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83화 (183/200)
  • ◈183화

    에도라의 전역에 전쟁의 패배에 대한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사실 패배라기보단 해방에 가까운 이 소식에 많은 에도라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롬의 정치는 독재와 같았다.

    자유는 그렇게 그들의 삶에 또 다른 귀한 가치가 되어 되돌아왔다.

    린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당장에 가슴에 피어오르는 투지와 동시에 달려드는 두려움에 멍한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에도라 전역에서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할 자들을 모으기 위해 자리를 떴다.

    정혁은 그녀에게 자유를 잃은 마지막 나라 안도리니에 해방의 불꽃을 심어 주자는 취지로 이야기를 전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린 역시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겠노라 대답하곤 그녀의 길을 향해 걸음을 올렸다.

    에도라에 남은 정예 군사 몇이 그녀를 따랐다.

    그리고 롬의 아래에서 고위직을 담당했던 몇몇 참모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은 제논의 역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다음 걸음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연달아 전달된 또 다른 전쟁의 소식은 타이런 대륙을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논의 수뇌부는 어둠 속에 침전한 듯 조용하고도 무거웠다.

    김창수.

    정혁은 안도리니와의 접경 지역에 가까이 닿은 제논의 전초기지에서 모여 마지막 전투 회의를 준비하며 비어진 김창수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혁이 만난 최고의 동료이자 든든한 동맹이었다.

    정혁이 ‘한’이라고 했을 때도, 그리고 또 ‘한’이 아니라고 했을 때도 초지일관 그는 정혁의 내면에 담긴 자아를 존중해 주었다. 그런 그의 결단이 있었기에 제논은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가끔 그가 타지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떠난다 하더라도 제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다 김창수라는 사람이 제논에서 거대한 기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없다.

    안도리니, 그곳에서 그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마지막 회의 시간에 팀장들과 여러 인원들을 기다리며 정혁은 테이블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도리니에게 자비는 없다.

    그들은 김창수에게 작은 정보 하나라도 캐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그를 고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고문에 김창수가 당할 리 만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정혁의 마음이 아팠다.

    끼익-

    문을 열고 제일 처음으로 등장한 건 역시나 안나였다.

    그녀는 조용히 자기의 자리로 가 앉으며 빈 김창수의 의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리안과 로만 그리고 유르겐까지 함께 들어왔다.

    그 뒤로 제논의 각 팀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이었다.

    에이드윈의 곁에 라테와 엘라, 에트론이 함께했고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린과 앤이었다.

    아린은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앤은 조용히 에트론에게 다가가 그에게 몇 마디 건넸고 사색이 된 에트론이 유르겐에게 양해를 구한 뒤 휘청거리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앤은 헛기침을 작게 하고는 구석에 서서 가만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모두 오셨다면 최종적으로 타이런 통일 전쟁의 전략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안나의 말에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인원들도 큰 숨과 함께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준비를 했다.

    안도리니의 최전선은 이제 사방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다.

    분산되었던 제논과 욘마곤의 연합 병력이 한쪽 측면 전체에 고르게 전선을 분포하였고 린의 격려에 호응한 에도라의 병력들 역시 속속들이 전선으로 모여 진을 치고 있다.

    안도리니에서 최신예 전쟁 병기와 산발적인 게릴라 공격으로 전선 외의 일반 민가 지역을 괴롭히고 있지만 아린의 통제에 따르고 있는 엘프 세 종족과 그의 영혼들이 이 공격에 맞서 적절히 대응해 주고 있다.

    이프는 박달수의 소개로 데릭이라는 남자를 만나 안도리니로 잠입했다.

    안도리니와의 연줄이 있는 데릭과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이프가 그와 협력하여 김창수의 행방을 최대한 알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시작의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면 전선은 점점 안도리니의 영토를 조여 갈 것이다.

    하나둘씩 함락되는 도시들 사이로 연합 병력이 수도를 향해 끊임없이 진격할 테고 안도리니는 결국 수도 방어전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혁과 에이드윈들이 진입하여 최소한의 손해로 이 마지막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

    문제는.

    “검은 말 조직입니다.”

    안나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이 안 됩니다. 마치 그들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로만이 조용히 말을 뱉자 장내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들이다.

    이번 싸움에 목숨 그 이상을 걸고 있는 자들.

    그렇기에 검은 말 조직에 대해서 더욱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들 역시 지금 자신들과 같은 마음일 테니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오아시스의 명에 따라서 이 세계를 지키려 들 것이다.

    지금 이 제논에 모인 바이러스들에게로부터 말이다.

    그렇기에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마지막 보루에 서 있을 것이고 관건은 이제 그들이 언제, 어느 시점에 본격적으로 움직일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일단 중요한 건 저희들을 제외한 여러분은 검은 말 조직원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시는 겁니다.”

    박달수가 불편하다는 듯 끙-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렇다고 리안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자유 연맹이 누구의 손에 의해 완벽히 박살났는가.

    신출귀몰한 그들이라면, 게다가 더욱 강해졌다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자존심이 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해서, 이제 제논은 저희 에이드윈들이 있는 군집을 중심으로 하나 하나씩 관문 돌파를 하는 쪽으로 전쟁의 방향을 가져갔으면 합니다.”

    “관문 돌파요?”

    안나가 리안의 말에 물음을 던졌다.

    “저희 각각이 몇만의 병력들과 함께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정혁인 것처럼 변장해야 합니다.”

    안나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에요. 어차피 저들의 목적은 분명할 겁니다. 정혁, 우리 마스터를 노리겠죠. 저들의 단단한 일격을 한 방에 맞는 것보다는 분산시키는 것이 당연히 좋을 겁니다.”

    “동의합니다.”

    드웨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정혁이 묻자 리안이 정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상대해야 할 자를 상대해야겠죠.”

    정혁은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곤 잠시 고개를 돌려 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순간, 두려웠다.

    정혁은 두려웠다.

    리안이 다시 한번 올곧은 톤으로 정혁에게 말했다.

    “상대해야 할 자를 당신이 반드시 상대해야만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인지 대부분은 모른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패닉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어쩌면 모든 군대가 와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정혁은 반드시 그를 만나 그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정혁은 처음으로 느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제까지 정혁은 자신의 자아의 기반을 ‘한’의 성격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늘 위풍당당했고 유쾌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잘못된 기억에 짓눌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선 이제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의해 가고 있다.

    그래, 정혁은 안다.

    자기는 그저 난민촌에서 죽어 가던 그 이상의, 이하도 입력되지 않은 프로그램 조각일 뿐.

    그런 자신이 여기까지 올라와 이제 이 게임 세상 최강이 존재와 다시 맞붙어야 한다.

    처음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미 한 번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 뼈저리게 느꼈었다.

    그런데 또다시?

    “혼자 보내진 않을 겁니다.”

    “예?”

    정혁이 번뜩 고개를 들고 리안을 보자 리안이 옅은 웃음을 보이며 정혁에게 말을 이었다.

    “하늬안 님과 함께 가세요. 그리고…… 돌체 님에게는 제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하늬안이 벙쩌서 리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뭔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예요?!”

    “……어……그, 글쎄요. 아, 아마도 제가 정혁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서...”

    정혁이 순간 당황한 리안을 보며 킥하고 웃은 뒤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러자 하늬안이 도끼눈을 뜨고 정혁을 노려보았다.

    정혁은 자기의 마음을 집어삼키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하늬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그녀였지만 그 눈 속에 미움이나 증오는 없어 보였다.

    “나머지 분들은 팀을 짭시다.”

    안나가 말했다.

    “아린 국왕은 죄송하지만 전면에 나서지 말고 계속해서 욘마곤과 에도라의 게릴라 공격을 막는 데 주력해 줘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들이 여유로울 때까지만입니다. 만약의 상황에 병력을 전선으로 집결시킬 수 있도록 긴장을 놓지 말아 주세요.”

    그러곤 안나가 각자의 이름이 표시된 말을 4개의 그룹으로 분산해 나눴다.

    “저희는 다이아몬드 진형으로 돌파합니다. 최전방에 리안 님이 서시고 좌우측에 로만님과 유르겐이 그리고 최후방에는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제가 아린 국왕과 함께 있겠습니다. 최후방은 전진하지 않습니다. 보급로를 지키고 지속적으로 전장 상황을 브리핑하는 데 최선을 다할게요. 나머지 세 그룹이 각각의 도시들을 돌파하며 전진하시면 되겠습니다.”

    “검은 말 조직이 나타난다면?”

    로만이 묻자 안나가 침을 한번 삼키고 말했다.

    “특별한 지원을 바랄 수는 없어요.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영…… 귀찮게 될 수도 있겠네.”

    유르겐이 툴툴거렸지만 안나는 그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에이드윈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일행을 지켜 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스스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전쟁을 하는 거니까.”

    리안이 조용히 안나의 말을 받아 이었다.

    정혁은 앉아서 가만히 턱을 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정혁의 말에 모두 정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그저 이 전쟁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손에, 그리고 제 손에 달렸습니다. 원하는 것을 찾고 바라는 것을 이루고 또 최대한 많은 것을 지키며 우리와 모두를 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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