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80화 (180/200)
  • ◈180화

    위로였을까?

    혹은 위안이 되어서일까.

    정혁은 잠시 아크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저자에게 프로그래밍 된 AI의 목소리일까, 혹은 오아시스 그 빌어먹을 자식의 목소리일까.

    무엇이 되었든 정혁은 녀석이 말하는 의문점에 대해서 답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세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에 당신은 어디 있을까요? 생각해 봤죠? 그거, 은근히 기분 더럽지 않나요?”

    아크가 입꼬리를 올리고 양손을 정혁의 앞으로 내밀었다.

    “의미 없는 삶은 많은 허무를 낳지. 그리고 그 허무의 공간에 무엇이 쌓아지느냐, 그것이 가끔은 정의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증오…… 그리고 분노. 이런 것들이 가득 가득 찬단 말이야. 그럼 그게 결국?”

    아크는 손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자신의 손 안쪽을 파고 들어 자줏빛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순수한 그리고 모든 것을 충분히 무너트릴 수 있는 악. 그것이 되는 거야. 정혁, 당신의 마음에 지금 무엇이 차 있지? 같잖은 정의인가? 아니면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낳은 증오인가?”

    정혁은 대답 없이 공허한 눈으로 아크를 바라보았다.

    따악-

    그때였다.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 맞은 정혁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씩씩거리는 거친 호흡과 함께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하늬안이었다.

    “동태 눈깔 하고는!”

    하늬안이 정혁의 턱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강제로 들게 한 뒤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

    “기억해! 네 어깨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인지! 그게 단순히 허구인지 아닌지! 너를 위해 삶을 산화하고 있는 이들이 지금도 여기에 이렇게나 많다고!”

    하늬안의 고함에 정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마무리하고자 했지만 밀려드는 악마들의 물량 공세와 세뇌당해 광전사로 돌변한 채 죽음을 각오하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에도라의 플레이어들 때문에 제논과 욘마곤의 병력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미 플레이어들의 사망 숫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에도라의 플레이어들 또한 후에 마지막 전쟁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인력이다.

    그들이 죽어서도 또, 아군이 죽어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정혁이 재빨리 롬을 처치하고자 한 것 아닌가?

    “네가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고 해도! 이젠 네 짐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잖아! 이 시국에 그따위 눈동자로 저 병신 같은 말에 휘둘릴 거면 지금 내 검이 네 목구멍을 뚫어 줄 거야!”

    하늬안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정혁의 마음을 내려쳤다.

    정혁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턱에 댄 하늬안의 손을 밀쳐 냈다.

    그러곤 젠트라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결의를 다졌다.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

    하늬안은 알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아크는…… 제가 처리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마세요.”

    “……하지만!”

    드웨이크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혁의 눈빛에 살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쯧, 아쉽군요.”

    아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결국은 순수한 어둠이 세상의 모든 색을 집어삼키는 법이거늘.”

    정혁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젠트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마나를 전부 불어넣었다.

    젠트라에서 황금빛 열기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제가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아쉬움이 없을 겁니다. 왜인지 아시나요?”

    “조잘 조잘-”

    정혁이 아크에게 달려들었다.

    아크는 정혁의 젠트라를 가볍게 피해 내며 그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리곤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의 의지를 이을 것 같으니……!”

    아크는 동시에 인간의 모습이었던 탈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악마 형상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몸집에 네 개의 팔이 돋아나고 그 팔에 각각의 독특하고 날렵한 무기가 쥐어진다.

    “칼춤 한번 춰 볼까요!”

    아크의 고함과 함께 정혁과 아크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주고받으며 그들만의 전투를 시작했다.

    “롬.”

    린이 다시 롬 앞에 섰다.

    아크에게 자신의 역할을 잠시 내어 줬던 롬이 여유롭게 린의 부름에 대답하듯 고개를 까닥했다.

    “보여? 아크가 나타났다고 해도 우린 무너지지 않아. 너는 결국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야. 알잖아?”

    “린, 나는 이미 기쁨에 가득 차 있어.”

    “뭐?”

    “여기저기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이 전쟁에 자신을 소비하지. 지도자 하나가 뱉은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산화시키는 거야. 물론 게임이니까, 더 즐겁게 환호하며 말이야. 죽어도 어쨌든 또 하나의 삶이 기다리는 그곳이 있으니까.”

    “……아니!”

    앤이 소리쳤지만 롬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린. 나는 돌아가도 병신일 뿐이야. 돌아간 나의 몸은 그저 쓰레기 더미일 뿐. 나는 하반신 마비에 아무런 경제 능력도 없는 장애인일 뿐이라고. 내가 이곳에서 이런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이유? 나에겐 여기가 곧 현실이기 때문이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꿈을 전부 이룰 수 있는 곳.”

    린은 롬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그의 현실에 대해 조금 놀랐다.

    어쩌면 그가 평소 행해 왔던 그 모든 일들.

    왜 그가 그런 식으로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행위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현실은 모두 오아시스가 주입한 부분일 뿐.

    “그래서 너는 그런 현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네 태도가 옳다는 거야?”

    린의 말에 롬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하하, 아냐 아냐, 다만 나는 내 더러움이 너희들에게 더 많이 묻어나길 바랄 뿐.”

    독하다.

    린은 롬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연민의 감정이어도 어쩔 수 없다.

    롬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광기가 끝이 나고 더 많은 플레이어들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가 변화할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크가 말했지. 허무에 시달리다 보면 그 안에 차오르는 것은 더 깊은 어둠의 감정들. 그것들과 싸우는 것은 허무를 겪는 사람이 아니야. 그저 허무한 척하는 자들이지. 정혁? 저자는 아직 모르는 거야. 자신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허무의 감정을 억지로 숨기는 거지. ……위선자. 그러나 조심해.”

    롬이 하늬안을 가리켰다.

    “다음엔 네가 머리를 때려 주기도 전에 허무에 집어삼켜질 수도 있으니.”

    “……하!”

    하늬안이 헛웃음을 뱉곤 검을 쥐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녀의 강한 내리침과 함께 전투가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사방으로 맹렬한 검기가 난자했다.

    공기의 검에는 이전과 달리 정혁의 움직임을 봉인했던 저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드웨이크가 각각에게 방어 버프를 걸고 자신도 방패로 강한 방어진을 펼쳤다.

    안젤리나는 드웨이크의 등 뒤에서 신속의 움직임으로 이동하는 롬을 지속적으로 추적했다.

    하지만 린과 하늬안이 펼치는 난전 속에 정확히 롬을 조준하기란 쉽지 않았다.

    드웨이크는 한편으로 앤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외쳤다.

    “앤 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제야 안젤리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앤을 찾아보았으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히 공기의 검은 오직 린과 하늬안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앤이 이 방어막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큰 위험에 처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게다가 그녀 역시 롬과 함께 한 시간들이 많으니 그의 공격 패턴에 대해선 충분히 알 거예요!”

    “하지만!”

    드웨이크는 어딘가 찝찝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사방에 시야를 밝혀 본다.

    그러다 저 멀리 아크와 정혁이 싸우고 있는 이질적인 공간 앞에서 전신에 자신의 강렬한 마나를 두르고 뭔가를 외우고 있는 앤을 발견했다.

    위험하다.

    앤은 지금 이 싸움에서 정혁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혁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큰 착각이다.

    오히려 정혁에겐 지금 그녀의 도움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전쟁은 크고 작은 싸움의 모임이다.

    하나의 명령 앞에 상대의 전투력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거대한 물결이다.

    전쟁 안에 다양한 전투 반경이 존재하는데 이는 보통 싸움의 실력에 따라 나뉜다.

    즉, 끼어들 자리가 있고 피해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앤은 지금 자신이 피해야 할 자리에 기어코 들어갔다.

    랭커라면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을 터.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뭔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그들의 근접 난투전에 원거리 광범위 마법사가 협공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가야할까. 그녀를 막아서야 할까?’

    “드웨이크!”

    순간 자신의 방어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공기의 검날 수십 개를 드웨이크가 다시 한번 틀어막으며 정신을 붙잡았다. 안젤리나의 고함이 아니었다면 집중을 잃을 뻔했다.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린과 하늬안이 달라붙었다고 해도 상대는 롬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아크와의 직접 계약을 통해 본래의 힘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해져 있는 상태다.

    저주에 가까운 계약이기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힘이 약해지겠지만 아직은 린과 하늬안 그리고 정혁과 안젤리나의 공격을 전부 받아 내고도 틈을 만들 여유까지 가진 상황이다.

    그저 지금은 이 싸움에 집중할 수밖에.

    드웨이크는 한 번 더 마법을 영창하고 있는 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질끈 감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는 오른손에 쥔 스피어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한 번의 일격.

    조금의 빈틈이라도 허락했다간 그곳에 쑤셔 넣어 줄 강렬한 일격.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천천히 스피어의 끝에 자신의 모든 힘을 조금씩 조금씩 쌓아 넣고 있었다.

    하늬안은 드웨이크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이 합을 맞춰 온 시간이 빚어 낸 자연스러운 전투 본능이다.

    하늬안은 그가 틈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롬의 공격은 부드럽고 물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맹렬하고 난잡하다.

    이는 린의 움직임에 완벽하게 맞춰져 있다.

    하늬안이 그들의 싸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린의 주변으로 날아드는 또 다른 공기의 검을 틀어 막아 주는 것뿐이었다. 린이 이 싸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은 조금의 틈을.

    드웨이크와 안젤리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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