 그에게 천계에서 가장 강력한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은 버틸 수 있게 해 줄거다.”

    김창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인사를 그에게 건네고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전투가 한창인 현장을 바라보았다.

    에이드윈들은 조심스럽게 심장부 한가운데에 용암이 떨어져 내리는 곳으로 향했다.

    로만과 유르겐이 먼저 그곳으로 향했고 리안은 발을 쉽게 떼지 못하는 안나를 데리고 뒤를 따랐다.

    안나는 수십 번 고개를 돌려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비르파인.

    그가 몰락해 갈 때도 그저 묵묵히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그의 곁을 지켰다.

    제논의 영광이 곧 도래할 거라고 믿으며 말이다.

    결국 그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손으로 맺어야 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그와 다시 만나는 날, 공백의 시간 동안 이룩한 제논의 위업 앞에 김창수는 당당히 서 있을 것이며 두 팔 벌려 친구를 안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김창수가 품고 있던 희망을 짓밟았다.

    비르파인은 저 너머 어디에서 미리 깨어난 자의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혹은, 이미 폐기 처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구해야만 하는 싸움에서 김창수는 후퇴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정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혁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언젠가 다시 비르파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지금의 제논도 없었을 것이며 왕국 제논은 쇠락의 길을 걷다 어느 순간 리사이클이 당도하며 모든 데이터와 기억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 의미 없는, 주체성이 없는 삶을 살다 또 이용당하고 죽어 갈 것이다.

    정혁 덕분에 제논은 성장했고 정혁의 강한 힘과 리더십이 그와 제논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김창수는 그의 생명과도 같았던 제논에 든든한 힘이었던 동료의 마지막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부디 지금의 지배당한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한…….]

    격렬한 전투 도중 한의 마음속에 날아든 전음 때문에 한의 움직임이 조금 어긋났다.

    그 틈을 비집고 정혁의 화염 망치가 불꽃을 뿜으며 파고들었다.

    강력한 화력을 수천 갈래로 쪼개며 한이 사이를 뚫고 섬광처럼 사라졌다.

    잠깐, 아주 잠깐의 순간에 한은 돌무더기에 기대고 있는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그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단 말이지?”

    한이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이미 리안은 용암 내부로 돌진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한은 결심을 굳혔다.

    김창수가 생각한 대로 전개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혁, 저놈은 저래 봬도 꽤나 감성적인 놈이었으니까.

    한은 다시 한번 그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기와 화염이 미친 듯이 휘몰아쳤지만 그럼에도 틈과 공간을 쑤시며 그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점점 김창수 쪽으로 몰아넣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점점 압박을 받기 시작하자 정혁은 뭔가 이 흐름을 전환할 거리를 찾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의 통제를 받고 있는 놈이라면 김창수에 대한 개념조차 없을 터.

    감정조차 없을 이때 그의 광범위한 공격에 의해 김창수가 희생당함으로써 내면에 고개 숙였던 진짜 정혁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김창수의 죽음이라면 충분히 정혁의 내면에 경종을 울릴 수 있으리라.

    이 귀찮은 놈을 상대하는 것이 결국 오아시스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꼴이니 어서 끝을 내야만 한다.

    “각오……!”

    한이 소리치며 정혁에게 강한 공격을 내질렀다.

    두 망치로 그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그 여파로 정혁은 정확히 김창수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공기를 박차며 멈춰선 그의 시선이 돌무더기에 기대어 있는 김창수에게로 향했다.

    정혁은 쯧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오른손에 쥔 화염 망치에 열기를 가득 모아 김창수의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려치려 했다.

    “정혁!”

    그때 정혁의 대장간 차원문이 강제로 열리더니 그 속에서 조의 손이 뻗어 나왔다.

    정혁의 움직임이 순간 봉쇄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린 정혁이 화염 망치의 열기를 그 자리에서 터트렸다.

    엄청난 열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다.

    조가 강제로 열었던 포탈이 닫혔고 조의 손이 사라졌다.

    한 역시 정혁에게 달려들려다 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에 바빴다.

    이 정도라면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김창수가 버티긴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황금빛 드래곤의 날개가 김창수가 있던 곳에서 등장했다.

    평소보다 작은 형태로 김창수를 막고 있던 에드가는 날개를 걷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날개 뒤로 분노한 하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좀 맞아야겠다.”

    하늬안이 대도를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성큼성큼 정혁에게 걸어갔다.

    정혁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두 제련 망치로 그녀에게 일격을 날리려 했지만 미간에 주름이 잔뜩 새겨지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기회를 날렸던 한이 다시 정혁에게 달려들려 했다.

    완벽한 기회였다.

    “움직이지 마, 이 새끼야!”

    하늬안이 한의 움직임을 느끼고 소리를 질렀다.

    스킬도 아니고 마나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눈깔 똑바로 안 뜰래?”

    정혁의 코앞까지 당도한 하늬안이 주먹을 쥐고 정혁을 쳐다보며 그의 머리를 향해 힘을 다해 휘둘렀다.

    분명 강하게 머리를 강타하는 소리가 나야 했지만 기대한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늬안은 정혁에게 그저 가벼운 꿀밤을 날려줬을 뿐이었다.

    “정신 차려, 바보야. 같이 돌아가자.”

    하늬안의 따뜻한 말과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나 하늬안의 등으로 전력과 화염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정혁의 두 망치에서 반사적으로 공격이 휘몰아친 것이었다.

    하늬안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럼에도 시선만큼은 정혁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혁 역시 아래로 쓰러지는 하늬안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정혁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허무함을 이길 것은 없다. 어리석은 존재야.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너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잊지 마라. 너는 나와 결을 같이한 자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리안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오아시스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하늬안이 쓰러지면서 정혁의 마음 한가운데 통제에 대한 균열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저들은 저들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너에겐 이곳이 전부다. 내가 없어지면 너 역시 없다. 너는 너의 세계를 지키면 그만이다. 너의 세계에서 네가 왕이 되면 그만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이그……극.”

    정혁의 다문 입에서 천천히 이상한 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늬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정혁을 바라보다가 결국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에겐 더 이상의 움직임도 없었다.

    플레이어가 죽으면 상단에 고정된 네임 플레이트가 초록색에서 회색으로 변한다.

    하늬안의 네임 플레이트 역시 그렇게 회색으로 변해 갔다.

    정혁의 입술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과 동시에 그의 두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이……개……이익.”

    [저항하지 말고 본질을 깨달아라. 저들에겐 저들의 세계가 있으나 너에겐 이곳뿐이다! 이곳뿐이란 말이다!]

    한이 피식 웃고는 허공을 향해 중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리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리안은 금방이라도 하늬안에게 달려가려는 안나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다시 그날의 자신이 실패했던 저 교만 덩어리를 파괴할 차례다.

    “이 개새끼야아아아-!!!”

    정혁의 말문이 터져 올랐다.

    한참 그의 목소리가 화산 심장부 동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라테와 엘라, 에트론과 드웨이크, 그리고 에드가까지 동시에 정혁을 향해 달려갔다.

    정혁이 하늬안을 끌어안으며 주저앉았고 그의 에고 장비들과 에드가는 정혁의 곁에서 함께 울음을 토했다. 평범한 울음이 아니었다.

    깊은 한과 분노가 서린 울음이었다.

    리안은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돌려 떨어져 내리는 용암 폭포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곧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곳을 세밀하게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중간에 마나가 흡수되는 블랙홀 같은 곳이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구멍도 보이지 않고 단단히 모든 공간이 막혀 있는 것 같았다.

    “안 가?”

    한이 어깨를 풀며 묻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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