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앤”
앤은 이전과 사뭇 다른 돌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돌체의 전신을 감싸고 돌고 있던 그의 마나 흐름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천계로부터 전달받는 그의 마나 줄기 역시 뭐랄까, 오염되듯이 밝은 기운이 탁해져 가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하아-”
돌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앤은 돌아왔지만 사뭇 달라진 돌체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다.
이전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대천사장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강단과 고집은 가끔 고개를 들어 앤의 꼭지를 돌게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돌체에겐 하나의 특징이 있었는데 그건 아까와 같은 깊은 한숨이다.
이 한숨 이후에는 대천사장의 자아가 등장할 차례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오히려 대천사장인 돌체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정상적이지 않은 마나 흐름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선을…… 세게 넘은 녀석이 나타났어.”
“선을 넘어?”
“일전에 에트론에게 이야기했던 녀석이긴 한데, 타락 천사가 중간계에서 혼자 날뛰어 봐야 얼마나 되겠나 싶었거든. 근데, 이거 웃기네.”
“혼자만 아는 이야기 하지 말고, 뭐 어떻게 된 일인데?”
“그 녀석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너와 비슷하다면……? 그게 가능해?”
“당연히 불가능하지. 타락한 천사는 천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지옥인 마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어느 등급의 천사였든 상관없이 날개도 두 개밖에 유지하지 못하고 그것도 천사의 찬란한 날개가 아니라 악마의 날개로 탈피하고 말지. 근데 녀석은…… 날개가 여덟 개. 나와 동등해.”
“대천사장 말고는 8개의 날개를 가지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전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앤.”
“하지만 우리는 임무가……!”
“아니야, 앤. 저들은 그 미치광이를 막지 못할 거야. 내가 아니면.”
“하……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곧 정혁과 하늬안이”
돌체가 앤의 말을 막으며 결심한 듯 말했다.
“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도 벌어진 일이고. 마치, 누군가가 나를 저 전장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아. 나의 힘에 필적한 적수를 만들어서까지 말이야. 우리가 그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 조용히 따라나섰지만 어쩌면 운명이.”
돌체가 수풀 사이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했다.
“운명이 우리의 개입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니 가자.”
돌체가 자신의 찬란한 여덟 깃의 날개의 펼쳐 보였다.
그 순간 밝은 천계의 빛이 뿌려서 앤이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돌체는 평범한 복장이 아니라 대천사장으로서의 완전한 전투 갑옷을 갖추고 있었다.
“가서 나의 적수가 애꿎은 생명을 빼앗는 것을 막자. 그래야만 해.”
“……하지만…….”
앤이 돌체가 바라봤던 수풀 끝에 시선을 두었다.
리안이 앤에게 찾아와 부탁했던 것.
현재 리안만큼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중간계의 존재는 돌체다.
자존심 강한 대천사장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앤밖에 없기 때문에 리안은 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만약에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리안은 정혁 일행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앤의 판단하에 꼭 그들을 도와달라고 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앤 역시 한을 잡기 위해 용의 가호를 받았고 리안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였다.
그녀의 마음 한편엔 한에게 당했던 과거의 기억과 증오가 여전히 날카롭게 서려있다.
그러나 그만큼 놈의 강함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두려웠다.
마법사인 자신이 놈의 두 눈을 보는 순간은 결국 목이 떨어지는 찰나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살기와 살인마의 체취는 전신을 얼어붙게 만든다.
아무리 돌체가 있다 해도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앤. 그런 그를 지금 정혁이 잡으러 가는 거예요. 혼자서.”
리안의 말에 앤은 멍해진 얼굴로 그를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일, 각자의 역할로 모두가 흩어져 전선으로 달려간다.
말단의 병사부터 제논의 지도부, 가장 강하다고 하는 자들까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 그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지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투기와 열정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러나 정혁은 소름 끼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이력을 가진 적과
세계의 그 누구도 오랜 시간 단 한 번도 굴복시키지 못한 적과
죽음조차 쉽게 맞이하지 못하게 한다는 적과
단신으로 싸우러 나간 것이다.
앤이 기억하는 그 살육 미치광이와 싸우러 나간 것이다.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압니다.”
리안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돌체가 강하다 해도, 리안이 강하다 해도 한 과의 싸움은 규칙이 없기로 유명하다. 완전히 그의 마음대로 흐름을 빼앗기고 돌입하는 전투에 틈을 만드려고 발버둥 쳐봤자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싸움은 결코 정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정혁이 강하다 해도 한 만큼은 아닐 테니까요. 변수를 캐치해 줘요. 그리고 만약 돌체의 힘이 그 변수와 맞물려 작은 파도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리안의 얼굴에 간절함이 스쳐간다.
“살아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리는 돌체라는 큰 전력을 당신의 손에 맡기는 겁니다. 한순간을 위해서 말이에요.”
“……노력……해 볼께요.”
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앤과 돌체는 조용히 정혁과 하늬안을 뒤따랐다.
일주일 정도 되는 시간이었지만 정처 없는 그들의 여정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돌체는 계속해서 이 여정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있는 사람처럼 불편함을 지속적으로 토로했다.
“이건 아니야, 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결국 뜻이 있었을까.
앤은 돌체를 바라보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지팡이를 꺼내 이동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나가 주변에서 모여들었다가 폭발하듯 작은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곧 빛무리와 함께 숲속에서 사라졌다.
“쳇, 아쉽게 됐네.”
그들이 사라진 곳에서 나무 그림자를 가르며 한 형체가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 로브와 A라고 새겨진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
그는 로브를 벗고 마스크를 집어던졌다.
그리곤 또 다른 기척을 찾아 숲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리춤에 찬 단도 끝이 반짝인다.
이내 그는 또 한 번 모습을 감췄다.
* * *
“지친다, 이제.”
하늬안이 말고삐를 나무 그루터기에 묶으며 한탄했다.
정혁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한 뒤 대장간 포탈을 열어 익숙하다는 듯이 집기류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일주일째야, 정처 없이 떠돈 지도.”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그놈을 찾아 떠났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제논은 지금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데 지도자랑 팀장이 여기서 이렇게 여유롭게 노닥거리고 있는 게!”
하늬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정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꺼낸 화목 난로에 /잔가지를(잔 나무들을)/ 밀어 넣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야. 여유를 좀 가져.”
뻔뻔한 정혁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민 하늬안이 말 옆에 걸어 둔 자신의 대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야!”
“아후, 진짜.”
정혁이 몸을 일으켜 어느새 손에 쥔 제련 망치로 그녀의 대검을 한 번 깡 하고 내리쳤다.
하늬안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하늬안의 대검이 우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곤 번쩍 빛을 내더니 두동강이 나 버렸다.
그녀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에에?!”
정혁은 제련 망치를 한번 털어내곤 손에서 없애 버렸다.
포탈에서 의자를 꺼내 하늬안의 앞에 가져다 두고는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하늬안이 얼떨결에 의자에 앉자 정혁이 주전자에 물을 담고 난로 위에 올렸다.
“너, 너 저, 저런 것도 가능해?”
“잊었나 본데 나 대장장이거든?”
“아니, 아니 아니 대장장이는 고치는 사람이잖아?”
“고치는 것보다 망가트리는 게 더 쉬워, 원래.”
“……고, 고쳐 줄 거지?”
“성질 안 낼 거면 고쳐 줄게.”
하늬안이 한숨을 깊게 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스터, 이야기 좀 해 줘.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좀 알려 달라고. 물론 나도 알아. 놈이 우릴 찾아올 거니까 최대한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서 놈과 한판 하려는 거 아냐.”
“그렇지.”
“근데 벌써 일주일이야, 안 그래? 제논에서 어떻게 됐다 연락조차 없어. 무슨 일이 생겼거나,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야-!”
하늬안이 소리치자 정혁이 손가락으로 대검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가 이빨을 꽉 깨물며 인상을 구겼다.
“알았어, 진정할 테니까. 나 일주일 동안 정말 아무 말 없이 네 뒤통수만 보며 따라왔잖아. 내 성격 알지? 이 정도면 진짜 잘 참은 거거든? 그러니까 이제 좀 말 좀 해 봐라 좀!”
주전자가 열을 받아 수증기를 뿜으며 소리를 냈다.
정혁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에 주전자의 물을 담아 내곤 가만히 잔 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 같아?”
“……응?”
“우리가 이길까, 안도리니가 이길까?”
“당연히…… 우리가 이기겠지!”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검은 말 조직이 강하고, 안도리니에서 변수를 여러 가지 가져왔다고 해도. 우리는 역대 최강의 마법사가 있고 무투가가 있고 처음 들어보는 타인의 마나를 갈취하는 강탈자도 있어. 뛰어난 지략가가 전술을 펼치고 거기에 대천사장까지 우리 뒤를 봐주고 있지. 현존하는 랭커들도 대부분 우리 쪽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어. 그치?”
“근데?”
“그 전쟁은 우리가 반드시 이기고 말 거야. 희생……이 따르겠지만. 자, 그럼 하늬안. 그 전쟁 말고 지금 우리의 싸움은 어떨까?”
“……한……과의 싸움?”
“그래, 한, 그놈과의 마지막 싸움.”
하늬안이 대답하지 못하자 정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지. 마지막일지 모를 싸움. 우리는 절대,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어. 내가 너무나 잘 알지. 그날, 엔듀라곤의 화산 심장부 동굴 안에서 한이라는 놈과 처음으로 얼굴을 맞댔을 때 업데이트가 되었다고나 할까? 놈은 진짜다. 내 기억 속에 저장되고 내 몸이 반응하는 한은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과거의 데이터였고 직접 만난 한은 감히 그 데이터로 저장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예측 불가능한 강함을 가진 남자였어.”
“……알지.”
“아니라니까, 하늬안. 아니야. 기억은 말이야. 모든 것을 아름답게도 하고 작게도 해. 왜인지 알아? 기억은 굉장히 주관적인 거거든.”
하늬안은 가만히 정혁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