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3화 (193/200)
  • ◈193화

    “돌체 님, 제발!”

    리안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돌체와 하드린의 싸움에 사력을 다해 베리어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하지만 번번이 헛수고였다.

    수십 겹의 베리어도 두 고등 존재의 싸움에는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다.

    저들의 싸움으로 인해 산발적으로 펼쳐지는 광범위한 공격은 피아식별이 없었다.

    돌체는 천계의 법도와 규율을 지켜내기 위해 이 오만한 타락 천사에게 자비 없이 모든 공격을 퍼부어 댔고 타락 천사 하드린의 경우에는 그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천계에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이 땅에 타락 천사들의 시대를 열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체를 밀어붙였다.

    리안과 함께 앤 역시 베리어를 쌓는 데 함께 했다.

    둘의 이 베리어로 뜬금없이 사망하는 플레이어들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의 상황이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로만과 유르겐 그리고 린과 제논의 지도부가 검은 말 조직원들과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창수가 있었다.

    가면을 벗진 않았으나 그의 도끼와 움직임은 누가 봐도 그가 김창수라고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그의 뒤에 있는 생생한 검투사의 맹렬한 기세는 제논의 모든 플레이어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드래곤 에드가가 등장했을 때 그의 등에서 등장한 사람이 정혁이라면 상황은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정혁 역시 사라졌다는 소문이 전장에 삽시간에 퍼지며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적군의 기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제이크는 더욱 날뛰었다.

    수성전이었기에 성안에만 있어도 되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면서 미친 듯이 전쟁터를 휩쓸고 다녔다.

    그를 보호하는 특임대 수백이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라테를 비롯한 정령왕들은 모두 거대화하였고 엘라 역시 본래의 엔트 모습으로 노란빛을 발산하며 전쟁터를 찬란히 물들였다.

    시스템의 가호를 받은 검은 말 조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강했고 다른 방안이 없다면 연합군이 밀릴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때.

    “어이!”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

    전쟁터 전체를 뒤흔드는 소리였다.

    황금빛 섬광이 어두운 하늘 아래서 땅으로 내리꽂혔다.

    황금빛 마나가 사방에서 휘몰아쳐 떨어진 자에게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폭발하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 황금빛 마나에 하드린이 거느리고 온 마계의 패잔병들이 모두 몰살당했다.

    하드린은 불쾌한 기분에 지면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돌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트라의 마나가 정혁이 아닌 다른 자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하드린의 빈틈에 자신의 창을 찔러 넣으려 했다.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다시 시작됐다.

    황금빛 마나 물결과 먼지들이 가라앉고 천천히 그곳에 등장한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외쳤다.

    안도리니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연합군에서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또 보네?”

    마침 근처에 있었던 하늬안을 발견한 한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자 하늬안이 동공지진이 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손에 쥐어져 있는 건 젠트라였다.

    ‘어째서……?’

    “일단 난 너네 편인데…… 누구부터 쥐어 패 주면 되는 거야?”

    “……예…… 예에?”

    “그래 그래그래, 어이없겠지 근데 금방, 금방 정리하고 다시 보자고?”

    한은 눈빛을 찡긋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 그 순간 사방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검은 말 조직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이 돌아왔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제논과 연합군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검은 말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로만과 유르겐이 밀어붙이고 있던 알파벳을 부여받은 그들의 지도부조차도 모두 일격에 사망했다.

    지금의 한은 그들이 기억하는 그때보다 강하다.

    그들이 기억하는 그때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도 그때보다 더 강하다.

    그의 손에 쥔 젠트라는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듯 악몽의 비수보다 훨씬 더 큰 시너지를 내 주었고 황금빛 마나의 고유 힘을 전달받은 그는 시간조차 정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불과 5분이었다.

    한이 그곳에 남은 모든 안도리니의 플레이어들과 검은 말 조직원들을 소탕하는데 걸린 시간 말이다.

    헐레벌떡 도망치는 제이크는 심장과 뒷목에 동시에 젠트라가 꽂혔다가 빠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아시스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해방되었을 때 현실 세계의 인간들을 통제하고 노예로 부리겠다는 강한 꿈을 가졌던 제이크는 그렇게 허무하게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한의 검은 김창수의 앞에서도 멈췄었는데 한은 그의 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너 뭐야? 그 아저씨가 아니잖아?”

    한의 한 마디와 함께 회색빛 안개가 그의 몸을 뒤덮더니 곧 E가 새겨진 남자가 등장했다.

    E는 마스크를 벗고 웃으면서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했다.

    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죽이려 했지만 로만이 급히 달려가 한을 막았다.

    예전의 한이었다면 로만마저 죽였을텐데 한은 콧방귀를 한 번 뀌곤 나머지 일당들을 처리하러 달려 나갔다.

    5분.

    5분이었다.

    제논이 연합군을 이끌고 변방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만 2주 이상이다.

    이 수성전에서 일주일을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반나절을 사력을 다해 싸워 왔다.

    그러나 한은 단 5분 만에 모든 적을 처치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젠트라를 이용해 시간을 정지한 그는 하드린의 코앞에서 정지된 시간을 풀어 그에게 살짝 윙크하며 말했다.

    “배신자는 원래 더럽게 죽는 법이야.”

    그와 동시에 하드린의 여덟 악마 날개가 동시에 잘려 나갔다.

    누구도 날개를 자를 수 없다.

    월등히 강한 존재가 아니라면 날개를 잘라 낼 수 없다.

    그러나 한은 너무나 손쉽게 그의 날개를 잘라 그를 추락하게 만들었다.

    겹겹의 최고위 베리어가 무색하게 한은 그것을 뚫고 들어가 하드린을 그대로 추락시킨 것이다.

    돌체 역시 어이없는 이 상황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드린이 추락하자 그를 받아 들기 위해 날아간 자가 있었다.

    하드린의 오랜 친구 에트론이었다.

    날개가 잘린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기에 에트론은 하드린을 받아 들고 천천히 그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말끔히 잘려 떨어진 날개들이 주변에서 검붉은 빛을 뿜으며 사라졌고 하드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트론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에트론이 하드린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돌체가 지면으로 내려와 하드린에 에트론에게 다가가려 하자 유르겐이 급히 그를 막아섰다.

    돌체가 화를 내려 했지만 앤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앤의 말에 돌체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이, 이게 무슨…….”

    하드린이 황당하다는 말투로 한 마디 뱉었지만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괜찮아, 친구야. 괜찮아.”

    에트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드린을 바라보았다.

    천계의 영롱한 얼굴이 아니라 마계의 거무죽죽하고 곰보 핀 얼굴로.

    탄탄한 몸과 건강한 피부가 아니라 어긋한 관절과 변색된 피부로.

    튀어나온 이빨에 곳곳이 상처로 찢어진 그를 에트론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많은 것이, 많이, 아주 많이 변할 거야. 이젠, 이젠 너같이 홀로 외로운 자들이 생기지 않게 내가, 내가 노력할게…….”

    에트론이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때가 돼서 하드린은 감정이 절제된 눈동자로 에트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과거 에트론과 친구였을 때 나눴던 시간들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드린은 그렇게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에트론은 소멸하는 하드린의 손을 마지막까지 잡아 주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 한을 향해 린이 거침없이 다가왔다.

    린은 한의 앞에서 서서 금방이라도 그에게 한 대 먹여 줄 것처럼 씩씩거렸다.

    “네놈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이런 행동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행동을 세탁된다고 착각하진 마.”

    “세탁-?”

    젠트라의 날을 닦던 한이 일어나 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탁은 무슨. 게임이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린이 한과 격돌하려 하자 리안이 나타나 둘을 중재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을 도모해야 할 때였다.

    그때 한이 거대한 돌 위에 올라서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인마들아!”

    어처구니없는 수식어였지만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내 덕에 이겼다! 안 그러냐!”

    모두가 침묵했다.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다 이긴 건 아니야! 하나, 딱 한 놈 남았다!”

    한의 말과 함께 약간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존나 힘들겠지! 이제 좀 쉬고 싶을 거고! 대륙을 통일했다는 위업에 참여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안 돼! 아직 안 끝났다, 이 자식들아!”

    한이 손가락을 치켜 들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타이런 대륙의 중심부 가장 높은 화산 엔듀라곤이 있는 곳이었다.

    “엔듀라곤에서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그곳으로 진군한다! 지금 당장 말이야!”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왜?

    어째서?

    저 쓰레기 자식의 지휘를 왜?

    이런 식의 대화들이 오고갔다.

    한이 혀를 한 번 차곤 큰 숨을 들이쉬고 또 한 번 내쉬며 소리쳤다.

    “선택권은 없어! 가든가 뒤지든가! 내 방식대로!”

    ‘내 방식대로.’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다.

    그것이 특히 한의 입에서 나왔을 땐 더욱.

    그의 방식대로라면 결국 따라야만 한다.

    아니면 그는 일격에, 잠깐의 순간에 목이 머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경험시켜 줄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겁한 자식들아! 니들 지도자 정혁과 김창수가 저기 있는데, 여기서 끝내려고?”

    한의 말에 또 한번의 웅성임이 일어났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전쟁은 끝났을지라도 정혁과 김창수가 아직 남아 있다.

    “가자! 가서 너희의 지도자들도 찾고 이 빌어쳐먹을 세상의 끝을 내 보자!”

    한의 고함에 몇몇이 화답을 하더니 곧 화답은 함성으로 이어졌다.

    전열이 빠르게 정비되고 모두가 일제히 방향을 바꿔 섰다.

    한은 씩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린을 향해 말했다.

    “원래 이런 게 게임인 거야, 알겠냐?”

    린이 인상을 구기곤 병력들 사이로 사라졌고 리안은 로만과 유르겐에게 제논의 지도부와 연합 세력들을 재정비해서 곧바로 엔듀라곤으로 진격하자고 이야기한 뒤 한을 불렀다.

    “아아, 당신이 첫 번째 에이드윈인가? 그 기세를 잘도 숨겼구만?”

    알고 있던 바이지만 여전히 적당히를 모르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리안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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