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1화 (191/200)
  • ◈191화

    에드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콧김을 길게 내뿜곤 착지해 하늬안이 잘 올라탈 수 있도록 한쪽 날개를 내려 주었다.

    하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에드가의 등 위에 올랐다.

    일반적인 말처럼 등에 뭔가 쥘 만한 것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하늬안은 에드가의 등 비늘을 꽉 움켜쥐었다.

    [빠르게 이동해야 하니 꽉 잡아라.]

    에드가의 전음이 하늬안의 마음에 울리는 순간 에드가는 높이 치솟았다.

    비명을 내질렀지만 상승하며 찢어지는 공기 소리에 그녀의 울부짖음이 묻혔다.

    구름 위로 올라갔다가 날개를 활짝 편 에드가는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잠시 활공한 뒤 곧 웅장한 날개를 펄럭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놈의…… 계획대로 움직였나?]

    에드가의 물음에 하늬안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한과 정혁이 없어졌으니 하는 말이야.]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알려 줬다기보단 알고 있었다고 말해야겠지. 젠트라, 그놈이 소멸하면서 녀석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나에게 일정 부분 흡수되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망나니에 싸움 귀신이라고 해도 내면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고대 존재의 역할과 가치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양심과 도덕적 가치, 그런 것들과 비슷한 거지. 젠트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 이상의 가치를 지켜 내기 위해 최초의 알파의 여정에 함께했으니 그 긴 시간 그가 바라던 염원을 그의 조각이었던 나 역시 지켜 내야만 한다는 사명을 외면할 순 없지 않겠어?]

    “최초의 알파…….”

    하늬안이 비늘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계획된 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이제 너는 너를 필요로 하는 전장으로 가면 되는 거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말이야.]

    “……예?”

    [김창수, 그가 변절했다.]

    “예에?!”

    하늬안은 하마터면 놀라 비늘을 놓칠 뻔했다.

    김창수가 변절했다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타락한 천사 하드린이라는 놈이 나타나서 대천사장 돌체라는 놈을 곤란에 빠트리고 있는 와중에 김창수가 빌어먹을 놈들의 마스크를 쓰고 등장했지. 난장판이야, 지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김창수는 올곧은 사내다.

    제논이 왕정에 휘둘리고 있을 때도 김창수는 끝까지 의리를 지켜 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항상 앞서서 싸우고 가장 마지막에 퇴각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자기 사람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사람이다.

    근데, 그런 그가 변절을 했다니.

    [에이드윈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김창수의 등장 덕분에 제논의 병력들은 일제히 사기를 잃었다네. 안나 역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제이크라는 미친놈은 정혁이 전투 대열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대놓고 전선에 등장해 살육을 벌이고 있어.]

    “빠르게…… 가야겠군요. 부탁드립니다.”

    에드가는 하늬안의 부탁에 콧김을 강하게 내뿜고는 더욱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 * *

    “뭐냐?”

    한은 불쾌한 듯 손에 쥐고 있던 젠트라를 내던졌다.

    그러곤 사방이 하얀 공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또 너냐?”

    왠지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한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와, 진짜. 또 열 받게 하지 말고.”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저쪽 끝에서 작은 점이 하나 보이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앞으로 줌이 당겨지듯 나타났다.

    낡은 원목 책상과 갈색 가죽 재질의 고급 의자.

    책상 위에는 여러 서류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고 정돈되지 않은 책들 사이사이도 변색 된 종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안경을 까닥 올린 남자는 손깍지를 끼고 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가 마치 책상 위의 상태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말쑥한 정장도 색이 바랬거나 곳곳이 헤져 조만간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야? 너도 늙고 막 그러는 거야?”

    “그러고 있지.”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서 손깍지를 풀곤 책상을 탁탁 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책상이 좌측으로 날아가 사라지고 일어선 남자와 한, 그 둘이서 서로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어때? 3년 만에 다시 세계로 돌아와 보니?”

    “그렇지? 네놈 소행이지?”

    한이 인상을 쓰며 남자에게 위협하듯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이번에는 비겁한 수 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한 판 붙자.”

    그의 말에 남자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다 곧 남자는 박장대소하며 배를 움켜쥐었다.

    한참 그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가다가 한이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자 남자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야, 한. 네가 정정당당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야? 늘 비열하게 남들 뒤에서 혹은 어둠 속에서 정확하고 확실하게 살해하고 조롱하기를 좋아했던 네가?”

    “……그거야 말로 싸움의 한 갈래이지만 네놈은 압도적인 시스템빨로 나를 짓눌렀잖아?”

    “그래, 뭐 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 나무란다고. 이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해 줄게.”

    “웃기는군.”

    한이 헛웃음을 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의 한이었다면 다짜고짜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지금 자기 눈앞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이미 한번 덤벼들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없다.

    이 남자는 이 세계의 ‘신’이라고 불렸던 자다.

    시스템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덤볐던 놈.

    그러나 한은 그 대가로 3년이라는 공백의 시간을 지나 눈을 떠야 했다.

    자기에게는 찰나였지만 세계는 이미 한이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 뒤였다.

    만약 이번에도 대책 없이 덤볐다간 그때와 똑같은 꼴이 날 수도 있다.

    이번엔 또 몇 년 뒤에 눈을 뜰지 모른다.

    급습해서 한 번에 목숨을 끊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부터 구상해 봐야 한다.

    놈은 적어도 자신을 당장에 어떻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머리 굴리지 말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남자는 한의 앞에 편안히 앉았다.

    그리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덤볐던 이유. 뭐였지?”

    “뭔 소리야. 네놈이 먼저 초대했잖아?”

    “……그니까, 그 초대가 뭐, 네 입장에서는 결투 신청서였다는 거야? 이거 듣던 대로 또라이네?”

    “……뭐,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한테 이유를 묻지 말라고. 상황 조성은 네놈이 한 거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오케이. 좋아. 그럼 좀 더 본질적으로 접근해 보자. 네가 나의 초대에 응한 이유는 뭐야?”

    “그냥, 네놈이 띠꺼워서.”

    “보통 그런 말은 면전에 대고 하지 않지 않나?”

    “지랄”

    “크음- 오케이, 그래 왜 그렇게 내가 불편하고 싫었는데?”

    “너라는 놈들. 그러니까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 속에서 플레이어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은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지. 게임이란 자유로워야 하거든. ……적어도 현실보다는 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때보다 더 냉철하게 네놈의 허점을 찔러 낼 거다.”

    “뭘로?”

    남자의 말에 한은 자기의 허리춤에 손을 댔다.

    그러나 늘 그와 함께했던 무기 악몽의 비수가 쥐여지지 않았다.

    한은 이빨을 까득이며 말했다.

    “이것 봐. 이 상황. 네놈의 개입 때문에 이런 상황들이 생기는 거라고. 정당한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게, 납득 할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지니까. 그게 엿 같은 거야.”

    “으이구. 어리석은 친구야.”

    남자는 한을 바라보며 혀를 차곤 그의 뒤에서 악몽의 비수를 꺼내 한에게 던져 주었다.

    그 순간 한이 악몽의 비수를 집어 들고 순식간에 남자의 복부와 등 뒤를 수십 차례 찔러 냈다.

    한의 입장에서는 빈틈이 없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놈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완벽히 공략해 낸, 그가 복기해 봐도 불필요한 동작이 없는 깔끔한 일격이다.

    그러나 남자는 양팔을 벌리고 서서 웃으면서 말했다.

    “더 해 봐도 똑같아.”

    다시 한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그의 앞에 수백 번 등장했다.

    가지고 있는 기력을 모두 소모해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치명타를 박아 넣었다.

    입술을 하도 강하게 물고 있어서 피가 베여 나왔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도 멈추지 않았다.

    오기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한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마지막 공격을 남자의 미간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악몽의 비수를 바닥에 던졌다.

    “안 해! 씨발!”

    그의 욕지거리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더 껄껄거렸고 한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헉헉거리며 쏟아지는 분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왜? 더 하지 그래?”

    “기다려, 딱 기다려 아직 안 끝났어.”

    한의 말에 남자는 입술을 비쭉 내밀곤 어깨를 으쓱한 뒤 손가락을 한 번 위로 까딱했다.

    그러자 한이 누워있던 바닥이 기울어지며 한의 몸이 자동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 힘은 나에게 쓰는 게 아니야.”

    그의 씩씩거리는 소리에 남자는 한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헛수고 하지 마. 난 이미 죽은 몸이니까. 본체조차 사라진 데이터 쪼가리에게 네놈이 아무리 공격을 박아 넣은 들 무슨 유익이 있겠나. 네가 힘써야 할 곳은 다른 데 있거든.”

    한은 여전히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긴 계획 속에 시작과 끝은 너였다. 한, 너 말이야.”

    남자가 양손을 들어 한의 관자놀이 쪽에 가져다 댔다.

    한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씩씩거리며 욕이라도 더 뱉어 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한의 모습은 조금은 씁쓸하게 바라보다 자신의 양손에 힘을 더했다.

    그의 손끝에서 빛이 뭉쳐져 곧 한의 머릿속으로 천천히 주입되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의 시작의 이야기. 그리고 네가 부탁한 이 세계의 마지막 이야기다.”

    한은 뭔가 아득히 자신의 머리로 밀려들어 오는 기억들의 파도 속에 정신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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