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5화 (195/200)
  • ◈195화

    추려진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에도라에 이어 안도리니까지 긴 여정에 지쳐 방전된 체력에 기본적인 회복 마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수준의 장기적인 누적 데미지를 입은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돌체와 하드린의 광범위한 공격에 당한 인원들도 적지 않다.

    팀장들도 대거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곳에 남아서 남은 제논의 병력들과 안도리니에서 항복한 병력들을 관리해 줘야 했다.

    결국 린, 앤, 돌체.

    그리고 에이드윈과 그들의 에고 장비들.

    힘을 모아 정혁을 구해 내자고 다짐한 정예 오십여 명의 인원들이 전부였다.

    한은 모인 자들을 보고 어깨를 으쓱한 뒤 갈 길을 재촉했다.

    리안이 대규모 이동 마법을 시전해 인원들을 순식간에 엔듀라곤 화산 근처로 이동시켰고 모두는 그곳에서 의외의 동료를 만날 수 있었다.

    박달수와 이프, 그리고 데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김창수가 걸어간 길에 대해 전달해 주었다.

    김창수는 정혁이 엔듀라곤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지체 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박달수 일행이 그를 구하려고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가 되레 스스로 탈출한 김창수를 보고 놀랐지만 김창수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했다.

    엔듀라곤 화산까지 그의 상처를 치유하며 함께 나아간 그들은 김창수의 권유로 이곳에 남았다.

    분명히 제논의 일행들이 엔듀라곤으로 올 것이니 그들과 합류하여 화산 심장부로 와 달라고 말이다.

    박달수가 그의 독단적인 행동을 극구 말렸으나 김창수는 사령관으로서의 명령이라고까지 강조하며 동행을 막았다.

    제논의 일행들보다 피로도는 상대적으로 덜 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보이는 이들이었다.

    리안은 박달수에게 계속해서 함께 나아갈 수 있겠냐고 물었고 박달수는 지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과 이프 역시 동행의 의사를 표했다.

    쿠쿠강-

    그들이 화산 심장부로 향하는 동굴 앞에 섰을 때 이제까지 큰 활동이 없었던 엔듀라곤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활화산이었지만 용암을 밖으로 뿌리거나 내부에 폭발이 일었던 적은 없었는데 엔듀라곤 내부에서 어떤 거대한 움직임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은 입맛을 다셨고 뒤에 따라오는 일행들을 바라본 뒤 먼저 간다는 듯 찡긋 웃고는 사라져 버렸다.

    리안이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리안은 이제까지의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 복기해 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A를 만나고 세계의 진실을 알았던 때부터 반복되는 리사이클 동안에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들과 끊어진 인연들, 매번 쫓겨 다니면서도 기회를 찾아내야 했던 일들, 그 모든 순간의 종지부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다.

    이 싸움의 최전선에서 승리를 이끌어 갈 주역이 자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괜찮다.

    리안은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는 사실만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참, 긴 시간이었다.

    저 안에서 어떤 결과를 맞을지라도 이 순간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결과를 눈앞에 둔 지금, 후회는 없다고 다짐했다.

    이보다 더 강한 자들은 이제 이 세계에 없다.

    또한.

    리안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따라오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또한, 함께 싸우고 있는 현실 세계의 동료들 역시 이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리라.

    아니, 이미 그 끝에서 함께 결말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 * *

    뜨거운 열기에 눈을 뜨기조차 힘든 곳.

    화산 심장부 한가운데 .

    한은 거침없이 동굴 안을 돌파해 미세한 정혁의 기운을 감지하여 쫓았다.

    타고난 암살자로서 추적의 귀재였던 그는 묘한 위화감을 주는 어떤 존재에서 연하게 남아 있는 정혁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 있는 사그라지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추측이 맞다면 이 소리의 주인은 김창수였다.

    A가 전해 준 여러 기억 속에서 한은 자기의 마지막 역할을 깨달았다.

    오아시스에게 잠식된 정혁을 막아 내는 것.

    뒤따라오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맡길 수 없는 오아시스가 확정한 가장 강한 적.

    최종 보스를 홀로 처리하는 것이다.

    다행이지 않은가?

    한이 이제까지 상대한 적은 대개 인간들, 플레이어들, 거대한 몬스터, 힘을 합쳐야만 공략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패턴을 가진 적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플레이어를 굴복시키면 되니 말이다.

    이거야말로 한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희뿌연 증기를 뚫고 엔듀라곤 화산의 심장부 공터에 도달한 그는 이내 눈앞에서 피떡을 하고 쓰러져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김창수를 발견했다.

    그의 뒤로는 악몽의 비수를 쥐고 있는 정혁이 표독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김창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 그거 내 거잖아?”

    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혀를 찼다.

    남의 손에 쥐어진 자기의 무기를 보고 있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왔나?”

    “어- 이제 어떻게 좀 상황이 바뀐 것 같지?”

    “그런 것 같긴 하네. 그것도 좀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너랑 나의 힘도 완전히 역전됐다는 거.”

    “그래? 그것 참 재밌겠는걸?”

    한이 입꼬리를 올리자 정혁 역시 빙긋 웃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차가운 모습이었다.

    더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정혁을 밀어붙이고 어서 떨어트린 뒤 용암 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곳에 기억 속의 기둥이 있을 것이리라.

    “한-!”

    누워 있던 김창수가 소리쳤다.

    마지막 기력을 전부 쥐어짠 듯 했다.

    한이 젠트라를 꺼내 손목을 돌리다가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김창수는 겨우 고개를 돌려 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여서는 안 되네…… 그는…….”

    “무슨 개소리야, 나는 지키는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는…… 제논의…… 기둥일세…….”

    “이 아저씨 끝까지 헛소리만 해 대네. 돌아가실 거면 얼른 가시고……!”

    한이 발을 차 순식간에 정혁의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정혁은 같은 속도로 반응하여 악몽의 비수로 날아드는 젠트라를 모두 틀어막았다.

    표정에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그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낸 정혁의 얼굴에는 점차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한…… 벽을 느껴 본 적 있어?”

    정혁의 입에서 한 마디 뱉어짐과 동시에 그의 반격이 시작됐다.

    한과 똑같은 움직임.

    그러나 그보다 더 섬세하고 빨랐다.

    급소를 노리는 악몽의 비수의 공격은 이전보다 더 날카로웠다.

    한은 자신이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더러운 불쾌함이었다.

    적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니.

    그의 플레이 시간 동안 저레벨 시절에도 느껴보지 않았던 기분이었다.

    한은 이빨을 깨물며 정혁의 공격에 맞섰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라면 중간에 끼어들지도 못할 만큼의 싸움이었다.

    “오호-!”

    흥미롭다는 듯 반응한 쪽은 정혁이었다.

    한의 대응이 자신의 예상 이상이라는 듯.

    보통 이 입장은 한의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번엔 한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할 입장이 된 것 같았다.

    조금 긴장한 듯 보였던 한이었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한은 코웃음을 치더니 쥐고 있는 젠트라에 힘을 더했다.

    황금빛 마나가 그의 손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검은 한 고유의 마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황금빛 마나와 검은 마나가 융합되자 한의 손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좀 더 힘을 내셔야 할 거야?”

    한의 한 마디와 동시에 젠트라의 검날이 길게 뻗어 나갔다.

    단검을 쥔 암살자들은 가질 수 없는 검기, 일격 필살의 신조를 가진 그들이기에 검기가 발현될 때까지 검술을 연마하는 것은 사치였다.

    게다가 그들은 검기가 발현될 스킬 조건 자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신체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암살자에겐 검기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은 이미 단검술에 있어서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강자.

    거기에 황금빛 젠트라의 마나가 융합되자 평소에 펼쳐지지 않던 검기가 발현된 것이다.

    또한 그의 검기는 검날에 범위를 조금 더 넓혀 주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의 검기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정혁이 다양한 방면으로 한의 구석구석을 공략하기 시작했지만 한이 움직임으로 막지 못하는 곳을 검기가 자유의지로 이동해 막아 주었다.

    “잊지 마, 이거 에고 장비야.”

    한이 씨익 웃으며 정혁이 애꿎은 곳에 소비한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악몽의 비수가 겨우 한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악력을 유지할 수 없었던 정혁은 그만 악몽의 비수를 놓치고 말았다.

    “그거 알아?”

    그때 정혁 역시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단검술은 별로거든.”

    그의 손에 남은 악몽의 비수가 떨어지며 동시에 두 제련 망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찰나의 소환을 막아 보려 했지만 제련 망치는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화염과 전력을 마구 뿜어냈다.

    악몽의 비수는 오히려 한의 입장에서 그리 어려운 패턴의 무기가 아니었다.

    악몽의 비수 능력치야 한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전에 정혁과 싸웠을 때도 그가 다루던 저 제련 망치는 뭔가 특별하고 이상했다.

    망치에 부딪칠 때마다 무기의 내구도가 다른 적과 싸울 때에 비해 배 이상 깎여 나갔고 불규칙적으로 퍼져 나가는 화염과 전력은 파고들 틈을 만들기 어려워 보였다.

    그때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경험의 차이로 정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오아시스를 등에 업은 녀석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은 한에 필적하는 피지컬로 자신을 더 화려하게 몰아넣을 것이 뻔했다.

    “칫.”

    다시 한번 둘의 격돌이 이어졌다.

    이제는 화염과 번개가 번쩍이고 검광과 고함이 난무했다.

    그 사이에 리안 일행이 화산 심장부로 진입했다.

    안나는 쓰러진 김창수를 향해 급히 뛰어갔다.

    그녀의 뒤로 드웨이크 역시 함께했다.

    로만은 라테를 건틀릿화시켜 전투에 뛰어들어 보려 했지만 리안이 그를 말렸다.

    “우리 이상의 싸움이에요. 그리고 그는 우리의 개입을 원치 않을 겁니다.”

    로만은 리안의 말에 수긍했다.

    “린.”

    한과 정혁의 싸움에 넋이 나가 있던 린이 리안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김창수 님을 부탁합니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어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러 갑니다. 이곳에서 벗어나 주세요. 다행히 우리와 함께한 제논의 병력들이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겠군요. 최대한 엔듀라곤 화산에서 멀리 벗어나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진…… 우리도 모르니까요.”

    “그럼…… 이게 우리가 보는 마지막 순간입니까?”

    린의 말에 리안은 눈을 깊이 감았다.

    그리곤 큰 숨을 들이 쉬며 말했다.

    “그럴 겁니다. 반드시 그럴 거예요.”

    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달수와 함께 김창수에게 다가갔다.

    김창수는 끊어져 가는 숨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숨을 힘겹게 뱉고 있었다.

    에트론이 급히 그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봤지만 이미 마법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상처를 입은 뒤였다.

    “가야 합니다. 사령관, 우린 가야 해요.”

    린이 그에게 말하자 김창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저 나를 어딘가에 기대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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