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결정을 내립시다.”
리안이 굳은 얼굴로 모두를 쳐다보았다.
“어떻게요?”
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리안을 노려보다가 꼬았던 다리를 펴고 곧게 앉았다.
그녀 역시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곤 말했다.
“좋은 이야기예요. 당신들이 하는 말들 전부. 우리라고 당신들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최소한의 손해로 최대한 많은 자를 구해 내자. 말이야 좋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째! 무려 일주일째! 전선은 고착화되고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기까지 바닥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지금! 당신들의 의견을 결부시키지 못해 오히려 당신들이 원하는 결과는 멀어지고 말았어요. 아닌가요?”
“하지만 린! 우리도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더 신중한 거라구요!”
안나가 버럭 소리를 쳤다. 린의 도끼눈이 그대로 안나를 따라갔다.
“신중할 시간이 없다고 떠든 것도 당신들이에요! 알죠?!”
“린…… 그만하게.”
로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린은 뒤를 흘깃 보며 로만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테이블을 세 번 강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이해하려고 며칠을 노력했습니다. 당신들의 주장을 말이에요. 그리고 예! 이해도 했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압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이 지금은 너무나 과해요! 어차피 키는 정혁, 그 남자에게 달려 있다면서요? 그럼 우리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치고 깨지면서 정혁이 가져올 승리의 열쇠를 꽂을 구멍이라도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알겠습니다…….”
“알긴요! 또 여기서 흐지부지될 거라면 저는 오늘 에도라의 병력들을 이끌고 저 빌어처먹을 수도 북서부를 밀고 들어가겠습니다!”
린은 거침이 없었다.
“기억해요! 난 애초에 대륙의 통일 따위 관심도 없었어! 당신들이 알려 준 그 사실을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한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오히려 그쪽에 붙고 싶었어! 당신들도 알잖아! 우리가 누굴 더 증오하는지! 그러나 그 욕심, 그 마음 다 접고 나는 이곳에서 분전하고 있는 거야! 이런 탁상공론이 아니라, 저 역겨운 전장에서 더러운 피를 맞으며 ‘한’에게 풀지 못한 내 한을 풀려고 하는 거라고! 더 큰 대의를 위해!”
리안이 손가락으로 린을 가리키자 그의 손에서 나아간 마나 줄기가 린에게 닿았다.
분기탱천했던 그녀가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린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도에 의해 분이 삭혀지는 것 역시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충분히 알겠습니다.”
리안은 에이드윈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그들은 리안의 눈을 통해서 충분히 그가 생각하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마지노선.
그들도 알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의미가 없다.
리안은 그저 기다리고 싶었다. 정혁 쪽에서의 소식이나 안도리니 내부에서의 소식이 닿기를 말이다. 물리적인 충돌 없이 내부에서 안도리니가 무너지든, 또는 정혁이 ‘한’과의 싸움에서 어떤 성과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신호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전쟁을 통한 희생으로 다음의 길을 만드는 수밖에.
억울했다. 리안이야말로 오아시스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아닌가.
로만도, 유르겐도 큰 축을 담당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다.
정혁이 만들어 준 그들만의 무기를 통해서 더욱 강해졌다.
쓰러져 갈 이들을 대신해서 그들이 활로를 뚫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아시스와의 마지막 줄다리기 중이다.
당당히 모든 힘을 폭발시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어쨌든 최종적인 리셋의 결정권은 녀석이 가지고 있다.
수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기억조차 못하는 때에 그들은 없어지고 새로운 고통의 주기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과 함께 펼쳐질 것이다.
그럴 순 없다.
그렇게 다시 둘 순 없다.
최초의 ‘A’, 그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기에 그는 정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프로그램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힘은 프로그램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대장장이라는 도통 전투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부여하고 ‘한’의 기억을 심어 /상상을 (삽입)/초월하는 강함을 선사했지만 본질만큼은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선한 자.
리안은 전적으로 ‘A’의 선택을 신뢰했다.
그가 선택한 자가 ‘정혁’이라면 그가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해도 정혁은 정혁 나름의 성과를 낼 것이며 이는 ‘A’의 그림대로 흘러가고야 말 것이다.
믿음으로 움직인다.
리안은 굳게 다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희생이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최대한 기다려 보려 했지만 어디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기에 우리가 만듭시다. 승리의 길을.”
리안의 말에 에이드윈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전투에 참여하겠지만 저는 여전히 강한 힘으로 여러분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이는 여기 있는 에이드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안도리니의 심장을 탈환해 봅시다.”
“에도라 때만큼만 해 줘도 충분해.”
어느새 린이 다시 기세를 되찾고 팔짱을 낀 채 서서 말했다.
로만의 곁에 서 있던 라테가 옅은 불길을 조금씩 더 강하게 불태웠고 전보다 늠름해진 에트론이 여섯 개의 날개를 펄럭이며 앉아 있던 유르겐을 일으켜 세웠다.
회의장이 파하고 안도리니의 수도를 둘러싸고 있던 전선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무기와 장비를 손보는 소리가 울렸고 횃불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중장갑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죽은 듯 조용한 안도리니의 수도와는 상반되는 분위기 속에서 해는 밝게 떠오르기 시작했고 전열은 순식간에 원형으로 안도리니를 압박하며 갖춰지기 시작했다.
모든 병력들이 원형으로 도열했을 때 사방에서 터져 오르는 총성과 함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총력전.
여러 종족들과 국가가 연합된 거대한 원형 물결이 각자의 속도대로 빠르게 안도리니의 수도성을 향해 달려든다.
안도리니의 굳은 성문이 일제히 열리며 그 안에서도 안도리니의 방어 병력들이 쏟아진다.
높은 성벽 위로 그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무기들이 살벌한 공격을 퍼붓는다.
조용하고 적막하던 전장은 함성과 욕지거리의 난장판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등장했다.
안도리니의 수도 상공에 먹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먹구름 속에서 번개가 몰아치더니 번개는 곧 허공에서 말 모양으로 변했고 번개 형상의 말들은 안도리니 상공에서 쇄도하듯 수도 내부로 돌진했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난전 속에서도 모두의 동작이 일제히 정지했다.
안도리니의 성문이 다시 열리고 그곳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대부분은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소수의 몇몇이 하얀 마스크였다.
즉각 로만과 유르겐이 그들을 쫓아 흩어졌다.
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황은 아직 연합 병력에게 유리했지만 그들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눈치 빠른 몇몇 플레이어들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쟁은 역시 분위기다.
기세를 이어 이번 싸움으로 도성 내부까지 진출하려면 저들의 역공을 효과적으로 막아야 한다.
유르겐이 먼저 그들과 마주했다.
작은 마법구 형태로 유르겐의 곁에 있던 에트론 역시 긴장한 얼굴로 원래의 형태를 찾아 돌아왔다.
하얀 마스크를 쓴 두 명이 유르겐의 앞에 섰다. 각각 D와 H가 새겨져 있었다.
“둘은 상대 안 해 봤는데…….”
유르겐도 이들과 싸웠던 기억이 있다.
이기기도 했었다.
다만 지금은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은 완전한 세기의 말.
게다가 오아시스는 전력을 다해 데이터를 지키며 마무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이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제약 역시 완전히 개방된 것이나 다름없다.
리안도 얼마 전 이들과의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했었다.
물론 절대적 다수 대 혼자의 싸움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시대의 가장 강한 마법사인 리안조차 그랬다면 유르겐이라고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잠깐, 잠깐만요?”
그때 곁에 서 있던 에트론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앞에 서 있는 H 마스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죠? 왜 당신에게서 하드린의 악취가 나는 겁니까?”
에트론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H 마스크의 남자는 천천히 마스크와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정확히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악마의 날개 여덟 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에트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유르겐 역시 당황했다.
이제까지 저들의 집단에 다른 종족이 포함된 적은 없었다.
아무리 타락한 천사가 특수하다고 해도 오아시스는 자기가 결정한 정화의 단계에 활용되는 자원들은 철저히 믿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설정했었다.
즉, 증명 절차를 거친 프로그램만이 오아시스가 가진 힘의 일부를 부여받을 수 있단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타락 천사가 저 조직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게다가 날개가 여덟 개라니?
그럴 리가 없다.
역사적으로 없다.
그렇다면 오아시스는……!
유르겐이 뭔가 떠올라 에트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 에트론? 느그 대빵 어디 갔어?”
“……예?”
“야! 야! 정신 안 차려!?”
“도, 돌체 님이요?”
“그래, 인마! 너 본 적 있어? 타락한 천사가 대천사장에 준하는 여덟 개의 날개를 가진 걸 말이야!”
“어, 없죠. 아니, 아니죠. 역사적으로도 타락 천사가 악마 날개를 세 개 이상 가졌다는 것 역시 없었어요!”
“그니까 인마! 그래서 지금 어?”
그때 하드린이 에트론의 목을 낚아채 비상하기 시작했다.
유르겐은 날아가는 에트론을 향해 소리쳤다.
“엿 된 상황이라고-!!!”
에트론은 숨 막히는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가 날개로 하드린의 등을 내려치며 그의 손길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곧 열쇠 다발을 유르겐을 향해 던졌다.
지금 에트론의 권한은 열쇠지기 이상이기에 문을 여는 능력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유르겐은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고 주변에 몇 개를 꽂아 넣었다.
빛나는 문이 열리고 무기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D 마스크의 남자는 공중을 올려다보곤 어깨를 풀며 마스크와 로브를 벗었다.
유르겐은 자신의 손에 가장 잘 맞았던 양날검 두 자루를 손에 쥐고 심호흡을 고르게 했다.
장난이야 만만한 상대에게 치는 거고 지금은 다르다.
녀석의 마나를 최대한 강탈하면서 말려 죽이듯 밀어붙여야만 한다.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싸움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