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9화 (179/200)
  • ◈179화

    롬의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팔에 들린 보이지 않는 검이 정혁의 허벅지를 찌르곤 사라졌다.

    정혁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이를 갈며 롬을 노려보았다.

    롬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롬인가, 아니면 아크인가. 결정은 네 마음이지만 말이야.”

    롬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다시 한번 정혁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결국 내가 이길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사방에서 검기가 날아든다.

    그러나 정혁은 움직일 수가 없어 다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단순한 찌름이 아니다. 검날에 어떤 저주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건 그대로 맞아 낼 수밖에 없다.

    맞아…… 낼 수밖에……?

    아차.

    정혁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그가 이 정도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지켜 주던 존재들 덕분이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는 사실 ‘물몸’이다.

    숙련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기본적인 스킬들과 여러 칭호들의 조합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 엔듀라곤 화산에서도 몇 번의 공격에 의해 이미 죽을 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이 공격만으로 체력이 상당히 빠졌다.

    그렇다면 이 공격을 맞고 버티는 것은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젠장……!”

    “롬!”

    그때 정혁의 앞에 금빛 머리카락의 한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날렵한 솜씨로 검을 놀려 정혁에게 날아드는 보이지 않는 검기를 모두 쳐 낸 뒤 도도하게 서서 롬을 노려보았다.

    정혁은 당황해 몰아쉬던 가쁜 숨을 정돈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뒷모습만 봐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현재 랭킹 1위.

    린이었다.

    “아크와 계약하더니 악마 그 자체가 되어 버렸구나.”

    린은 롬을 보며 혀를 차곤 등 뒤의 정혁을 힐끔 보았다.

    “과장된 소문이었나 보죠?”

    “……민망하군요.”

    정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린이 그의 앞에 작은 물병을 던져 주었다.

    정화제였다.

    정혁은 그것을 받아 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심호흡을 했다.

    “악마들과 싸울 땐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해요.”

    “아아, 원래는 늘 천사가 도와줬었거든요.”

    정혁의 말에 린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곤 다시 롬을 바라보았다.

    린이 등장하자 롬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있는 듯했다.

    린의 차가운 표정이 계속해서 롬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롬은 뭔가 한층 누그러진 듯 보였다.

    “린, 배신하는 건가?”

    “배신?”

    린이 헛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배신이라, 그런 건 보통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말일 텐데? 지배당하더니 정신도 나가 버렸나 보지?”

    “아니.”

    순간 롬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린의 앞에 나타났다.

    롬은 린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내가 너보다 강할걸?”

    린이 그의 손을 붙잡고 벗어나려 하자 롬의 복부에서 네 개의 팔이 솟아 나와 린의 사지를 붙잡았다.

    “어때?”

    네 개의 팔은 분명 아크의 것이었다.

    정혁은 숨을 고르고 곧장 그 팔들을 모두 망치로 후려치며 린에게 기회를 주었다.

    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풀려난 양손으로 롬의 팔을 비틀어 손길에서 벗어난 뒤 그의 복부를 차고 뒤로 몇 걸음 후퇴했다.

    “아크가 이미 그의 몸을 전부 잠식한 모양입니다만.”

    정혁이 정면을 주시하며 린에게 말했다.

    “롬의 자아만은 남아 있는 것 같군요.

    근데 뭐, 만만치 않은 정신병자네요.”

    “……아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어요.”

    린이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스터!”

    저 멀리 드웨이크의 목소리와 함께 정혁의 일행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드웨이크와 앤 그리고 안젤리나 그들은 활로를 뚫고 정혁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린은 앤과 안젤리나를 발견하곤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뒤 씁쓸하게 롬을 바라보았다.

    롬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린은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롬은 집단을 꾸리고 리더가 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항상 삐뚤어진 결과를 초래했다.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결단은 구성원들을 함정에 빠트리거나 종종 사망에 이르게까지 했다.

    그럼에도 롬은 마치 중독자처럼 누군가의 위에 있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한’은 반드시 밟아 줘야만 하는 존재였다.

    유아독존의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만 하는 존재.

    롬이 게임을 하는 유일한 이유.

    이 염원 때문인지 용은 그에게 능력을 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그를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팀을 꾸렸고 이들과 ‘한’을 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한’은 사라졌다.

    목적을 잃은 이들이 흩어지려 할 때 누구도 롬의 곁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롬은 힘으로 이들을 붙잡으려 했고 린은 그런 롬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이 불쌍한 남자를 누군가 곁에서 보듬지 않는다면 이자가 결국 또 다른 ‘한’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린은 그의 곁에 남았다.

    다만 철저히 그를 배제하며 그의 곁에 섰다.

    린이 남자 그녀를 지지하던 자들이 남았다.

    롬은 스스로 이 남은 자들의 랭킹을 매겨 선포했다.

    그들은 강했다.

    충분히 강했다.

    그러나 랭크가 그들의 강함을 전부 투명하게 대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롬은 의아하게도 자신을 랭킹 1위로 세우지 않았다.

    린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자신에게 주어진 이 랭크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은 롬의 광기를 붙잡고 그가 세운 왕국 에도라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할 뿐이었다.

    안도리니 제국의 미치광이 제이크가 나타났을 때, 그 제국이 장성하기 시작하면서 롬의 심기가 날로 불편해졌지만 린은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롬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번엔, 이 삼파전 속에서 폭발하는 롬의 광기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법은 결국 그녀가 참전하여 저들을 빠르게 잠재우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고 싶었으나 모든 것이 꼬여 버렸다.

    데릭의 제안,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악마의 졸개가 되어 버린 그와 남은 랭커들.

    그리고 데릭이 전달한 또 다른 사실까지.

    “롬.”

    린은 가만히 분노와 광기에 물든 롬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애틋함일까.

    롬은 린에게 꾸준히 자기의 감정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린은 조금도 그 마음에 동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롬은 그저 철없이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 시간 그에게 쌓인 마음이라면 미운 정뿐.

    그래서 인지 사실을 전달받은 린에게 롬은, 지금의 롬은 더욱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금 증오해야 할 대상은 롬이 아니라 아크였다.

    아크의 본질적인 악이 마음에 구멍이 많은 롬에게 젖어들었고 롬은 온몸에 아크를 받아 내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선량했던 에도라의 모든 시민들까지, 플레이어들까지 저주 속에서 전쟁의 광전사들이 되어 버렸다.

    잠깐의 여유 속에 생각에 잠겨 있던 린의 곁으로 앤과 안젤리나가 다가와 섰다.

    “맛이 갔군요.”

    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린은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합시다.”

    안젤리나가 등에 멨던 활을 다시 고쳐 쥐고 결의에 찬 눈으로 말하자 린 역시 동의한다는 듯 글레이브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 이거 제논의 대가리하고만 결전을 치르려 했더니 다섯 명 대 한 명은 좀 너무한 거 아냐?”

    롬이 그들의 전투태세를 비꼬듯이 말하고는 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뭐 나도 어쩔 수 없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롬의 몸에서 검붉은 마나가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곁에 뭔가가 천천히 형상화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화한 아크였다.

    아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웃으면서 말했다.

    “안녕하신가요. 인간들이여. 저는 마계의 악마왕 아크라고 합니다.”

    소문대로.

    녀석은 결국 가뜩이나 혼란한 마계의 질서를 완전히 뭉개며 대악마에서 악마왕의 자리까지 올라선 모양이었다.

    “정혁, 당신에게는 내가 필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정혁이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당신 덕분에 군주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 그들에게 분산되었던 내 모든 힘이 다시 흡수되고 그로 인해서 다른 대악마들이나 무려 악마왕까지 모두”

    아크가 엄지손가락으로 자기의 목을 한 번 그었다.

    그어진 목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나는 믿고 있었지. 이 중간계엔 군주들을 처리해 낼 훌륭한 인재가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게 말도 안 되는 대장장이일 줄을 몰랐지만, 뭐 그렇기에 인생이 다이내믹한 것 아니겠나.”

    아크는 허허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내 감사를 받아 주게나, 정혁.”

    “지랄.”

    정혁이 고개를 저은 뒤 두 망치를 내려놓았다.

    아크를 상대할 땐 이 망치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진심을 다해서 싸워야 한다.

    상대는 무려 마계의 악마왕.

    그 정점에 있는 자다.

    롬에게 힘을 대고 있다곤 해도 방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젠트라를 쥐자 아크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했다.

    “오오- 어디서 불결한 용의 냄새가 나나 했더니 참 대단-하군요.”

    아크는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고결한 고대룡의 잔재가 검으로 벼려지다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 검 안에는 이미 젠트라의 모든 것이 담겨 있군요. 마치…… 아. 이거 참, 안타깝네.”

    아크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측은하다는 얼굴로 정혁에게 말을 이었다.

    “그것 역시 당신의 것은 아니군요.”

    부득-

    정혁이 이를 갈았다.

    내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정혁은 이곳에서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싶었다.

    강함의 정점을 찍고 추락했다.

    대의를 향해 모든 능력을 내려놓고 자신의 힘과 지위를 포기했다.

    자신이 제논 연합의 지도자이기는 하나 결국 이 모든 직함은 허울 좋은 허상일 뿐.

    이제 정혁을 제외한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세상을 향해 싸워나가야 한다.

    정혁은 하나의 도구.

    그것에 불과했다.

    “도구에 불과하다.”

    아크의 말에 정혁이 조금 놀라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마음, 너무 좋지요.”

    아크의 능글맞은 표현이 정혁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생각해 봐요. 아아? 당신이 이곳에 왜? 왜 서 있어야 하지?”

    젠트라를 쥔 정혁의 손이 작게 떨렸다.

    “마스터, 싸워야 합니다. 들으시면 안 됩니다.”

    “잠깐, 잠깐만요.”

    정혁이 드웨이크의 재촉을 말리며 손을 뻗었다.

    린과 앤 그리고 안젤리나는 뭔가 꺼림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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