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89화 (189/200)
  • ◈189화

    “너의 기억에, 우리 모두의 기억에 3년 동안 잊혀졌던 한은 어느새 이길 수도 있겠다, 그래, 이 정도라면 놈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따위의 착각을 만들어 낸 거야. 강하다고 믿는 거지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근데 아니더라. 나조차도 착각하고 있더라고. 그 순간조차도. 한에게 끝도 없이 밀어붙여지는 순간에도 내가 만약 모든 에고 장비를 전부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아니야. 하늬안, 아니야. 내가 모든 에고 장비를 가지고 있다 해도 나는 녀석을 이길 수 없어. 리안? 로만? 그 정도는 내가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놈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런데? 그러면 네가 이 여정에서 원하는 건 뭐야?”

    하늬안이 보다 차가워진 얼굴로 정혁에게 물었다.

    정혁이 대답을 이어 가지 못하자 그녀는 한숨을 한 번 쉬곤 말했다.

    “이길 수 없다며? 착각이라며? 그럼 차라리 나는 이곳에서 너의 어처구니없는 한풀이를 듣는 게 아니라 전쟁터에서 동료들과 같이 피 흘리며 적들과 다투겠어. 그 편이 더 가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데!”

    하늬안이 입술을 깨물곤 말을 이었다.

    “리안이 그러더라. 네가 멍청한 소리 할 때, 네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을 때, 돌체에게 앤이 있는 것처럼 너에겐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지금같이 이런 표정과 이런 말투로 땅만 바라보고 있을 때 내려간 고개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감시 같은 걸 붙이는 거라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리안이야말로 프로그램이라면 치를 떨 사람이니까. 근데 아니었어. 리안은 진심으로 너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 멍청아. 이길 수 없다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거 아냐? 일주일 동안 혼자 말없이 내린 결론이 이거야? 이거였어?”

    “아니, 그렇지 않아.”

    축 처졌던 정혁의 어깨가 펴졌다.

    “육체적으로 놈을 이길 순 없겠지만 안쪽에서부터 무너트린다면 승산이 없진 않아.”

    정혁은 포탈을 열어 의자 하나를 더 꺼냈다.

    하늬안은 정혁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는 이미 정혁과 하늬안 몫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정혁은 의자를 반대쪽에 가져다 놓은 뒤 다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뭐야?”

    “뭐긴, 엿듣지 말고 이리 오라는 뜻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에서 검은 안개가 일더니 누군가 의자에 앉은 채 등장했다.

    하늬안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그녀는 바로 몸을 틀어 대도를 바라보았다.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여도 몸을 일으켜 달려가기만 한다면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정혁이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다짐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두 동강이 나 있는 대도를 보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미리, 알고 있던 걸까?

    하늬안은 조심스럽게 정혁을 돌아보았다.

    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정혁의 마나와 그의 마나가 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 마나의 대립 속에 하늬안은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움직임 하나도 주의해야 한다.

    마나의 부딪침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동이, 미세한 움직임이 엄청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순간.

    그 찰나에 모든 싸움이 일어나고 마무리될 수도 있다.

    정혁은 이미 하늬안의 마음을 읽고 그녀의 무기를 망가트린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는 우리를 추적하고 있던 걸까?

    모르겠다.

    하늬안은 전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알다시피 저 녀석은 뭘 기다리는 놈은 아니니까.”

    정혁은 가만히 그를 주시하며 하늬안에게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남자는 마스크를 벗고 머리에 쓴 로브를 내렸다.

    그는 싱긋 웃으며 하늬안에게 손 인사를 했다.

    하늬안은 정말 오랜만에 그녀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과 마주했다.

    “여전히 꽥꽥대나?”

    이마에 핏줄이 서는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덤빌 순 없었다.

    이미 그녀는 압도된 상태였다.

    “그치, 잘 알지?”

    정혁이 이때다 싶어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저나 어이, 도대체 너는 정체가 뭐야?”

    “어이 말고 정혁이라고 불러 줄래?”

    “……음, 그것도 내 이름인데?”

    “뭐, 동명이인은 많잖아?”

    “아무리 한국인 플레이어가 많다고 해도 오아시스에서 나와 똑같은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는데 본래 이름까지 똑같은 놈을 만나긴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어렵긴 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이 새끼가.”

    순간 악몽의 비수가 정혁의 목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정혁 역시 젠트라를 꺼내 비수를 틀어막았다.

    정혁과 한은 다시 코앞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지 진짜, 너?”

    “글쎄? 답은 네가 찾아야 할걸?”

    “……하!”

    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정혁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물론 그 움직임을 하늬안은 눈으로 따라올 수 없었다.

    “일단 훌륭…… 하긴 해. 박수쳐 줄 정도는 아니다만 이 정도로 나의 전투 스타일을 카피하고 구현해 냈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노력을 다했다는 거니까. 이게 어? 쉽지 않은거야. 내가 막 눈으로 쫒아올 정도의 수준은 아니거든. 알지?”

    한이 하늬안을 보며 고개를 까닥했다.

    하늬안은 대답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입을 함구했다.

    한은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정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여유 있어 보이는 정혁의 태도가 불편했다.

    그 누구도, 이 세계의 어떤 자도 자신 앞에서는 결코 여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 하늬안이 보이는 태도처럼 마치 궁지에 몰린 쥐새끼마냥 죽은 척을 하거나 벌벌 떨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저 괴이한 녀석은 여전히 뻔뻔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왜지?

    무슨 배짱이지?

    이미 동굴에서 자신의 공격에 의해 넝마 조각이 다 되었던 놈이었다.

    그때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왜? 왜 그때 자신은 이 건방진 놈을 살려 보냈을까? 이유가 없는데?

    자기의 모든 공격 스타일을 카피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한 놈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작스레 다시 펼쳐진 세계와 지금의 자신이.

    그 사이에 어떤 기억의 공백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래, 궁금하지?”

    정혁이 미간을 문지르며 한을 쳐다보았다.

    한이 정혁을 노려보며 다리를 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였으면…… 이미 네놈 목은 땅바닥을 굴러다녔을 건데…….”

    “그런데?”

    “……기분이 점점 엿 같아 지고 있으니까 적당히 달구고 피차 할 말 먼저 하자고.”

    예상외의 반응.

    한은 지금 자신의 분노를 참아 내고 있었다.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는 놈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늬안은 돌아가고 있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참고 있는 것 말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없었다.

    “도대체 네놈이 뭐냐니까?”

    “……뭘 것 같은데?”

    “야. 나를 카피했으면 알 거 아냐? 나 지금도 엄청 잘 참고 있는 거야.”

    “알지. 근데 기억하지? 나 그날 동굴에서도 네놈이 궁금해 미치겠는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어때? 또 내 팔을 긋고 근육을 찢어 놓을래? 그런다고 네 궁금증이 해소될 것 같아?”

    한이 이를 갈았다.

    하늬안은 그 소리에 소름이 돋아 작게 몸서리를 쳤지만 정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혁의 예상대로 한은 지금 이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어 안달이다.

    자기의 평소 신념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모든 분위기가 이질적일 것이다.

    세계의 제일 높은 곳에서 모든 플레이어가 게임을 더욱 치열하게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던 그였다.

    권력이니 정치니 이딴 저열한 머리싸움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힘으로 부딪칠 수 있는 세계, 게임이 본질을 잊지 않도록 자신이 본이 되고 자신이 완전한 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그가 만들어 놨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자기 자신조차 자꾸만 이상한 개입에 시달리고 있다.

    갑자기 땅끝 언저리에서 기어 다니던 제논이 타이런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왔다.

    자신이 그 사실을 놓쳤을 리 없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말이다.

    놈은,

    이 정혁이라는 녀석은 분명 무엇인가 알고 있다.

    “나에게 물어보기 전에 네가 내린 답을 먼저 듣고 싶은데?”

    정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에게 물었다.

    한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정혁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 신이라는 놈과 한바탕 붙었어. 내 위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이 싫었고 신이라는 괴생명체가 오아시스를 통제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으니까. 어차피 내가 이길 거라는 걸 알고 덤볐어. 내가 이기지 못할 놈은 없거든. 끝까지 가는 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근데?”

    “신이란 놈은 나를 초대해 놓고 태평스러웠지. 나는 뭐, 그놈이 뭘 준비하든 상관없었고 웃고 떠들 생각도 없었으니 그냥 들이받았지. 근데…….”

    정혁이 궁금했던 부분은 바로 이곳이었다.

    이 포인트.

    정혁의 머릿속에서도 없는 공백.

    신과 한이 만나서 한이 신에게 공격을 가했을 때.

    그 이후.

    정혁은 모르는 무엇이 있을까?

    “놈은 내 공격을 완전히 받아 내며 내 몸속에서 뭔가를 분리해 냈어. 그 기분이 굉장히…….”

    한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읽혀졌다.

    그는 그날을 잠깐 회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인상이 짙게 구겨지더니 다시 펴지면서 모르겠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몰라, 하여튼 그 이후에 눈을 떠보니 이만큼의 시간이 지났지.”

    “분리해 내고 끝이었다고?”

    “그래, 그래서…… 아.”

    한이 정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정혁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네놈도 신을 만난 거지?”

    정혁은 그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도 신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정혁에게 이 모든 힘과 가능성을 선물해 준 자가 신이라면 만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혁의 기억엔 그와 만난 장면이 없기에 대답이 애매했다.

    “대답해 봐. 그치? 그 녀석이 나에게 분리해 낸 모든 것이 네놈에게 간 거야. 어째서지? 왜지? 아……!”

    한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네놈을 죽이면? 그럼 내 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겠는걸?”

    “뭐?”

    정혁이 양손에 힘을 주었다.

    본능이었다.

    한의 살기가 점점 폭발하고 있었다.

    “그래! 이 이상한 마음이 네놈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을 통해 채워질 것이 분명해! 맞네! 하 참, 내가 별 병신 같은 생각을……!”

    순간 하늬안은 자신을 밀친 정혁의 돌발 행동에 의해 저 멀리로 내동댕이 쳐졌다.

    방금까지 하늬안이 앉아 있던 자리에 한의 악몽의 비수가 수십 차례 난도를 펼치고 사라졌다.

    검은 안개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한이 정혁을 가리키며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내 전투 스타일을 너무 잘 안다니까? 나는 맛없어 보이는 사냥감에도 늘 최선을 다해. 알지? 지키는 싸움이 얼마나 불편한지. 이제 진짜로 간다?”

    다시 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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