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0화 (190/200)
  • ◈190화

    하늬안은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몸이 가시 돋친 사슬에 감긴 것 점점 둔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독기를 가득 품은 살모사가 아구를 벌리고 자신을 삼키려는 것 같다.

    이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한, 저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며칠을 쫒겼던 그날들.

    정혁의 번개와 화염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몇 번이고 정지된 시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젠트라에서 쏟아지는 마나가 주변을 밝게 비출 때면 여지없이 그 사이로 한의 비수가 튕겨 나갔다.

    지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의 다툼이 번쩍인다.

    정혁은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놈은 아니다.

    놈은 단순한 장난쯤으로 자신과 하늬안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하늬안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여흥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궁금증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어 오히려 녀석의 심기를 더 건드리고 만 격이 되었다.

    정혁은 아슬아슬하게 하늬안의 목덜미를 향해 가는 악몽의 비수를 쳐 내고 다시 한번 시간을 멈췄다.

    본래라면 온전히 정지된 시간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한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찰나다.

    이전처럼 한은 지독하게도 정지된 시간의 균열을 부수고 들어와 정혁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혁의 차례였다.

    시간이 정지되는 순간 정혁은 이제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금기를 넘어섰다.

    한의 사정권에서 1초 이상 머물지 말 것.

    그의 전투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에게 붙는 것은 곧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최대한 멀리서 계속해서 간격을 조절하며 한의 빈틈을 노려 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하늬안을 지키면서 한의 공격을 막아 낼 순 없다.

    이판사판.

    정혁은 멈춘 시간의 틈, 그 사이에 멈춰진 균열을 비틀려는 한에게 돌진했다.

    한의 머리 양쪽으로 전력의 망치와 화염의 망치를 동시에 맞부딪치려 했지만 한은 어느새 정혁의 몸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가 다리를 올려 찼다.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의 공격.

    정혁은 망치를 버리며 젠트라로 한의 다리를 그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한은 순식간에 다리를 거두어들이고 몸을 틀어 그의 비수로 젠트라를 막아 냈다.

    “에? 너도 네 목숨 부지해야 하는 거 아냐?”

    “지랄.”

    하늬안은 자신에게서 걷어진 살기를 느끼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빠르게 그곳을 더 멀리 이탈했다.

    물론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들이 싸움에 도박수가 되지 않는 것 말이다.

    정혁은 양팔이 저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젠트라를 이전처럼 놓치지 않았다.

    보이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상급의 투명 방어구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이것은 하늬안도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간 모아 왔던 최고급 품질의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희귀한 광물과 재료들을 이용해 그의 대장간에서 조와 함께 만든 그의 마지막 역작이었다.

    한에게 신체적 능력으로 비빌 수 없다면 본질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정혁은 자신이 대장장이였지만 대장장이의 모든 이점을 완전히 활용하면서 싸우진 않았었다.

    그에게 비약적인 힘을 부여 해주는 놀라운 에고 장비들과 그에 상응하는 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에고 장비가 주인을 찾아간 지금.

    정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가장 잘하는 것.

    그것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행동에 옮겼다.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오직 한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구.

    한에 대해 잘 아는 그였기 때문에 그의 공격 패턴이 자주 이어지는 부위마다 물리 및 마법 방어력을 상상 이상으로 끌어올려 놨다.

    그 덕에 이렇게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아니였다면 지난 엔듀라곤처럼 전신이 찢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은 오히려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방어구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정혁이 자신에게 파고드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느꼈지만 이 정도 수준의 경도를 가진 방어구는 그도 본적이 없다.

    한은 방어구 따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늘 가벼운 가죽옷을 즐겨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정혁이 입고 있는 투명 방어구들은 정혁의 움직임에 제약을 전혀 주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부분에서 한은 꽤나 그의 대장 기술에 흥미를 느꼈다.

    “너-! 실력 있구나!”

    정혁은 여유로운 한의 반응에 더욱 화가 나서 빠르게 그의 품 안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등으로 내리꽂히는 한의 팔꿈치를 허용해 주며 아래로 숙여졌다가 복부를 밀고 오는 한의 무릎 공격에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이전만큼 치명적인 데미지는 아니었다.

    “윽……!”

    정혁은 입 한가득 올라온 핏물을 거칠게 뱉으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다시 손에 제련 망치를 꺼내 쥐고 코앞으로 달려드는 한을 향해 번개와 화염을 쏟아 냈다.

    황금빛 마나에 반응하여 폭발적인 화기와 전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은 악몽의 비수를 빈틈에 던져 그곳으로 순간이동을 반복하며 모든 공격을 재빠르게 피해 내고 다시 정혁의 앞으로 나타났다.

    한 번의 달려듦으로 좁혀진 거리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각오한 부분이지만 이렇게나 틈이 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으윽-!”

    숨을 고르고 한의 공격을 피하려 할 때 미리 움직일 그의 방향을 알아챘는지 악몽의 비수 두 자루가 이미 정혁이 움직이는 위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혁의 양쪽 옆구리를 동시에 악몽의 비수가 뚫고 들어왔다.

    한은 정혁의 옆구리에 악몽의 비수를 꽂은 채로 그를 들었다가 강하게 내리쳤다.

    정혁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던 둘의 속도 때문에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교활하다.

    정혁은 자신이 만든 방어구의 아주 미세한 틈을 노려 악몽의 비수가 뚫고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HP가 노란색 주의 신호를 보냈다.

    막을 수 있는 일격은 없다.

    이제 다음 공격이 유효타로 들어오면 정혁은 그대로 GAME OVER 상태가 될 것이다.

    잠깐만.

    씩씩거리며 숨을 뱉던 정혁이 갑작스레 숨을 멈췄다.

    GAME OVER가 되면 안 되는 건가?

    황금빛 마나를 두르고 있던 정혁의 몸에서 마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목적이 없는 싸움을 멈추면 안 되는 건가?

    쥐고 있던 제련 망치의 전력과 화기가 거둬지고 그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진다.

    이렇게 끝이 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웅웅거리며 경고 신호를 보내던 젠트라의 빛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차피 그에게 죽든 세계가 끝이 나든 나의 데이터는 소멸하는 것 아닌가?

    정혁의 얼굴에 천천히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살기를 쟁쟁히 펼치던 한이 뭔가 달라진 분위기에 안색을 바꾸고 공중에서 정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곧 자신의 양손에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오자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체에 걸린 디버프는 없다.

    컨디션은 최상이고 녀석에게 유효한 공격을 맞은 부분도 없다.

    녀석이 걸어 놓은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게 도대체 어디서?

    한이 자주 사용하던 암살 이동기 이펙트와 비슷한 검은 안개가 이제 그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천천히 말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야, 정혁!”

    한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를 바라봤다.

    그곳엔 꽁무니 빠지게 달아나던 하늬안이 서 있었다.

    [거만한 놈.]

    한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괴한 기계음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기척은 없다.

    그가 느낄 수 없는 기척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한은 이 기계음이 어렴풋이 자기 앞에 형상화된 말 모양의 안개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이 손을 뻗어 안개를 흩어보려 했지만 안개는 그의 손을 스쳐 갈 뿐 형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안개가 점점 커져 말의 형상은 더욱 강건해졌다.

    말의 눈에서 붉은빛이 발산되더니 마치 한을 위협하듯 그의 앞에서 앞발을 들고 크게 울었다.

    기계음이 섞인 말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네놈의 공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말은 가만히 한을 노려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저쪽이 더 효율적이겠어. 아, 재밌기도 하겠지.]

    그 순간 말이 정혁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은 불쾌함을 느꼈다.

    이 싸움에 개입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한의 허락 없이 싸움에 난입하는 건 그의 플레이 역사에도 없던 일이다.

    이따위 굴욕적인 역사를 쓰게 만들 수는 없다.

    “무슨 짓거리를 어떤 새끼가 벌이는지 모르겠지만……!”

    한이 말이 달려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넋을 놓은 정혁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때 빛을 잃었던 젠트라가 작게 공명하더니 악몽의 비수가 한의 손에서 튕겨나가며 대신 젠트라가 쥐어졌다. 당황했지만 이미 진행 중인 공격이 막히지는 않았다.

    한의 손에 쥐어진 젠트라는 곧 정혁의 복부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갔다.

    곧바로 말 형상의 안개가 정혁의 몸을 뒤덮었다.

    복부에 박힌 젠트라가 정혁의 몸에서 빠져 떨어지고 정혁은 흩어진 말 형상의 안개에 집어삼켜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늬안이 급히 정혁에게 달려왔다.

    정혁의 공허한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한의 마무리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지만 정혁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안개에 집어 삼켜지는 정혁을 막아 보려고 그녀는 그를 안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안개와 동화되어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늬안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하……!”

    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진 젠트라를 바라보았다.

    “이게 왜……?”

    한이 다시 젠트라를 쥐자 한 역시 마치 정혁과 같이 젠트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마나에 의해 집어 삼켜졌다.하늬안은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리안이 부탁했던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도 못했다.

    애초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정혁을 빼앗겼다.

    그들에게…….

    정혁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왜 젠트라는 한을 데리고 간 것일까?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서 리안이든 안나든 제논의 지도부에게 전달해 줘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진 하늬안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때 마침 상공에서 강한 하강풍이 느껴졌다.

    하늬안은 단박에 그 바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에드가가 그녀에게로 내려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