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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85화 (185/200)
  • ◈185화

    코를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에 정신을 차린 김창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불규칙하게 구멍이 난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줄기가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아마도, 안도리니 어딘가에 마련된 고문실 중 한 곳일 것이다.

    마스터는 에도라를 빠르게 수복시키고 싶어 했다.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김창수 역시 믿었다.

    안도리니에 드리운 어둠은 꽤 오래되었다.

    그들의 수장인 제이크의 괴랄한 정치 방법은 안도리니에 상주하고 있는 여러 플레이어들의 정신까지 물들여버렸다.

    그들이 자랑하는 특임대의 전술은 대륙 내에서도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살인귀들이나 다름없는 자들이 신봉해 마지않는 제이크.

    그의 뒤가 구리다는 것 또한 많은 자들이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안도리니를 무너트리려거든 두 세력의 완전한 연합이 필요했다.

    삼파전의 양상 속에서 제논이 빠르게 승기를 낚아채야 그 기세를 이어 안도리니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도 김창수의 마음에 조바심을 더했다.

    에도라에 전쟁이 전면전에 들어갔을 때 이미 안도리니 쪽 전선에서도 사방에서 전면전에 가까운 전투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지만 김창수는 제논에 어떠한 연락도 남기지 않았다.

    본대가 양쪽을 동시에 신경 쓸 만큼 여력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전면의 안도리니 병력들과 후미에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이어 가는 게릴라 작전 때문에 김창수의 방어 전선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사력을 다해 방어전을 이어 갔지만 김창수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미래였다.

    김창수는 그렇게 안도리니 병력들에 의해 수뇌부로 붙잡혀 갔다.

    어딘지도 제대로 감이 오지 않는 곳에서 김창수는 다양한 고문을 받아 냈다.

    고문하고 치유하고, 고문하고 치유하고를 반복하며 간악한 자들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들은 다양했다.

    현재 정혁의 전투력, 제논이 품고 있는 수상한 자들.

    제논의 전술 메커니즘, 에도라에서의 전황 등.

    그러나 김창수는 꿋꿋하게 버텨 냈다.

    그의 우직함은 이런 고난 속에서도 빛났다.

    “어이, 아저씨.”

    “……아-”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있던 김창수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김창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작게 대답했다.

    마치 그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했다.

    “오, 기억해?”

    목소리는 김창수의 반응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김창수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그는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쿨럭, 아, 알고말고.”

    “대단해, 아주 그냥, 그 징글징글한 성격은 알아줘야 되는데.”

    “……미친놈, 네놈이 인정할 정도면 돼, 됐지. 하하-”

    김창수가 이젠 아주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치 아주 반가운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았다.

    고통 속에서도 입가에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로브를 입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

    허리춤에 차고 있는, 김창수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무기.

    얼굴은 기묘한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와 단 한 번이라도 겨뤄 봤다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이 짙은 살기의 냄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나니 묘한 그리움의 감정이 인다.

    마스터, 정혁에게는 느낄 수 없는 끔찍한 기운이지만 김창수는 이 기운에 묻혀 그와 한참을 방황했다.

    일방적인 관계였다곤 하지만 수도 없이 그의 공격을 받아 내며 오아시스에서의 자신을 날카롭게 갈아 왔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제논도, 그의 친우였던 제논의 전 국왕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애증.

    그것이었을까.

    김창수가 그에게 느끼는 것은 애증보다도 깊은 감정이었다.

    “좀 보기 좋긴 해.”

    “여전하군-”

    김창수가 쿨럭거리면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남자는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볼에 선명히 검은 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김창수의 앞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곤 볼을 톡톡 건들며 말했다.

    “이거 보여?”

    김창수는 대답 없이 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혼란?

    그것일까?

    이제까지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없었던 어떤 것이 보인다.

    “어때, 새로 했어. 괜찮지?”

    “웃긴 농담이군.”

    김창수의 대답에 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놈은 몸에 그림 그리는 놈들을 혐오했잖나. 보이는 족족 그저 뒤통수에 검을 찔러 넣기 바빴지. 그런 네놈이 문신을 해? 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한이 입꼬리를 내리더니 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씬 가짜는 아니네?”

    “……무슨 소린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한이 허리춤에서 악몽의 비수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는 돌렸다.

    그러면서 그의 앞에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그, 제논이라는 길드를 왜 넘겼어?”

    “아-”

    김창수는 그의 말에 탄식하듯 대답하곤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안달이 난 것이다.

    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창수의 입장에서는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그의 플레이 시간에서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겠지.

    리안의 말에 의하면 검은 말 조직은 시스템의 뒤를 닦아 주는 자다.

    오아시스라는 게임이 완전한 통제 아래서 이루어지도록 조력하는 이들.

    그런 조직에 통제라는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놈이 소속되었다고?

    물론 그의 자아를 삭제했겠지.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그는 그 스스로 자기의 몸에 걸린 프로그램의 제약을 뚫어 냈을지도 모른다.

    강함이라는 것은 프로그램의 입장에서는 수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아시스의 입장에서 마지막의 마지막인 이 게임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수치상 가장 강한 플레이어를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프로그램화하려고 했겠지만 상대가 한이라는 것에 빗대어 보면 크게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

    감히?

    저 빌어먹을 개망나니 새끼를 같은 팀으로 부려 보겠다고?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모르는 녀석에게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수 있겠지만 얼마 안 남았다. 이 녀석이 오아시스의 통제를 벗어나는 시간이 말이다.

    김창수는 미래가 훤히 보인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를 띠었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말이야.”

    “그래?”

    그때 김창수의 왼쪽 어깨에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독을 바른 악몽의 비수가 그의 어깨를 깊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아저씨, 잊었어? 그런 말장난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한의 불쾌한 얼굴이 다시 한번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김창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보였다.

    김창수라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기분을, 그의 상태를.

    그는 지금 상당히 불쾌하다.

    그것이 김창수 때문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김창수의 목은 떨어졌을 것이다.

    아니다.

    그의 불쾌함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치 확증받은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때문이다.

    “이상해. 아주, 이상해. 그 빌어먹을 놈 말이야.”

    “……정혁 말이군?”

    김창수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러자 한이 한 손가락을 들어 김창수를 가리키며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몇 번 그의 앞을 왔다갔다 거렸다.

    “내 변칙적인 공격 패턴을 완벽하게 카피했더라고? 그랬으면 나랑 몇 번은 붙어 봤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근데 기억에 없어. 아저씨도 알지? 내 옆에서 꽤 오래 따라 다녔지만 아저씨조차 내가 다음과 그 다음 공격을 어떻게 펼쳐 나갈지 모르잖아?”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김창수의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옆구리 그리고 왼쪽 발등과 오른손 손바닥에 연달아 비수를 찔러 넣었다.

    갑작스런 연계 공격에 김창수의 전신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고통에 참았던 비명을 토해 내자 한은 주머니에서 물약 병을 꺼내 김창수의 머리에 던졌다.

    약병이 깨지며 그의 몸의 상흔들이 서서히 아물어 갔다.

    “……여전……하군”

    “그래, 난 여전하다고. 그 말이 너무 좋아. 난 달라지지 않아. 원래,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나야. 근데 말이야?”

    한이 멈춰 서서 벽을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이 순간에 나는 뭔가 다른 것 같아. 익숙하지 않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아저씨, 나 여전히 미친 새끼 맞지?”

    이런 또라이 같은 기질까지 그래, 맞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녀석의 엿 같은 행동은 절대 정혁이 따라 할 수 없는 분야다.

    “맞, 맞지. 그러나 자네보다 더 미친놈이 등장해서 문제일세.”

    “……그래?”

    한이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다네. 이제까지 베일에 싸여서 우리 모두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녀석이 있었어…….”

    그때 한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마치 뭔가가 강제로 그를 정지시킨 것 같았다.

    김창수는 그가 프로그램에 통제당하고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오아시스가 지켜보고 있다.

    분명했다.

    그는 오아시스의 꼭두각시로 뽑혔지만 어쩌면 애물단지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한 통제,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강렬한 자아가 그 통제에 오류를 자꾸만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은 굳은 얼굴로 김창수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두어 번 저은 뒤 몸을 돌렸다.

    그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만난 진짜 한이었다.

    그의 미소와 살기.

    행동과 잔혹성.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랄 맞은 성격까지 완벽했다.

    평소였다면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제논이 성장하고 있는 이 시기에, 전쟁의 한복판에서 안도리니의 영토 안에 있는 그는 제논의 성장세를 한 번에 꺾어 버릴 위험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통제당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미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도 그의 치밀한 감에 의해 감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는 건, 오아시스 이 빌어처먹을 새끼야.

    네놈은 오히려 자신의 역린을 건드릴 꼴이 된 것이다.

    감히, 저 희대의 망나니를 마지막 수로 뒀다면 네놈의 멸망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김창수는 이빨을 깨물며 어두운 천장을 바라봤다.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뱉어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면, 녀석의 핵심 시설 중심부에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때 녀석이 무시했던 인간 중 하나로서 놈에게 침이라도 뱉어 줄 심산이다.

    속으로 즐거움을 삭히던 김창수는 또 다른 기척을 느끼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또다시 시작일까?

    그렇다 해도 그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놈들의 고문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이-!”

    검은 로브를 입은 또 다른 남자.

    익숙한 이니셜이 박힌 가면을 벗은 그는 ‘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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