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82화 (182/200)
  • ◈182화

    “잠깐은 즐거웠겠지. 행복했을 거야. 네놈들의 불쾌한 정의가 마치 이 땅에 살아날 것 같았겠지. 허나 세상의 어떤 존재든 역린은 있는 법. 어리석은 자여, 어찌 몰랐는가.”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아크가 바둥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돌체의 힘은 강하게 그를 부여잡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너희를 벌하러 온 존재. 게다가 나를 이곳에 불렀으니 대가는 각오했겠지?”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기적인 정의야.”

    주변에서 달려드는 모든 악마들을 전부 막아 내는 사이 돌체는 아크를 바닥으로 내던져 그의 가슴에 두 창을 내리꽂았다. 그와 동시에 틈을 만들어 낸 롬이 공기의 검을 이용해 돌체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돌체는 코웃음을 치며 그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튕겨 냈다.

    “악마와 계약한 떨거지야. 네가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지나 알고 하는 짓이냐.”

    “세계를 방관한 죄를 잊었나! 이 위선 덩어리들!”

    롬이 고함을 치며 다시 돌체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내 로만의 주먹과 린의 글레이브에 막혔다.

    돌체는 코웃음을 친 뒤 그의 등 뒤에 떠 있는 모든 무기에 자신의 빛을 주입했다.

    빛은 물줄기처럼 각각의 무기에 흘러 들어갔고 대천사장의 빛을 받은 무기들이 광채를 내며 일제히 쓰러져 바둥거리는 아크에게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크의 전신이 무기의 빛으로 찢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크가 소리쳤다.

    “이렇게 소멸하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알겠지? 알고 있겠지-!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이며-! 어차피 다시 살아날 것이다-!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그곳이 어디든-! 끝까지 침범해 주마!”

    순간 공격이 멈추고 아크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악마를 틀어막고 있는 정혁의 발치로 다가왔다.

    아크는 증오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기억……해라. 네 허무…… 그것의…… 의미를…….”

    정혁은 한쪽 발로 아크의 얼굴을 짓밟고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에드가를 불렀다.

    본드래곤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에드가가 상처 입은 몸으로 정혁의 부름에 답했다.

    “주인을 잃고 날뛰는 저 악마들에게 네 모든 힘을 보여 주자.”

    정혁의 말에 에드가는 가슴 깊이부터 브레스를 당겨 전장 전체에 황금빛 불길을 뿜어 냈다.

    돌체 역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자신의 여덟 날개에서 빛을 뿜어내며 주변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보라! 천계가 이제 일어났으니! 지상의 모든 악은 소멸하리라!”

    돌체의 고함과 함께 전장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앤은 가만히 가슴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며 울음을 참았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옳았노라 생각하며 하늘에 떠올라 빛을 발하는 아련한 자신의 처음과 마지막 사랑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크가 사라지자 롬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계약자에게 계약 대상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과 같다.

    이는 특히 흑마법의 영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의를 잃은 롬에게 린이 다가갔다.

    그녀는 글레이브를 바닥에 꽂고 가만히 죽어가는 롬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안아 주거나 보듬어 주는 따뜻한 행동은 없었다.

    단지 연민의 눈으로 스러져 가는 생명의 마지막을 바라볼 뿐.

    롬도, 린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 한 쪽의 눈에 생기가 사라질 때 다른 한 쪽이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인연의 끈을 매듭지어 잘라 냈다.

    악마들이 드래곤 브레스와 정화로 하나둘 지상에서 소멸하고 저주를 받아 정신이 나갔던 에도라의 플레이어와 존재들이 대규모 정화에 의해 정상적인 사고를 되찾았다.

    전투는 돌체의 등장을 통해 조금은 허무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정혁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크와의 싸움이 쉽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었다.

    다행히 로만과 유르겐의 가세가 있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사이 많은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 전쟁의 승리가 의미가 없어진다.

    죽은 플레이어들은 그만큼 현실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며 남은 자들은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길어지면 오아시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기회이기에 마음이 조급해지려는 찰나 돌체의 강림 덕분에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아 지면으로 내려가려 할 때 무언가가 에드가의 등 뒤로 올라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돌체가 있었다.

    돌체는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죽어 사라진 젠트라의 의지를 잇는 자여.”

    돌체의 창끝이 정혁의 가슴에 닿았다. 그 창끝에 빛이 몽글거리며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마음의 어둠을 조심하게.”

    돌체는 그 말을 끝으로 정혁을 또 한참 바라보다가 날개를 펄럭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에드가는 콧김을 흥 하고 뱉은 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리둥절함이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에는 이제 피 냄새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상처 입은 자를 도와 일으키고 목이 마른 자들에게 물을 나누며 사람들은 천천히 정혁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돌체는 앤을 안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에트론은 무기들을 모두 회수해 각각의 위치에 다시 무기고를 열어 밀어 넣었다.

    아린은 하늬안의 상태를 살폈고 그의 곁으로 이프가 회복약을 가지고 다가왔다.

    너른 언덕.

    피곤한 에드가가 몸을 웅크렸다.

    그들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자 정혁은 린에게 다가갔다.

    “정리……합시다.”

    정혁의 말에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언덕에 솟은 돌 위에 올라서서 진영에 상관없이 모인 모든 플레이어들과 각 나라의 존재들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에도라 왕국은 국왕의 잘못된 통치에 의해 옳지 않은 싸움에 가담했습니다. 전쟁은 이렇듯 우리의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 갔고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제논은 타이런을 침공한 것이 아닙니다. 욘마곤에 감도는 전운을 우리 에도라도, 저 안도리니도 반응하지 않고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륙의 패왕 제논만큼은 악에 대항하고 욘마곤을 구하고자 이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린의 말이 잔잔히 바람을 타고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제논은 욘마곤의 백성들을 구했고 정의를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보다는 날이 선 검 끝을 겨눴습니다. 제논은 끝까지 전쟁을 원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만한 경고를 받아들였지만 물러나지 않고 묵묵히 욘마곤의 재건에 힘썼습니다.”

    린이 정혁에게 손짓했다. 정혁은 천천히 린의 곁으로 올라갔다.

    “결국 이 제논의 지도자가 원한 것은 공동의 선이었습니다. 아직 뿌리 뽑지 못한 악마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는 것 그리고…….”

    린이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다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지금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제논이 겨냥한 적들에게 놀아난 결과이며 지도부의 무능함이 야기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전쟁을 멈추고 진정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라봅시다.”

    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도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멸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친우의 연합을 만났고 그들은 우리를 품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대륙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소중한 동료들을 짓밟았던 진정한 적을 향해 우리의 검 끝을 겨누겠습니다!”

    린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결의의 고함을 내질렀다.

    “제논과 함께! 에도라와 함께!”

    [……정혁!]

    모두의 고함소리에 묻혀 있던 전음이 정혁에게 들려왔다.

    정혁은 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에서 내려와 전음에 집중했다.

    [정혁! 대답해!]

    안나의 목소리였다.

    드웨이크가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마 그는 안나가 이렇게나 다급해 하는 이유를 미리 들은 것 같았다.

    [듣고 있어, 이야기해.]

    [……김창수, 우리 사령관이 안도리니에 납치됐어!]

    [뭐?]

    [리안 님이 급히 그곳으로 가셨어. 재정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알겠어. 준비하지.]

    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아시스가 세계를 운영하며 사용하던 가장 흥미로운 도구, 악마 그리고 마계.

    그 중심축이 무너져 내린 지금.

    게다가 오랫동안 정지되었던 천계가 움직이고 대천사장이 이 땅에 내려왔다.

    오아시스는 이미 정혁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최대한 자력으로 세계를 종결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서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려 하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제논.

    이 위세를 끊어 내고 싶어 할 것이며 이제 물불 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얻게 된 이 사람들과 함께 곧바로 우리는 안도리니로 향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강제 다운의 큰 수를 오아시스가 결국 실행하기 전에 먼저 오아시스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행위가 의미 없어진다.

    순간 정혁의 머릿속에 잘려 굴러가고 있는 아크의 머리가 떠올랐다.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고 연설을 마친 린에게 다가갔다.

    “미안합니다만, 자초지종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어느 정도는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쉴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겠죠. 그러나 이들이 지금 바로 안도리니로 향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

    정혁은 머뭇거리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곤 말했다.

    “우리는 이제 진짜 우리의 마지막 적을 상대하게 될 겁니다.”

    “무슨……?”

    “오아시스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보루.”

    정혁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을 말입니다.”

    린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 * *

    전장에서 멀어진 조용한 숲

    조용히 돌체의 품에 안겨 그곳까지 날아온 앤은 자신을 내려놓은 돌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돌체는 손을 뻗어 상처 난 앤의 몸 곳곳에 치유의 마법을 주문하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리한 도박 아니었나?”

    먼저 말을 꺼낸 건 돌체였다.

    “나와 함께한 기억을 품은 당신이라면 꼭 반응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앤이 옅은 미소로 말하자 돌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전하군.”

    “내가 어디 가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미안해, 매몰차게 행동했어.”

    돌체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앤은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시…… 당신을 이렇게 만질 수 있게 됐잖아.”

    “고마워, 기다려 줘서. 나를 계속 찾아 줘서.”

    돌체는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앤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둘은 그렇게 어떤 말도 더 나누지 않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한참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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