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군요.”
“예상을 했다?”
“당신이 오아시스 쪽에서 있을 때부터 당신은 결국 우리 쪽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째서?”
“당신 같은 망나니를 수식으로 움직이는 기계 따위가 통제할 수 있을까요?”
“하-?”
한이 싱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그러나 리안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금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이 리안의 예상과 같이 결국 그들의 소굴로 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혁……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 까불이.”
“……까불이라는 표현은 너무 실례인 것 같네요. 어떻게 보면 당신을 오아시스의 손아귀에서 빼내 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이미 그 오아시스 녀석은 나를 통제하기 힘들었던 것 같던데?”
한이 헛웃음을 치며 말을 마쳤지만 리안의 차가운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몸 안에서 검은 어떤 것이 빠져나오더군. 그리고 곧 정혁, 그 친구에게 전이되었어. 처음으로 오아시스라는 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뭐, 더 이용하기 편하다나 뭐라나. 그리고 사라졌지.”
“사라졌다구요?”
“그래, 어디로 갔는지는 나야 모르고. 내가 그들에게 붙잡혀 있을 때…… 하, 참 표현도 어처구니없네. 어쨌든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을 때의 기억은 없어. 그래서 도대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오아시스 그놈에게 남은 건 정혁, 그 친구밖에 없는 거 아냐?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놈의 코어가 있는 곳이니까 가면 만날 수 있겠지.”
“역시 엔듀라곤이 그곳이군요.”
“그래. 저 곳.”
리안과 한이 동시에 저 멀리 산맥을 바라보았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곁으로 E와 안나가 다가왔다.
그리고 곧 로만, 유르겐 역시 합류했다.
모든 에이드윈이 모인 자리.
그곳에서 안나는 E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 남자는 우리가 전에 제논의 성채에서 잡았고 소멸됐던 그 E입니다.”
E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꾸벅했다.
유르겐과 로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고 리안만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 딱 질색이라 이만.”
이 말을 끝으로 한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리안은 그가 사라진 곳을 흘깃 보곤 말했다.
“위장술 한번 뛰어나더군요.”
“여러모로 받을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죄다 받은 상황이니까요?”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방금 사라진 양반에게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되었나 보죠?”
“그건 좀 다른 문제구요.”
“아, 이런 이상한 소리 할 시간 없구요.”
안나가 인상을 구기며 말을 끊었다.
“E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리고 김창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해요. 그리고 이자는 우리의 편에 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E는 사람들을 바라본 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창수는…… 재밌게도 엔듀라곤 산에 있습니다. 제가 안나 님께 말씀 드렸듯 어차피 저는 소멸하고 또 다른 자아를 가진 E가 태어나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눈을 떴을 땐 또 E의 몸을 하고 있었죠. 애초에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저를 대하는 오아시스의 행동은 모두 저라는 존재를 처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사명을 주입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는 것들이 오아시스를 처음 경험하는 자들에게 하듯 했으니까요. 이상했지만 연기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일단 이 목숨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관심 없어 했던 로만과 유르겐이 조금씩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곁으로 각자의 에고 장비들이 다가왔다.
“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의문은 이미 모든 내막을 오아시스가 알아차린 것 같았는데 왜? 왜 도대체 오아시스는 강제 셧다운 절차를 실행하지 않는 걸까? 저는 그가 이 세계를 온전히 신경 쓸 만큼의 여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접속이 원활하지 않다랄까요? 아마 이 세계뿐만 아니라 그가 관리해야 하는 당신들의 실제 세계에서도 모종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추측이지만요. 두 세계에서 만약 동시 공격을 받고 있는 거라면? 오아시스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더 신경을 쓸까요? 당연히, 당연히 당신들의 세계일 겁니다. 데이터상으로 알고 있는 거지만 당신들이야 충분히 다시 복제해 낼 수 있지 않습니까?”
로만이 기침 소리를 내며 조금의 불쾌감을 표했지만 E는 멈추지 않았다.
“오아시스는 이 세계를 최소한 유지시키면서 당신들의 현실세계에의 급한 불부터 마무리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니 접속이 원활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 생기고 저처럼 시스템의 오류들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그건 그렇다 치고 김창수는 어떻게 된 건데?”
유르겐의 말에 E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류. 그걸 이용했습니다. 저는 그저 김창수를 풀어 주려 했습니다만 김창수가 묘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기는 풀려 봐야 어차피 전장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자기가 가장 필요한 곳은 엔듀라곤이다.”
“……김창수…….”
리안이 엔듀라곤 화산 쪽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한번 되뇌었다.
“친우를 잃어버리는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면서 그는 자신을 엔듀라곤으로 보내 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오류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풀어 준 뒤 잠깐 오아시스와 연결이 흐려졌을 때 그를 엔듀라곤 화산으로 순간 이동시켜 줬습니다. 그럼? 이제 없어진 김창수는 어떻게? 그래서 묘수를 냈죠. 점점 전쟁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그가 변절한 것처럼 꾸며야겠다.”
“그게 맞아떨어졌다?”
유르겐의 말에 E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출전이 결정되고 저는 꼭두각시 인형을 하나 만들어 눈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실제의 저는 김창수로 변신해서 조직의 뒤를 따랐어요. 오아시스가 압도적인 힘과 능력을 더해 준 이때엔 본래도 특기였던 변장이 더 빛을 발했죠.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아까 그 미친놈 빼구요.”
그의 말이 맞았다.
누구도 그가 진짜 김창수가 아닐 거라는 의심을 하지 못했다.
“정혁이…… 왜 엔듀라곤에 있는 건가?”
라테가 곁에서 물었다. 에이드윈이 전부 라테를 바라보았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리안? 말해 줘, 그놈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거야?”
엘라가 리안에게 직접적으로 물었고 뒤이어 에트론이 한 마디 더했다.
“정혁 님은 지금 굉장히 약해진 상태일 거예요! 저희도 다 각자의 주인을 찾아 흩어졌고 지금은 에드가도 곁에 없잖아요?”
에트론의 말에 유르겐이 검지 손을 올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이 핀잔을 줬지만 그의 표정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웨이크가 천천히 안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붙잡았다.
드웨이크의 손길에 조금의 위로를 얻었지만 안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긴 세월 에이드윈들은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리사이클을 경험하며 해방을 위해 음지에서 노력해 왔다.
그들은 늘 추적당했고 자신들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해야 했다.
리안을 시작으로 안나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을 발설하지 못하고 자기를 숨기며 사는 삶에 납득하긴 싫지만 일정 부분 적응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정혁이었다.
정혁은 안나를 만나고 정혁을 통해 제논이 다져졌다.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틀이 생기고 점점 정혁은 강해졌다.
유르겐을 만나고 리안을 만나고 로만까지 만나며 모든 에이드윈이 천천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세계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고 이 마지막 싸움을 버티기 위해 대장장이인 정혁의 기술을 필수불가결했다.
각자에게 배정된 에고 장비들은 모두에게 이 전쟁을 버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었고 각자에게 너무나 맞는 시너지로 활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젠 그가 없어졌다.
이 모든 길을 걷게 해 주고 활로를 열어 준 그가 어둠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구해 내야 하지 않겠나.”
정적을 깨고 날아든 목소리는 돌체였다.
돌체는 앤의 곁에 서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드린…… 그의 죽음이 나에겐 생각보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천계가 세워진 이래로 여러 타락 천사들이 종종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누구도 여덟 깃의 악마 날개를 가진 자는 없었다. 한, 그 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종전에 누가 이겼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드린은 나와 싸우며 끝없는 증오와 분노를 불태웠다. 어찌하면 그렇게 많은 분노와 한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내가 놓쳤던, 천계를 운영하며 미처 손대지 못했던 부분에서 쌓인 원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겠지.”
에트론이 고개를 숙였다. 돌체는 에트론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할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순간까지 방치했다가 마주한 낯선 모습에 놀라고 그를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하드린은 너무 늦었었다. 그러나 정혁, 그자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고 나보다 훌륭한…… 훌륭한 동료들이 있다.”
에트론의 동공이 확장되어 돌체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돌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또한 금기이나 에트론은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대상보다 낮춘 것이었다.
천계의 법도이자 천계 그 자체인 자가.
대천사장으로 콧대 높은 천사들의 가장 머리 위에 있는 자가.
중간계의 인간들을 자기의 존재보다 더 높여 준 것이다.
돌체는 에트론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앤이 그의 곁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니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가자. 가서 자네들이 원하는 미래를 얻어 내는 거다. 건방진 인간 놈 하나가 외친 그 이상한 소리들이 전부 불쾌했지만 그럼에도 놈이 말하는 것은 옳다. 엔듀라곤으로 더 늦지 않게 가야만 한다. 가서 정혁을 만나고 그를 되찾는 거다.”
돌체의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흩어집시다. 최대한 병력들을 추려야 합니다. 상처 받은자들과 지친 자들은 모두 배제하고 몸 성하게 싸울 수 있는 자들만 함께 이동하겠습니다. 10분 안에 채비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리안의 말과 함께 모였던 모두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