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86화 (186/200)
  • ◈186화

    에도라에 꽤 많은 병력들이 응집했다.

    해방의 기쁨은 린의 독려와 어우러져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확장되었다.

    에도라는 오랜 시간 안도리니의 징글징글한 칭얼거림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욘마곤은 뒷전이었고 매번 영토 분쟁은 안도리니 쪽에서 일으켰다.

    에도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호의적으로 그들을 대했다.

    선을 넘어도 이해해 주는 편이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고삐는 풀렸고 악질적인 왕도 물러났다.

    제논의 물결은 또 다른 정의를 요구했고 이는 대륙의 통일이라는 비전을 심어 주었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랭킹 1위 린이 이제 에도라의 영웅으로 우뚝 서자 자연스럽게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논의 강력한 플레이어들에 대한 소문 역시 이번 전쟁으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에이드윈들의 엄청난 힘과 그들의 에고 장비.

    랭킹 3위인 대마법사 앤이 제논의 소속이 되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던 대천사장 돌체의 등장.

    게다가 이를 모두를 휘하에 둔 제논의 지도자 정혁.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 역시 이제 당당히 황금빛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그의 등장으로 전설이 아니게 됐다.

    에도라의 입장에서는 가슴 뛰는 마지막 전쟁.

    역사의 한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이 두근거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을 플레이어가 있을까?

    에도라 전체는 뜨거운 용광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초조한 것은 제논 쪽이었다.

    부디 김창수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접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는 제논 전체의 사기와 직결된 부분이었다.

    물론 정혁이 건재하기 때문에 전쟁의 승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김창수는 제논에 있어서 상징 그 이상의 존재다.

    만약 그의 머리가 안도리니의 수도 입구에 걸려 있기라도 한다면 제논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낙심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만 한다.

    “조급해하지 마.”

    정혁에게 안나가 해 준 말이었다.

    “마지막이야. 기억해, 마지막이라고.”

    그녀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처음 김창수가 안도리니의 포로가 되었다고 전달했을 때와 비교해 봐도 이미 상당히 마음을 추스른 것 같았다.

    이 싸움의 시작에서 이미 많은 것을 결심했다고는 하지만 안나는 사실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논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소속되어 직접적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여러 전략과 전술을 활용해 동료들의 생사를 보장해야 하는 지략가의 위치에 있지만 늘 자신의 판단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그녀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자신의 판단을 지지해 주었던 김창수의 공백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본질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녀는 에이드윈이다.

    이곳, 그 너머의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만약, 정말 만약 김창수를 잃더라도 더욱 빠르게 오아시스를 전복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녀답게 빠르게 깨달은 것 같았다.

    “리안 님께서 네게 말씀하셨겠지만 이번 전쟁은 너를 완전히 배제할거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안나는 정혁에게 조용히 자기의 의견을 전달했다.

    제논의 지도자와 제논의 책사.

    이런 딱딱한 관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아니었다.

    “너는…… 너 나름의 싸움을 해야 할 테고, 그것이 아마 우리가 벌이는 싸움보다 몇 배는 더 값지겠지.”

    “몇 배는 더 위험할 테고.”

    정혁의 대답에 안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되는 게 있어.”

    “……뭔데?”

    “우리가 전부 해방되고 오아시스가 무너지면 너는…… 괜찮아?”

    멀리서 전장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안나는 아크가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정혁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고 안나가 이 전투 속에서 염려하던 단 하나의 거대한 변수가 있었다.

    그건 바로 정혁이었다.

    에이드윈을 지원해 주던 “A”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을 인간이 아니라 프로그램에게 맡겼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만의 이유가 말이다.

    그렇기에 정혁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곤 하지만 찝찝함이 가신 건 아니었다.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소멸되던 E의 생에 대한 열망과 존재에 대한 허무를 말이다.

    유쾌하게 삶을 끝냈지만 프로그램이던 녀석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현실을 쓸쓸하게 비관했다.

    자기가 누군지를 최초부터 알고 있던 녀석조차 마지막 순간을 고통스럽게 보냈는데 자신이 인간인 줄 알았던 프로그램 ‘정혁’은 그 순간에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그녀는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이다.

    “사실 잘 모르겠어.”

    정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딪쳐 봐야겠지?”

    곧이어 나온 말이 안나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정혁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되겠지, 너희는 인간이니까. 이해해. 지난 싸움에서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때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에겐 나를 한 대 때려 줄 동료들이 있고, 그들을 지키고 이끌며 나아왔던 시간이 있어. 오히려 지금의 나는 본질적으로 더 대장장이답고, 더 제논의 지도자답다고 생각해. 이걸 잊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정혁이 안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기도나 해 줘, 그 빌어먹을 자식을 이길 수 있게.”

    “……이겨?”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안나가 옅게 웃으면서 정혁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장난기가 섞인 그녀의 웃음에 먹먹해졌던 정혁의 마음이 풀어졌다.

    “왜? 못 이길 것 같아?”

    “내가 아무리 계산해 봐도 너는 안 되던데?”

    “……참. 하-!”

    정혁이 피식 웃으면서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면서 안나는 당당히 걸어가는 정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다른 이들의 믿음을 먹고 또 그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문이 굳게 닫히고 안나는 이제 다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정혁은 전초기지 바깥에서 준비하고 있던 하늬안을 만났다.

    큰 부상이 있었지만 여러 회복 마법으로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한 그녀는 두 대도를 말의 양 측면에 단단히 매어 두었다.

    하늬안은 정혁의 말까지 준비를 해 둔 상태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이 정혁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해야 했기 때문에 에드가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혁이 보이자 하늬안은 입술을 쭉 내밀곤 불편함을 표했다.

    “어째 옛날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별로야?”

    정혁의 말에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여러모로? 게다가 우리 위대하신 마스터님 실력도 자꾸 회귀하시잖아요?”

    “에헤이, 그래도 내가 더 세거든요, 그쪽보다?”

    “어떻게 한번 해봐?”

    하늬안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말하자 정혁이 피식 웃었다.

    그는 말 위에 올랐고 하늬안도 그를 따라 올랐다.

    저 멀리 출발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렸다.

    뿔피리의 소리는 곧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고 이제 제논과 욘마곤 그리고 에도라의 모든 전력은 일제히 안도리니 전선으로 밀고 나갈 것이다.

    함락은 순식간일 것이다.

    이미 안도리니는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해서 전력 손실이 꽤 난 상태다.

    그들은 조직력은 뛰어나나 개개인의 능력은 조직력에 비해 부족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현실에서의 여러 무기들을 오아시스에서 제작해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활용했던 마나 미사일도 이미 동났고 탱크나 공중전용 장비들도 꽤 많이 손실됐다.

    이제 전면전에서는 개인 대 개인으로 부딪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했다.

    그럼에도 제논의 수뇌부가 이 전쟁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지막이기에 제약이 완전히 풀려 버린 검은 말 조직원들의 공격과 오아시스가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변수들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저들에게 맡겨. 전쟁도, 김창수 사령관님의 안위도.”

    출발하지 못하고 서 있는 정혁에게 하늬안이 다가가 말했다.

    정혁은 결의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그래, 해보자. 우리도.”

    “응.”

    정혁이 짧게 대답을 마치고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혁은 전쟁의 포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곽을 순회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그는 분명 ‘그’가 자신을 찾아내리라 확신했다.

    리안의 확신이었고 안나 역시 믿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흩어져 안도리니의 중심부로 밀고 나가는 제논의 병력들은 예상했던 대로 어렵지 않게 안도리니의 수도 근처까지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철옹성 같은 수도성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염려했던 부딪침이 없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제논의 수뇌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안도리니는 마치 힘을 아끼려고 움츠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기에 리안이 이끄는 전 병력은 수도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으로 전 병력들을 산개해 압박했다.

    제논과 욘마곤, 에도라에 엘프 군대까지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고 안도리니의 동선을 확실하게 틀어막았다.

    대치가 시작됐다.

    묘한 긴장감이 전장을 가득 메우고 누구 하나 먼저 공격하는 쪽 없이 상황을 주시했다.

    안도리니는 마치 제논의 촉박한 심정을 역으로 이용하려 드는 것 같았다.

    리안도, 안나도 알고 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무턱대고 덤벼들 수도 없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제논의 수뇌부와 린, 그리고 욘마곤의 정령왕과 아린은 며칠을 함께 회의하며 확실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논쟁은 계속됐다.

    에이드윈과 제논의 입장에서는 플레이어들의 목숨이 중요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전쟁의 본질을 보다 중요시했다.

    일단 시작한 이 전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라는게 그들의 동일한 의견이었다.

    이 의견엔 린 역시 찬성했다.

    지키려고 하는 싸움이 더 어렵다고 그녀는 적극 어필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빠르게 이 전쟁부터 마무리하고 그 이후의 일들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이다.

    안나는 린이 이해가 됐다.

    지난 에도라의 전쟁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에도라 소속 플레이어들이 사망했다.

    세계 이면을 알고 있는 린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죽음 이후에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어서 이 세계를 정리하고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빨리 마무리하고 에도라에서 안도리니로 순식간에 전황을 옮겨 간 것처럼 무엇이 됐든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그것에 대항하여 연속적으로 전투를 이어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이 토의 속에서 리안이 탁자를 치고 일어선 건 일주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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